기독문화/신앙에세이 썸네일형 리스트형 “인생을 함축하다. 세인트로렌스” 어제는 친구와 태화강 근처에서 만나 점심을 먹고 잠깐 강변을 함께 걸었다. 봄꽃들이 만개한 강변은 향기로 가득했고, 바람도 불지 않아서 도시 전체가 달콤한 기운에 잠긴 듯했다. 꽃 그림자가 어른거리는 태화강 수면은 투명한 햇살을 받으며 고요하게 반짝였다. 27년 전 낯선 울산으로 옮겨와서 적응하기 힘들 때마다 태화강에서 위로를 받곤 했는데, 삭막한 산업도시의 풍경 속에서도 태화강이 눈에 들어오면 생명의 향기를 맡은 듯 반가웠다. 강(江)은 종종 인생에 비유된다. 시간에 따른 변화와 흐름, 불가피한 여정, 과정에서의 수용성, 발원과 종착의 이미지, 평온과 격동의 교차, 생명의 상징성까지 인간의 삶과 흡사한 특성들 때문일 테다. 누구나 강 앞에 서면 일상의 번잡함을 내려놓고 삶의 의미를 반추하게 되는데,.. 더보기 “이타적 건국 이념의 숨결, 워싱턴 D.C.” 미국의 관세 부과와 독단적인 외교정책이 세계를 흔들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당선 이후 세계 정치와 경제는 거센 바람에 휘말린 듯 급격한 전환점을 맞이하였다. ‘미국 우선(Make America Great Again)’이라는 슬로건 아래, 기존의 다자주의적 가치와 국제 협력의 길을 뒤로하고 자국의 이익을 최우선에 두는 정책을 표방하고 있다. 이런 변화는 미국 내외에서 적지 않은 논란을 일으켰다. 어떤 이들은 미국이 그간 유지해 온 ‘우아한 위선’을 벗어던지고 ‘정직한 야만’을 택했다고 꼬집기도 한다. 그들의 입장이 어느 정도 이해되면서도, 미국의 이타적 건국 이념을 떠올릴 때마다 씁쓸함을 감출 수 없다. 그 이념이 살아 숨 쉬는 곳, 워싱턴 D.C.에서의 여행 기억이 또렷하게 다가오기 때문이다. .. 더보기 "일상 음악의 세계, 잘츠부르크" 올해, 나는 교회 성가대원으로 섬기게 되었다. 성가대 소속 실내악팀에서 플루트 연주로 15년간 봉사하다가, 다른 부서로 옮겨간 지 8년 만에 다시 성가대 찬양팀에 합류했다. 성가대원의 가장 큰 유익은 주일 예배에서 드린 찬양이 한 주간 내내 귀와 가슴 속에 울려 퍼진다는 점일 테다. 주의 성호(聖號)를 담은 선율 속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일상의 은혜를 누리는 것이다. 관현악기들의 어우러짐 속에 빚어지는 실내악의 하모니 못지않게, 각자의 음역이 자아내는 음성의 화음도 즐거움을 선사한다.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음악으로 찬양하고 일상을 누리는 건 더없이 행복한 일이다. ‘음악’이라면 내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미지는 ‘계단 위 초록색 대문’이다. 유년 시절, 커다란 바이엘 악보책을 들고 오후 세 시면.. 더보기 "태조의 기억을 간직한 땅, 몽골" 밤이면 베란다의 블라인드를 내리다가 한참 하늘을 바라보고 서 있을 때가 있다. 15층 남향인 우리 집 베란다에선 달의 변화를 뚜렷이 볼 수 있는데, 미인의 눈썹 같던 초승달이 잠깐 상현달이 되었다가 어느새 보름달로 차오르곤 한다. 아! 오늘이 보름이구나, 매번 새로운 감탄으로 밤하늘을 바라보게 된다. 거실에 있는 남편을 불러 저 아름다운 달을 좀 보라며 수선을 피울 때도 많다. 남편과 함께 감탄하고 있는 시간, 달에서 바라보는 푸른 별 지구는 어떤 모습일까 상상해 보기도 한다. 정확하게 운행되는 우주와 그 위에 스민 창조주의 손길을 자각하게 되는 밤하늘은 언제나 경이롭다. 그럴 때면 읽고 있던 책이나 저녁 식탁 메뉴, 친구의 안부 전화에 머물렀던 내 의식은 지경을 넓혀 우주로 확장되곤 한다. 이런 현.. 더보기 "통찰의 프리즘, 트리어" 만약 이삼십 대에 오십 대의 통찰력을 가졌더라면 어땠을까, 가끔 상상해 볼 때가 있다. 아마 일의 실수나 오류를 조금은 줄였을 테고, 사람에 대한 이해의 폭도 훨씬 넓었을 테다.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으면서도 한결 신중했을 테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가로젓게 된다. 시간을 따라 제련된 깊은 눈빛이 어떻게 젊은이의 것이 될 수 있겠는가.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라는 고린도후서의 말씀처럼 나이 듦에 따른 유익에 감사할 때가 많다. 정신적·영적 성숙이 나이와 정비례하지는 않겠지만 분명 상관관계는 있는 듯해서다. 사람은 자신의 나이만큼 넓어진 프리즘을 통해 인생을 반추할 수 있고 경험에 따른 통찰력을 지니게 되는 것 같다. 연로한 어르신들 앞에 우리가 고개를 숙이고 존경해.. 더보기 “새로운 시각을 요청하는 땅, 도쿄” 11월 들어 일본에서 또 6.3의 강진이 발생했다는 기사를 보았다. 주기적인 지진을 감내해 온 일본 국민의 고통이 남의 일처럼 여겨지지 않았다. 기사를 본 후 안타까운 마음으로 그들의 안녕과 구원을 위해 잠깐 기도하는 시간을 가졌다. 이런 나의 태도는 이전과 비교해 분명 변화된 모습이다. 예전에는 환태평양 조산대에 놓인 일본의 고통을 그저 안쓰러워하는 정도에 머물러 있었다. 어쩌면 내 마음 깊숙한 곳에는, 지진대에서 살짝 비켜나 있는 우리나라의 지질학적 위치를 다행으로 여기는 얄팍한 이기심이 숨어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일본을 향한 마음에 진심 어린 변화가 일어난 건 작년 5월, 도쿄 가족여행 중에 직접 지진을 겪은 후부터다. 도쿄 가족여행은 아들이 모두 계획하고 준비해서 함께한 여행이었다. 이미 .. 더보기 "땅의 끝은 바다의 시작, 리스본" 어릴 때, 아버지가 여덟 살 생일 선물로 사 주신 커다란 지구본을 매일 들여다보곤 했다. 어느 날은 우리나라와 대척점에 있는 아르헨티나를 찾아보고, 또 어느 날은 고개를 꺾어 남극 땅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지구본만으로 만족이 안 되면 큰오빠의 교과용 컬러판 사회과 부도를 펼쳐보기도 했다. 모든 대륙 모든 나라 모든 도시가 호기심의 대상이었다. 중·고등학교 시절 유독 역사와 지리를 좋아했던 이유도 세상을 향한 호기심 때문이었을 테다. 지구본과 지도책만으로 세상을 품은 듯 행복했었다. 한번은 유라시아대륙 극동에 위치한 한국의 반대편 즉, 대륙의 최서단을 유심히 바라본 적이 있다. 유라시아대륙의 최서단 지점은 포르투갈 리스본 근처였다. 그 땅은 유라시아대륙을 지나온 고단한 태양이 대서양 아래로 숨어들어 잠.. 더보기 “이미지를 소비하는 땅, 모나코” 얼마 전, 프랑스 L사의 천만 원대 명품 가방이 중국 공장에서 제작되는 원가는 팔만 원에 불과하다는 기사를 보았다. 이미지와 실체의 극단적 차이를 고발하는 기사에 독자들은 허탈하다는 댓글 반응을 쏟아놓았다. 세계 1위 부호에 등극해 있는 L사의 오너야말로 ‘이미지 소비’라는 단순 전략으로 소비자들을 공략해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말 그대로, 일부 소비자들이 L사의 가방을 사기 위해 오픈런과 무한대기를 마다하지 않는 건 가공된 명품 이미지 때문일 테다. 분수에 넘치는 고액을 지불해서라도 명품 이미지를 사서 자기화하려는 것이다. 건전한 실체보다 거품 가득한 이미지에 집중하는 우리 사회를 잘 보여주는 단면인 것 같아 씁쓸했다. 그 기사를 접하면서 문득 명품 이미지의 대명사로 불려온 영화배우 ‘그레이스 켈리.. 더보기 바울 사도가 갈망한 땅, 로마 지난 6월, 교회사 편찬을 위한 선행작업으로 울산지역 교회사를 정리하는 시간을 가졌다. 울산지역 교회사 안에서 우리 교회 설립의 의미를 찾아보려는 목적이었다. 여러 자료를 참고하며 울산지역 교회사를 요약하는 과정에서 개인적으로 큰 은혜를 받았다. 미국북장로교와 호주빅토리아장로교 선교사들을 통해 부산을 거쳐 울산에 복음의 빛이 스며드는 과정은 한 편의 감동적인 대하 드라마였다. 일신의 안녕을 뒤로하고 전 생애를 복음에 바친 선교사들의 희생에 먹먹했다. 사역 중에 병사(病死)하거나 자녀를 잃은 선교사들은 물론, 천신만고 끝에 선교지에 도착하자마자 폐렴으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선교사도 있었다. 그분들은 하나같이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어 많은 열매를 맺듯 선교의 큰 밑거름이 돼주었다. 1895년 .. 더보기 따로 또 같이, 스페인 며칠 전 문학 포럼 행사가 있어 서울에 다녀왔다. 서울에 거주하는 작가들에게는 몇 시간의 외출이지만 지방 작가에게는 하루를 고스란히 할애해야 하는 일이다. 다녀올 때마다 물리적 거리에 쏟은 시간은 아깝지 않은데 서울 작가들의 지방 편견에 가끔 회의가 느껴질 때가 있다. 지방에서 작품 활동하려면 제약이 많겠다며 안쓰럽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울산을 변방의 귀양지 정도로 여기는 것 같아 씁쓸해진다. 한번은 포럼에 참석한 유명 작가께서 내게 고향이 어디냐고 물어서 부산이라고 답했더니 그렇다면 해양문학-이를테면 어선의 종류와 운용 방법, 어부의 삶이나 어종 등- 창작에 유리하겠다며 부러워해 깜짝 놀란 적이 있었다. 부산이라고 하면 바다를 먼저 떠올리는 건 이해하겠는데 부산사람은 대부분 배를 타거나 어업에 종사.. 더보기 편견을 지우는 땅, 티라나 타인(인간)과 타지(세계)에 관해 인식의 지평을 넓히고 싶다면 단연 독서와 여행이 최고다. 독서는 마음으로 하는 여행이며, 여행은 몸으로 하는 독서라는 말이 있다. 되새길수록 정확한 말이다. 독서는 물리적 세상에서 겪는 다양한 인간군상의 구체적인 삶을 이해하게 해 준다. 육하원칙으로 작성한 언론 취재 기사만으로는 인간의 삶에 깊이 다가가기 어렵다. 예를 들어보자. 예전에 ‘아프가니스탄’이라고 하면 이슬람 원리주의와 탈레반, 여성 탄압과 난민 정도가 내가 알고 있는 전부였다. 그 땅의 역사와 인종, 문화에 관해 문외한이었던 내가 그곳 백성을 위해 구체적으로 기도할 수 있게 된 건 세 권의 소설책 때문이었다. 아프가니스탄 출신의 미국 작가 ‘할레드 호세이니’가 쓴 , , 가 그것이다. 세 작품에는 소련의 .. 더보기 이분법의 상처, 모스타르 얼마 전 문학 모임에서 한 분이 자신이 지지하는 정당의 ‘절대 선’을 설파해 참석자들이 피로를 느낀 일이 있었다. 정책 사안에 따른 호불호가 아니라 ‘내가 지지하는 정당이니까 모든 정책이 옳다’는 논리는 이분법에 가까워 보였다. 흑백논리에 근거한 이분법은 객관성과 다양성이 결여돼 지나치게 단순한 결론을 만든다. 더욱이 적대적 그룹을 만들어 사회적 갈등을 야기하기도 한다. ‘내가 지지하지 않는 정당이니까 모든 정책은 악하다’는 결론에 이르면 사회적 오류를 낳는다. 이분법을 개인에게 적용하면, ‘저 사람의 어떤 행동이 싫다’가 아니라 ‘저 사람이니까 모든 행동이 싫다’라는 논리가 되는 것이다. 세계를 여행하다 보면 무지한 이분법을 도처에서 목격하게 되는데, 그 참상이 가장 선명했던 도시가 ‘모스타르’였다. .. 더보기 살구꽃 소묘 -Ⅰ - 황량한 안뜰 밭에 거무튀튀한 나무 십여 그루가 제 모양대로 서 있다. 한겨울 찬 바람을 온몸으로 맞으면서도 불평이라곤 없다. 그저 제 자리를 지키는 게 최선의 성실임을 아는 모양이다. 저 어래산 골짜기의 얼음장이 풀렸는가. 발밑으로 흐르는 물소리를 용케도 잘 감지했는지 서둘러 저들만의 교향곡을 연주할 채비를 서두른다. 나도 덩달아 집 뒤뜰에 모아둔 퇴비를 실어 내느라 분주해졌다. 저들의 밑둥치에 골고루 흩뿌리자 배고픈 강아지가 꼬리를 흔들듯 반가운 기색이 역력하다. 일주일 뒤, 그동안 은밀하게 준비했던 교향곡을 연주하기 시작한다. 키 작은 것에서부터 뒷짐 졌던 노거수에 이르기까지 손놀림이 재바르다. 하얀 움이 돋는가 싶더니 밤새 도툼도툼 제 음량을 조율한 듯하다. 굳이 깃을 세운 화려한 연.. 더보기 성숙한 기억법, 뉴욕 인간은 아픔을 겪으면 고통을 최소화하기 위해 다양한 심리적 방어기제를 사용한다. 기억을 억지로 억압하거나, 왜곡하면서 회피하거나, 원인을 외부로 투사해 분노를 표출한다. 심한 경우 신체화나 전이, 해리를 경험하기도 한다. 문제는 어떤 방어기제든 자신과 타인을 객관적인 시선으로 보지 못하게 만든다는 점이다. 방어기제가 내면에서 작동하면 우울함이, 외부로 작동하면 분노가 된다. 가장 고상한 방어기제 중 하나인 ‘승화’조차도 고통을 잊으려 가치 있는 일로 시선을 돌리는 것에 불과하다. 그만큼 고통을 직시하면서 삶의 일부로 인정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고, 고통을 통한 의미 천착은 더더욱 어렵다. 의지 밖의 고통은 함부로 해석할 수도 없다. 그런데, 개인의 고통을 공동체가 함께 끌어안고 묵묵히 직시하며 기억하는 공.. 더보기 열정의 두 얼굴, 코린토스 성형수술 전후의 변화를 다룬 동영상이 유튜브 조회 수백만 회를 상회하곤 한다. 주목받지 못하던 얼굴이 몇 번의 성형수술로 드라마틱한 개선을 거듭한 결과 추앙받는 여신이 되었다는 광고성 내용이다. 결론은 ‘평범한 당신도 여신이 될 수 있으니 지금 당장 수술대에 오르라’는 주문과도 같다. 여성들이 가진 미의 욕구와 신화의 환상 이미지를 섞은 콘텐츠에 구독자들은 열렬하게 반응한다. 아름다움의 욕구는 인간의 본능이지만 그것이 ‘여신의 탄생’이라는 헛된 열정으로 연결될 때 자아 숭배로 오염될 수도 있다. 세상은 그리스 신화의 여신 ‘아프로디테’나 로마신화의 여신 ‘비너스’를 아름다움의 근원으로 추앙하지만, 그 원류를 거슬러 올라가 보면 우상 숭배와도 맞닿아 있다. ‘아름다움의 총화’를 상징하는 ‘미의 여신’의 실.. 더보기 우위 본능의 극치, 베르사유 얼마 전 한 문우가 내게 인스타그램 활동을 시작해 보라고 권했다. 소설작품으로 독자와 소통하기에 좋은 방편이 될 수 있다며 자신도 얼마 전 활동을 시작했다는 것이다. 간곡한 조언에 SNS의 순기능을 믿으며 인스타그램 계정을 만들어 보았다. 이미 출간한 다섯 권의 책 사진을 올리고 지인 몇몇과 친구가 되었지만, 성정에 맞지 않아 며칠 만에 비공개로 전환해버렸다. 인스타그램을 열면 쏟아지는 내용들이 인간 세포에 새겨진 지독한 욕망 같아 불편했다. 많은 경우, 자신이 가진 부와 아름다움이 상대방보다 우위에 있다는 걸 증명하려는 듯했다. 물론 개인의 추억 저장이나 진솔한 삶의 공유, 선한 목적의 연대 등 순기능도 있겠지만 곳곳에 과대 포장과 허세가 난무했다. 자기표현 욕구는 누구에게나 있고 죄가 아니지만, 문제.. 더보기 생명을 향한 열정, 산티아고 심리학자들은 인생의 후반기가 되면 육체적 인간에서 정신적 인간으로 변모하여 삶의 에너지를 내적으로 바꾸어야 한다고 말한다. 자신이 지나온 길을 숙고하며 인생을 통찰하는, 보다 품 넓고 넉넉한 사람으로 승화한다는 것이다. 그래서였을까, 나도 오십 대가 막 시작되었을 때 산티아고 순례길로 향했다. 시간적 제약 때문에 일부만 걷고 돌아왔지만, 그 길 위에서 생명을 향한 열정을 만날 수 있었다. 산티아고 순례길은 프랑스 남부 생장에서 출발해 피레네산맥을 넘어 스페인의 서쪽 끝 도시 산티아고를 향해 가는 장장 800km의 길이다. 그 길에는 삶을 깊이 묵상할 수 있는 느린 시간이 흐르고 있다. 길의 종착점은 산티아고데콤포스텔라(Santiago de Compostela) 즉, 야고보 교회이다. 길 없던 그 길을 처.. 더보기 신소망의 다른 이름, 극야(極夜) 사계절 중 여름을 가장 좋아하는 내게 주변인들은 작가답지 않다고 말한다. 처음엔 나도 유별난 여름 사랑이 오랜 교직 생활 중에 학습된 것이라 여겼다. 쉼과 여행, 휴가와 수련회를 품은 여름방학을 기다리다 보니 나도 모르게 여름을 좋아하게 된 줄 알았다. 하지만 더 정확한 이유는 낮이 긴 날들을 선호하는 내 성향 때문이다. 왜 그런지 퇴근 무렵에도 해가 쨍쨍한 여름은 선물처럼 느껴진다. 여름 새벽의 새 소리와 여름 저녁의 풀 냄새만으로 몸과 맘이 충만해진다. 일 년 중 낮이 가장 긴 하지(夏至)가 다가올수록 상쾌지수는 점점 높아지고, 남들이 더위로 지긋지긋해하는 하루하루를 아껴 쓰고 싶을 정도다. 하여, 8월 말 서쪽 하늘에 붉은 노을이 짙어지고 하늘빛이 깊어질 때면 그렇게 서운할 수가 없다. 꼭 십 년 .. 더보기 처자妻子이별바위 일본 나가사키현에 있는 히라도를 탐방했다. 400여 년 전 기독교 박해가 끔찍했던 곳이다. 순교자들이 처형당하기 직전에 가족과 이별했던 장소 ‘처자(妻子)이별바위’에 들어선다. 이곳 바위들은 크지도 작지도 않다. 품에 안아보고 싶도록 매끄럽고 윤이 난다. 탐방객들을 맞아주는 표정이 환하다. 입을 씩 벌리고 눈웃음을 머금은 듯한 바위. 그날의 슬픔을 고스란히 품고 있으면서도 기품까지 풍긴다. 순교자들과 가족들이 이별을 앞두고 부둥켜안고 흘린 눈물에 지금까지 바위는 이끼가 끼지 않는다는 말도 있다. 그들은 이렇게 흔적을 남기고 하나님 품으로 돌아갔던가. 유치환의 ‘바위’가 떠오른다. 내 죽으면 한 개 바위가 되리라. 아예 애련(愛憐)에 물들지 않고 희로(喜怒)에 움직이지 않고 비와 바람에 깎이는 대로 억년(.. 더보기 훈련중 40일 새벽기도 작정 이틀째에 새벽을 깨우지 못했다. 마음이 허술해도 너무 허술했나 보다. 다시 시작한 지 삼일 만에 또 넘어지고, 또 다시 삼일 만에 패배했다. 일주일 동안 버둥거리기만 한 것 같다. 한 번 더 마음을 먹었다. 그러고 나서 3일 째 저녁이었다. 다음날 새벽엔 폭우가 쏟아진다는 기상예보에 기다렸다는 듯 자포했다. 교회 가는 길에 건너는 지름길 외다리가 분명 범람할 것이기 때문에. 에움길로 가면 10분은 더 가야하기에 새벽의 금쪽같은 10분을 손해보고 싶지 않다는 내 안의 방해꾼에게 홀딱 넘어가고 말았던 것이다. 그런데 웬? 다음날 아침의 하늘과 땅은 햇볕으로 말짱했다. 베란다 창문을 뚫을 만한 한숨이 나왔다. 금방 마음을 고쳐먹었다. 40일 중 구멍 난 새벽은 낮 시간에 메우기로. 그래도.. 더보기 바보 도둑 주차장 울타리 앞에 감나무 한 그루가 있다. 목사님이 유독 감을 좋아하시는 데다 감꽃이며 감잎 단풍이 좋아 심어놓으셨다. 목사님은 감나무를 기특해하시며 만나는 사람마다 자랑을 하셨다. 오가는 길에는 일부러 주차장에 들러 눈길을 보내곤 하셨다. 해마다 감을 따서 며칠 잘 익혀놓았다가 성도들과 함께 점심 후 감 잔치를 하셨다. 태풍 소식이 왔다. 뉴스에서는 두 주 전부터 태풍의 위력을 계속 보도했다. 이미 태풍이니 홍수니 우리가 호되게 당한 일이 있기에 전국적으로 태풍준비에 만반의 준비를 했다. 특히 이번 태풍은 울산 땅을 휘저어놓을 거라는 소식에 목사님은 감나무 챙기는 일도 잊지 않으셨다. 쇠막대기 지렛대를 세우고 둥치에 묵직한 옷도 입혔다. 태풍이 무사히 지나가게 해달라는 기도 속에 분명 감나무에 대한 .. 더보기 박경리 문학관을 찾다 대하소설 ‘토지’를 쓴 박경리 선생의 발자취를 좇아 경남 하동으로 가는 중이다. 5월의 자연은 어느 곳을 바라봐도 한 폭의 그림이었다. 나뭇잎마다 연한 색이 점점 진하여 지면서 싱그러움을 더했다. 길가에는 노란 얼굴로 활짝 웃는 금계국이 살랑살랑 어깨춤을 추면서 우리를 반겼고 아카시아 나무는 기다란 꽃대에 흰 꽃을 방울방울 달고 향기로 우리를 반겼다. 세 시간 남짓 걸리는 먼 거리를 지루한 느낌을 받지 않고 목적지에 다다랐다. 이곳은 선생의 삶과 문학의 정신을 기리고 기억하고자 2016년에 건립했다. 문학관 뒤로는 지리산의 한 줄기가 뻗어 내린 산자락이 병풍처럼 둘러싸여 있고 앞에는 섬진강과 어우러진 악양의 넓은 들녘이 펼쳐져 있었다. 이는 모두가 대하소설 토지의 주 배경이다. 평화로워 보이는 넓은 풍경.. 더보기 눈맞춤 근무하는 사무실에 화분 돌보기를 좋아하는 두 사람이 있다. K는 꽃꽂이와 카페 공간에 있는 화병들을 관리한다. S는 사무실 정원에 딸린 꽃나무와 화분을 맡고 있다. 이 두 사람이 늘 부지런히 움직이는 연유도 이 때문이다. 생명을 유지시키고 더 풍성하게 관리하려면 마음 내킬 때만 둘러보는 것으로는 어림도 없다. 꽃에 따라 돌보는 손길도 달라야한다. 물을 주고 햇볕을 쬐어주는 것만으로 전부가 아니다. K 손에는 늘 주전자가 들려 있다. 기다란 주둥이에선 물이 출출출 흘러나오고 있다. 어린 머슴애가 밤새 참았던 오줌을 누는 것처럼 시원하다. 주전자를 들고 꽃꽂이 된 꽃들을 빙 둘러본다. 어느 순간 주전자를 놓고 꽃에 코를 쑥 집어넣기도 한다. 그러다가 화분을 햇볕 쪽으로 빙글 돌려놓는다. 꽃잎이 햇볕을 맛보기.. 더보기 임진강을 돌아보다 ‘하나님! 인종, 세대, 언어적 갈등이 해소되고 전쟁의 아픔이 그치게 하소서!’ 구약성경에는 130여 회 전쟁이 기록되어 있다. 지금도 러시아의 침략으로 우크라이나는 1년 넘게 전쟁을 치르고 있다. 우크라이나 국민은 고통과 절규 속에 전쟁이 끝나기를 기도하고 있다. 대한민국도 1950년 한국전쟁을 겪었다. 남과 북으로 나뉜, 세계 유일한 분단국가가 되었다. 이제 살아있는 이산가족 1세대는 찾기 쉽지 않다. 그들이 세상을 떠나므로 통렬한 이산의 아픔도 점차 사그라지고 있다. 통일에 대한 염원이나 강한 의지도 과거처럼 강렬하지 않다. 낡은 이념과 정치적인 이해타산으로 통일을 바라볼 뿐이다. 이산가족의 아픔을 보여주는 장소인 임진강을 돌아보려 길을 떠났다. 서울에서 가다 서기를 반복하더니 파주로 향하는 자유로.. 더보기 신불산 나들이 신불산이다. 구름 한 점 없는 파란 하늘이 억새밭에 낮게 내려앉았다. 쭉 뻗은 손끝에 하늘이 닿을 것만 같다. 울산의 12경답게 억새로 유명해서 텔레비전이나 사진으로는 많이 봐 왔는데 직접 두 눈으로 보게 되니 꿈만 같다. 은빛 솜털처럼 보드라운 꽃을 피워낸 억새는 바람 부는 대로 이리저리 몸을 흔들며 춤을 춘다. 억새꽃을 어루만진다. 목화솜을 만지는 것처럼 부드럽다. 귀를 기울이니 자기들끼리 몸을 부딪쳐 차르르르 차르르 소리를 낸다. 마치 나의 산 나들이를 반겨주는 팡파르 소리 같다. 얼마 전이었다. 가깝게 지내는 친구들과 차를 마셨다. 단풍철이 되어서인지 친구들은 산에 다녀온 얘기로 이야기꽃을 피웠다. 오랫동안 함께 지낸 친구들인데 내 마음도 모르고 자기들끼리 희희낙락거리는 것이 은근히 섭섭했다. 산.. 더보기 왜성에서 ‘왜성’이라는 단어를 처음 들었다. 일본의 침략을 방어하기 위해 세운 성이겠거니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일본인 장수가 세운 성이라 왜성이라고 한다. 울주군 서생면 진하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 서생포 왜성이 있다. 관광해설사가 일본에도 왜성의 흔적이 많지 않아 일본사람들도 다녀가는 곳이라고 한다. 내 고장에 낯선 일본의 흔적이라니 마음이 불편하기도 하지만 한번 둘러보고 싶었다. 왜성은 해발 113 미터 정도의 높이에 위치해 있다. 북서쪽으로는 회야강, 동쪽으로는 진하 바다가 내려다보이고 급격한 경사지 위에 세운 성이다. 강과 바다를 모두 살피고도 간단히 뛰어 올라올 수 없는 곳에 성을 꾸렸던 일본인 장수의 전리가 예사롭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성을 오르는데 주변 정비 사업 진행으로 통행에 불편을 끼쳐.. 더보기 나답게 사는 법 2년째 우쿨렐레 수업을 다니고 있다. 이곳에서 회원 한 사람과 친해졌다. 어느 날 함께 점심을 먹다가 그분이 갑자기 이런 말을 꺼냈다. “그거 알아요? 내가 지금까지 똑같은 색깔의 티셔츠만 입고 온 거.” 생각지 못한 말에 전혀 몰랐다고 답을 했다. “괜찮아요. 다들 몰라요. 제가 2년간 똑같은 옷만 입고 다니면서 알게 된 사실이 있어요. 사람들은 생각보다 남에게 관심이 없다는 거였죠.” 나는 그 말을 듣고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그동안 남의 시선을 의식해 옷차림에 신경 써왔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나 역시 한 달은커녕 일주일 전에 만난 사람들의 옷조차 기억나지 않았다. 내가 그러하듯 남들도 나의 옷차림에 관심이 없을 터였다. 그날 집에 돌아오자마자 옷장에서 몇 번 입지 않은 불편한 정장 같은.. 더보기 옹벽 위의 텃밭 뒷산이 무너져 내리지 못하도록 옹벽이 쳐져있다. 봄부터 여름 내내 옹벽 꼭대기를 한 남자가 왔다갔다 했다. 그가 신은 기다란 장화가 거미 다리처럼 부지런하더니 난간에 그물망을 쳤다. 그러더니 어느 날은 물조리개로 물을 뿌렸다. 그동안 땅을 고르고 씨를 뿌렸던가 보았다. 옹벽 위 텃밭의 열매를 아래에서는 올려다볼 수 없었지만 날마다 높은 텃밭에 사는 그 남자의 얼굴은 점점 밝아 보였다. 여름이 되자 그가 짜놓은 난간의 그물망에 이파리들이 돋아나고 자랐다. 분명 그가 가꾸어 놓은 텃밭을 기운삼아 탯줄이 생긴 모양이었다. 얼마 안가 손가락보다 조금 굵은 오이 하나가 숨은 그림 속 그림처럼 눈에 띄었다. 그러자 보이지 않았던 오이와 가지와 호박들이 줄줄이 입체그림처럼 불을 켜며 내 눈을 비추었다. 나는 한동안 .. 더보기 선한 끝은 있어도 악한 끝은 없다 선한 끝은 있어도 악한 끝은 없다는 옛말이 있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옛 선조들이 말씀하신 속담이나 격언이 그릇된 게 없다는 걸 새삼 느낀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교육을 많이 받았거나 적게 받았거나 사람이 살아가는 방식은 같아서 그런 모양이다. 내가 자라온 마을은 주로 논농사와 밭농사를 지으며 김, 연, 한 씨가 오밀조밀하게 집성촌을 이루면서 살았다. 이장은 마을의 성씨 중 과반수를 차지하는 김씨 문중에서 연속으로 나왔다. 마을에서 이장이라는 직함은 선망의 대상이었고 그 집안은 그걸 큰 자랑으로 삼았다. 그래서 이장 뽑는 날짜가 다가오면 연 씨는 한 씨의 표를 얻기 위해 물질 공세를 할 때가 많았다. 선출된 이장은 누구네 집에 숟가락이 몇 개 있는지 알 정도로 마을 사람들의 살림을 살피며 관심을 가졌다. 아.. 더보기 여름의 냄새들 7월, 붉은 꽃들의 계절이다. 접시꽃 능소화 수국 등등, 꽃만 보면 코를 킁킁대곤 한다. 꽃이 아무리 예쁘고 탐스러워도 향기 없는 꽃은 생명을 잉태치 못한 애송이들만 같다. 냄새가 어디 꽃에서만 나나. 사람에게서도 사물에서도 자연 만물에 냄새가 있는데, 유독 내 눈을 멀게 했던 냄새들이 아직 코끝에 살아있다. 나는 한여름의 도랑을 좋아한다. 어린 시절 도랑에서 훅훅 끼쳐 오르던 냄새가 좋았다. 도랑물 속에는 소낙비 맞은 후에 피어오르는 흙냄새가 있고, 삘기 씹을 때의 연둣빛 풀냄새도 설풋, 무더운 여름 땅속의 잡초뿌리들 냄새도, 그리고 저녁 어스름에 묻어오는 서늘한 저녁 냄새도 난다. 이런 냄새들이 합쳐져서 풍기는 달고 비릿한 도랑물냄새에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지금도 도랑을 만나면 코부터 먼저 달려 나.. 더보기 이전 1 2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