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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문화/신앙에세이

생명을 향한 열정, 산티아고

 

  심리학자들은 인생의 후반기가 되면 육체적 인간에서 정신적 인간으로 변모하여 삶의 에너지를 내적으로 바꾸어야 한다고 말한다. 자신이 지나온 길을 숙고하며 인생을 통찰하는, 보다 품 넓고 넉넉한 사람으로 승화한다는 것이다. 그래서였을까, 나도 오십 대가 막 시작되었을 때 산티아고 순례길로 향했다. 시간적 제약 때문에 일부만 걷고 돌아왔지만, 그 길 위에서 생명을 향한 열정을 만날 수 있었다.

  산티아고 순례길은 프랑스 남부 생장에서 출발해 피레네산맥을 넘어 스페인의 서쪽 끝 도시 산티아고를 향해 가는 장장 800km의 길이다. 그 길에는 삶을 깊이 묵상할 수 있는 느린 시간이 흐르고 있다. 길의 종착점은 산티아고데콤포스텔라(Santiago de Compostela) 즉, 야고보 교회이다. 길 없던 그 길을 처음 걸어간 이는 예수님의 제자 야고보 사도였다. 스페인 땅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 고독한 걸음을 옮긴 것이 순례길의 시작이었다. 도시 이름 ‘산티아고’는 ‘야고보’의 스페인식 이름이다. 스페인에서 복음을 전한 후 예루살렘에서 순교한 야고보 사도가 죽어서도 영원히 묻히길 원했다는 땅이다. 천신만고 끝에 도착한 땅에서 겨우 일곱 명만 복음을 받아들였을 뿐인데, 야고보 사도는 왜 그토록 절절하게 산티아고를 사랑했을까.

  나는 실패에 가까웠던 전도의 순례길 위에서 야고보 사도를 생각했다. 올리브나무가 줄지어 선 황량한 들판을 묵묵히 걸어가는 외로운 전도자가 그려졌다. 고난 중에도 인내하며 끝까지 길을 완주한 건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열정 즉, 타인을 향한 사랑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산티아고는 도시 이름이 아닌 사랑의 실체인 셈이다. 육체적 인간에서 정신적 인간으로 변모하지 않으면 그 누구도 산티아고에 이를 수 없는 건 자명한 사실이다. 

느린 시간이 흐르는 산티아고 순례길

  그즈음 오십 대에 접어든 나는 새로운 정체성 앞에 서 있었다. 쇠하기 시작하는 육체를 인정하고 주목받고 싶은 자아 중심성을 내려놓아야 할 때였다. 타인을 품고 섬기고 세워주는 정신적 인간으로 승화할 때였다. 예수님과 함께 옛 자아가 죽고 예수님과 함께 새로운 자아로 다시 사는 의미가 그 어느 때보다 깊이 다가왔다. 머리로 이해했던 말씀이 가슴으로 전해졌다. 나의 등단작 단편소설 <달맞이꽃>은 그런 정체성의 변화를 그린 작품이다. 내 스펙을 쌓고 나와 내 가정을 가꾸는 수준에서 벗어나 야고보 사도가 걸어간 그 길을 따라가고 싶었다. 생명을 향한 진정한 걸음을 떼고 싶었다.

  어떤 이는 많은 시간을 소비해 가며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는 일에 의문을 표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 길에서 누리는 묵상과 숙고의 시간은 헛되지 않다. 산티아고 순례길이 인생길의 함축이라면 힘겨운 하루하루의 순례는 인생의 참 목적에 닿기 위한 인내의 과정인 것이다. 산티아고에 이르기까지 때로는 돌부리 가득한 험한 길도 고독한 산길도 걸을 테지만 결국은 ‘사랑의 실체’인 산티아고를 만나게 될 것이다. 그 소망이 있는 한 누구도 순례를 포기할 수 없다. 

 우리가 인생에서 간절히 얻으려 하는 건 대부분 사라질 것들이다. 우리가 천국으로 떠난 후에도 이 우주에 영원히 남는 건 생명을 향한 열정 즉, ‘사랑’뿐이다. 땅의 것에 함몰되지 않고 영원한 것을 추구하는 것이 성도의 사명이라면, 산티아고 순례는 사명을 환기하는 귀한 기회가 된다. 부분적인 순례였지만 그 시간을 통해 흩어졌던 꿈을 다시 모을 수 있었다. 아내와 엄마로서, 교사와 작가로서, 무엇보다 성도로서 주변인들이 어려운 현실 때문에 잊어버린 산티아고를 만나도록 돕고 싶었다. 그 꿈이 인간적인 눈으로 평가되는 성공이 아니어도 괜찮았다. 순간순간의 묵묵한 걸음을 하나님이 기쁘게 보신다면 그것으로 충분했다. 여행은 즐거운 욕구 충족의 시간만은 아니다. 때론 깊은 묵상과 숙고의 길로 인도하기에 나는 오늘도 여행을 떠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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