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나가사키현에 있는 히라도를 탐방했다. 400여 년 전 기독교 박해가 끔찍했던 곳이다. 순교자들이 처형당하기 직전에 가족과 이별했던 장소 ‘처자(妻子)이별바위’에 들어선다.
이곳 바위들은 크지도 작지도 않다. 품에 안아보고 싶도록 매끄럽고 윤이 난다. 탐방객들을 맞아주는 표정이 환하다. 입을 씩 벌리고 눈웃음을 머금은 듯한 바위. 그날의 슬픔을 고스란히 품고 있으면서도 기품까지 풍긴다. 순교자들과 가족들이 이별을 앞두고 부둥켜안고 흘린 눈물에 지금까지 바위는 이끼가 끼지 않는다는 말도 있다. 그들은 이렇게 흔적을 남기고 하나님 품으로 돌아갔던가.
유치환의 ‘바위’가 떠오른다.
내 죽으면 한 개 바위가 되리라.
아예 애련(愛憐)에 물들지 않고
희로(喜怒)에 움직이지 않고
비와 바람에 깎이는 대로
억년(億年) 비정(非情)의 함묵(緘默)에
안으로 안으로만 채찍질하여
드디어 생명(生命)도 망각(忘却)하고
흐르는 구름
머언 원뢰(遠雷)
꿈꾸어도 노래하지 않고
쪽으로 깨뜨려져도
소리하지 않는 바위가 되리라.
곧 후쿠루바 처형장으로 끌려갈 그들의 심정이, 인간의 정이 바위에다 새겨졌다면 이 시가 아닐까. 순교로 자신을 하나님께 오롯이 드리지만 어찌 남은 인정(人情)이 없었으리요. 하나님께 자신을 드렸기에 이제 꿈도 꾸지 않고 어떠한 소리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세상에 기어코 뭔가 남길 흔적이 필요했다면 그냥 바위로 돌아갔을 듯.
처자와 이별로 신앙의 극치를 이루는 순간, 순교자들은 면면히 감사와 환희의 꽃을 피웠으리라. 박해의 시련 앞에 순교의 꽃은 더욱 찬란한 법. 영원히 지지 않는 순교의 꽃에서 생명의 향기가 사라지지 않는다. 오랜 시간이 흐른 지금에 와서도 이 향기를 찾아오는 발걸음들이 있으니 그들의 거룩한 죽음의 정신을 이어가고픈 마음이다. 그런데 왜 이리 가슴이 뜨겁고 아플까. 내게는 언제나 부족한 믿음과 용기 때문인가. 손으로 쓰다듬어보는 바위도 뜨거운 숨을 쉬는 것 같다.
탐방 팀들이 돌아가며 기념사진을 찍는다. 바위에 앉기도 하고 곁에 줄지어 서기도 한다. 표정관리가 어렵다. 침묵과 경건과 비통과 참담한 표정을 지어야 할지, 박수와 환호를 담아 웃음을 띠어야 할지 난감한데 한켠에서 사진 찍을 준비를 하는 팀이 “밀양, 밀양!”이라며 자기 팀원들을 찾는 소리가 들린다.
밀양이라니, 내가 밀양 출신인데. 밀양에서도 탐방팀이 왔구나 싶다.
“저도 밀양인데요.”
이별바위 앞에서 이루어진 뜻밖의 만남이다. 반가운 마음에 인사하니 그쪽에서도 반가워한다. 얼떨결 그들 끄트머리에 서서 사진을 찍고 나니 그들과도 순식간 가족이 된 것 같다.
밀양에서 살고 계시는 부모형제가 떠오른다. 기도할 때마다 놓치지 않고 하는 기도가 식구들의 구원이다. 복음의 불모지 가문에서 나를 먼저 건져 살리진 하나님이 내 기도에 응답하시는 순간인가. 누군가가 “기도는 저축”이라더니 평소 저축해놓은 기도를 꺼내어 쓰는 것 같다. 기도 때마다 ‘친정에 복음의 발길을 보내 달라’고 했던 바로 그 기도. 이곳에서 만난 내 고향 사람들이 어쩌면 그 발길들이 아닐까.
“우리 친정에 찾아가 복음 좀 전해줄 수 있습니까?”
“친정 주소가 어떻게 됩니까?”
처자이별바위는 이별의 장소가 아닌 만남의 장소, 축복의 장소가 된다.
이렇게 한 개인의 작은 신음에도, 그 어떤 기도에도 하나님께서 응답해주시거늘 하물며 순교자들의 피가 흐르는 이 곳이야말로 어찌 그날의 사건만으로 끝날 수 있단 말인가. 몇 백 년 전에 쏟아졌던 그 피는 지금도 이 땅과 하늘을 적시고 있다. 그 피의 부르짖음을 듣고 계시는 하나님께서 이제 곧 손을 내미시리라. 복음화률이 고작 0.1%, 복음의 불이 거의 꺼지기 직전이라지만 반드시 다시 불을 지피실 하나님이시다. 순교의 피를 기억하시고 나가사키를 넘어 일본 열도에 죽어가는 영혼들을 살리시리라 믿는다.
이별이 만남을 낳고 죽음이 생명을 낳는다. 이별바위 아닌 만남바위로 거듭나게 하시는 그분의 반전과 역전을 바라본다.
수필가 설성제(북울산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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