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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문화/신앙에세이

나만의 화풍으로, 메트로폴리탄의 ‘엘 그레코’

   작가 모임에 다녀올 때면 안일하게 살고 있다는 자성이 들곤 한다. 세상을 차단한 채 몇 달간 문학 레지던스에 들어가 창작에만 몰두하는 작가들도 많고, 하루 중 대부분의 시간을 글에 할애하는 작가들도 허다하기 때문이다. 시간의 양과 글의 수준이 꼭 정비례하지는 않겠지만, 창작에 있어 몰입도 만큼 영향력 있는 요인도 없다. 나도 평일 아침 아홉 시부터 오후 한두 시까지 집 근처 조용한 카페에서 글 쓰는 루틴을 지키려 노력 중이지만, 생활인으로서 다양한 영역의 변수를 만나곤 한다. 특별한 상황 때문에 다른 영역에 주력해야 할 때도 빈번하다. 

  복병은 또 있다. 무한경쟁의 글 세계에서 삼사십 대 젊은 작가들의 벼린 감각은 좀체 따라잡기 어렵다. 좋아하는 글을 쓸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 늘 감사하지만, 더 나은 글을 쓰기 위한 시간은 혹독하다. 모든 분야의 결과물이 그러하듯 좋은 글도 각고의 과정을 통해 나온다. 순수한 동기를 잃지 않으면 과정에 어려움이 있어도 근본적인 힘을 유지하지만, 결과에 몰두하면 비교 불안을 느끼기 마련이다.

  그럴 때마다 떠오르는 인물이 있는데, 화가 ‘엘 그레코(1541-1614)’가 그 주인공이다. 나다운 문체로 나만의 진실한 글을 쓸 수 있다는 확신을 보여주는 화가이다. 작년 가을, 뉴욕 여행 중에 그의 그림을 감상하려고 하루를 온전히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머물렀었다. ‘엘 그레코’는 미술사에서 16세기 초 매너리즘 사조를 대표하는 화가로, 독특한 스타일과 표현력을 구현한 인물이다. 크레타섬에서 태어나 비잔틴 성화를 배웠고, 당대 최고의 미술 도시인 베네치아와 로마로 건너가 티치아노와 틴토레토, 미켈란젤로 등의 천재 스승들에게서 그림을 사사했다. 그가 주도했던 매너리즘 사조는 문화 예술의 정점으로 불리는 르네상스 직후에 일어난 화풍이다.

“Christ carrying the Cross”(1580)  “We, however, will not boast beyond proper limits, but will confine our boasting to the field God has assigned to us, a field that reaches even to you.(2 Corinthians 10:12 _NIV)

  잘 알려진 대로 르네상스 화풍은 균형, 비례, 원근법 등의 기법을 통해 가장 사실적이고 조화로운 작품을 창조해 냈다. 이상적인 구도와 색감을 빚어낸 작품이 넘쳐났고, 말 그대로 ‘더 이상 발전할 요소가 없는’, ‘완벽한 완성도에 도달한’ 탁월한 미술가들로 가득한 시대였다. 르네상스 후반기에 창작 활동을 시작한 엘 그레코에게는 빛나는 재능을 지닌, 넘쳐나는 선배들이 넘사벽의 존재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마음에 내재한 동기를 잃지 않고 르네상스의 고전적 규범을 벗어나 새로운 형태의 창작을 시도했다. 대상을 과감하게 변형하거나 왜곡하여 새로운 미적 효과를 창출했으며, 개성적인 기법으로 르네상스의 한계를 넘어서려고 노력했다. 그만의 화풍으로, 그만의 진실한 그림을 그린 것이다. 특별히, 거친 터치에 색과 빛을 강하게 표현한 종교화에서 그의 개성이 잘 묻어난다. 십자가와 관련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을 많이 그렸는데, 그 표정과 암울한 배경을 통해 상상 이상의 고통이 생생하게 전해진다.

  작년 가을,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도착하자마자 엘 그레코의 그림 앞으로 달려갔다. 그의 신앙과 사명이 깃든, 그만의 화풍으로 그린 그만의 진실한 그림을 보고 싶었다. 작품 <십자가를 지신 예수 그리스도>(1580)는 멀리서도 확연히 눈에 띄었다. 파격적인 구도와 색채가 십자가의 고통을 고스란히 전해주었다. 신의 아들로서의 위대한 책임감과 인간으로서의 처절한 고통이 하늘을 우러러보는 그리스도의 눈동자에 고스란히 함축되어 있었다. 복음서가 그 눈동자에 모두 깃들어 있는 듯했다. 그 눈동자 앞에서 오래 서 있었다. 그 깊은 눈동자를 그려내기까지 엘 그레코가 경험했을 묵상과 각고의 시간, 그려놓고 덧칠하고 다시 그리면서 고뇌로 지새웠을 밤들이 보이는 듯했다. 그가 묵상하고 빚어낸 그리스도의 눈동자는 르네상스 화풍으로 그려진 절대미의 눈동자보다 훨씬 깊어 보였다. 

  그의 작품 감상만으로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을 예약하고 줄을 서서 기다린 보람을 느꼈다. 움츠러들었던 마음에 용기도 얻었다. 엘 그레코는 르네상스 회화에 억눌리지 않고 그만의 화풍으로 그만의 길을 걸어갔고, 먼 훗날 발흥한 20세기 표현주의의 근간이 되었다. 그의 작품을 품고 있어 메트로폴리탄이 아름다워 보였고 뉴욕도 의미 있는 도시로 느껴졌다. 예수 그리스도의 그 눈동자를 마음에 담아온 건 특별한 은혜였다.

  얼마 전 대학 SFC 동문 모임이 있었는데, 글 이야기를 나누는 중에 한 선배가 “은신이만의 문체로, 은신이만의 진실한 글을 쓰길 늘 기도한단다.”라고 격려해 줘서 큰 위로가 되었다. 나만의 문체로 나만의 진실한 글을 쓴다는 건 상대적 비교가 아닌 개별적 사명을 의미하는 것이며, 좋은 글 창작의 가능성을 품게 한다. 좋은 글은 주어진 재능 안에서 사명감과 성실한 태도, 그리고 은혜로 빚어지는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연약한 인간은 무한경쟁 속에 놓이다 보면 비교 우위에 빠지기도 하고, 넘사벽의 재능을 가진 천재들 앞에서 위축되기도 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을 각자 부르셨고, 각자의 사명을 주셨으며, 각자의 재능 안에서 최선의 열매를 거두게 하셨다. 주인에게서 두 달란트, 다섯 달란트를 받은 종들처럼 최고가 되기보다 받은 달란트에 책임감을 가지고 자신의 사명에 집중하기를 요청하신다. 결과보다는 동기와 과정을 중요하게 보시는 하나님의 따스한 눈길이 있어, 오늘도 자유를 누리며 기쁨과 감사로 글쓰기에 임할 수 있다. 그 눈길은 놀라운 은혜이다. 그래서일까. 오늘도 글을 쓰려고 카페에 앉은 이 시간, 향기로운 커피 한 잔이 참 행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