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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문화/신앙에세이

성숙한 기억법, 뉴욕

   

  인간은 아픔을 겪으면 고통을 최소화하기 위해 다양한 심리적 방어기제를 사용한다. 기억을 억지로 억압하거나, 왜곡하면서 회피하거나, 원인을 외부로 투사해 분노를 표출한다. 심한 경우 신체화나 전이, 해리를 경험하기도 한다. 문제는 어떤 방어기제든 자신과 타인을 객관적인 시선으로 보지 못하게 만든다는 점이다. 방어기제가 내면에서 작동하면 우울함이, 외부로 작동하면 분노가 된다. 가장 고상한 방어기제 중 하나인 ‘승화’조차도 고통을 잊으려 가치 있는 일로 시선을 돌리는 것에 불과하다. 그만큼 고통을 직시하면서 삶의 일부로 인정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고, 고통을 통한 의미 천착은 더더욱 어렵다. 의지 밖의 고통은 함부로 해석할 수도 없다. 그런데, 개인의 고통을 공동체가 함께 끌어안고 묵묵히 직시하며 기억하는 공간을 뉴욕 여행 중에 만났다. 

  뉴욕은 연 육천만 명의 관광객이 찾는, 세계에서 가장 트렌디한 도시이다. 세계 경제를 움직이는 금융의 허브이면서 문화 예술의 성지로 불린다. 특별히 맨해튼 섬은 센트럴 파크와 세계적인 미술관들, 뮤지컬이 공연되는 브로드웨이, 유엔 본부와 월스트리트 등의 명소를 품고 있다. 스트리트와 애비뉴 사이로 빽빽하게 들어찬 마천루들이 세계 중심도시임을 천명하는 듯하다. 세계 곳곳에서 꿈을 안고 부나비처럼 날아든 다양한 인종의 노동자들과 예술가들, 유학생들이 그 안에 깃들어 오늘을 살아가고 있었다. 관광객들은 센트럴 파크에서 버스킹을 즐기거나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서 명화를 감상하거나 배를 타고 도시의 랜드마크인 자유의 여신상을 조망하며 도시를 누린다. 하지만 내게 가장 의미 있게 다가온 건 ‘911 메모리얼 박물관’과 추모조형물 ‘그라운드 제로’였다.

  911사태는 잘 알려진 대로 2001년 이슬람 과격 단체인 알카에다가 일으킨 테러였다. 무방비 상태로 세계무역센터 쌍둥이 건물이 공격을 받으면서 수많은 희생자가 생겼고 세계는 충격에 빠졌다. 시민들은 아침에 출근한 남편과 자녀를 잃었고 꿈을 좇아 열심히 살아가던 친구와 동료를 잃었다. 수용하기 힘든 현실 앞에서 망연자실했고 해석되지 않는 상황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하게 되면 보통 인간은 네 단계의 심리과정을 거치게 된다. 처음엔 상황을 ‘부정’하면서 슬픔을 느끼지 않으려 하다가 돌이킬 수 없는 현실에 점점 ‘분노’를 표출하게 된다. 이어 ‘우울과 절망’이라는 지독하게 어두운 터널을 지나 ‘수용’의 단계에 이른다.

  ‘911 메모리얼 박물관’과 ‘그라운드 제로’에는 어떤 방어기제도 없는 ‘기억’만 오롯이 존재했다. 기억 위로는, 폭풍의 시간을 지나 따뜻한 ‘수용’에 이른 평안함이 감돌고 있었다. 박물관 안에는 테러 당시 생존자들이 탈출했다는 계단이나 출동 소방차의 잔해가 남아 있어 참혹했던 상황이 잘 느껴졌다. 생사의 갈림길, 촌각을 다투는 상황에서도 서로를 배려하며 차례를 지켜 계단을 내려왔다는 일화나 죽을 걸 뻔히 알면서도 한 사람이라도 더 구해내기 위해 무너져가는 건물을 향해 걸어 들어간 소방관들의 기록을 보며 예수 그리스도의 향기를 맡았다. 시민들의 성숙한 배려가 복음에 기반한 가치관에서 우러나온 듯해 굉장히 부러웠다. 개인의 삶을 중요시하는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도 체화된 그들의 이타성은 보석처럼 빛나고 있었다. 아픔을 겪은 사람들을 향해 요란한 위로를 건네거나 성급한 훈계로 회복을 종용하지 않고 묵묵히 기다려주는 모습이 잔잔한 감동을 전해주었다. 무수한 말 대신 조용한 기억이 얼마나 지혜로운지 깨닫는 시간이었다.

  박물관 옆 인공폭포 ‘그라운드 제로’ 조형물은 쌍둥이 빌딩이 있던 공간에 조성되어 있었다. 지표에서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폭포 안쪽에는 눈물을 상징하는 물이 쉼 없이 떨어지고, 가장자리에는 희생자 2,996명의 이름이 하나하나 새겨져 있었다. 

눈물을 상징하는 물이 쉼 없이 떨어지고, 가장자리에는 희생자 2,996명의 이름이 하나하나 새겨져 있었다.(사진=위키백과)

 

  폭포 주변을 천천히 돌면서 어떤 이름은 나직이 불러보고 어떤 이름은 손바닥으로 만져보면서 한 사람 한 사람의 인생 무게를 반추했다. 어떤 삶의 궤적을 가졌든 모두 누군가에게는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존재였다는 생각에 먹먹해진 마음이 쉬 가라앉지 않았다. 존재는 어떤 모습으로든 누군가의 뇌리에 기억된다. 존재를 가감 없이 있는 그대로 기억하려는 시민들의 성숙한 기억법과 담담한 응시가 아름다워 보였다. 

  ‘그라운드 제로’라는 용어는 표면적으로는 ‘폭발이 있었던 지표의 지점’을 뜻하지만, ‘시작 지점’이라는 내면적 의미도 포함하고 있다고 한다. 뉴욕 시민들에게 911의 기억은 고통이겠지만, 회피나 억압이나 분노가 아닌 담담한 추모를 보여주는 모습에서 한 공동체의 새로운 시작을 보았다. 폭발지점에 서서, 그 땅의 고통 속에 응축된 소망이 언젠가 활짝 피어나길 기도했다. 허다한 문화·예술 명소보다 그라운드 제로 지점이 뉴욕의 심장으로 느껴진 건 개인적 감상만은 아닐 것이다. 모든 예술은 인간의 고통을 주목하고 표현하기에 더욱 그랬다. 하나님 앞에 겸손히 서게 하는 것도 새로운 소망을 품는 것도 고통 위에서 시작되지 않던가.

  어떻게 보면 여행은 인간의 죄가 만든 ‘제로 그라운드’를 반복적으로 목격하는 일이다. 인류의 역사가 보여주듯 세계 곳곳 발걸음 닿는 곳마다 전쟁과 파괴의 흔적들로 가득하다. 그러나 절망의 자리에서 다시 시작하려는 소망을 발견하는 것 또한 여행의 기쁨이다. ‘폭발이 있었던 지표 지점’으로 가서 ‘시작 지점’을 마음에 담아 올 수 있다면 그보다 값진 일은 없을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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