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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문화/신앙에세이

눈맞춤

  근무하는 사무실에 화분 돌보기를 좋아하는 두 사람이 있다. K는 꽃꽂이와 카페 공간에 있는 화병들을 관리한다. S는 사무실 정원에 딸린 꽃나무와 화분을 맡고 있다. 이 두 사람이 늘 부지런히 움직이는 연유도 이 때문이다. 생명을 유지시키고 더 풍성하게 관리하려면 마음 내킬 때만 둘러보는 것으로는 어림도 없다. 꽃에 따라 돌보는 손길도 달라야한다. 물을 주고 햇볕을 쬐어주는 것만으로 전부가 아니다. 

  K 손에는 늘 주전자가 들려 있다. 기다란 주둥이에선 물이 출출출 흘러나오고 있다. 어린 머슴애가 밤새 참았던 오줌을 누는 것처럼 시원하다. 주전자를 들고 꽃꽂이 된 꽃들을 빙 둘러본다. 어느 순간 주전자를 놓고 꽃에 코를 쑥 집어넣기도 한다. 그러다가 화분을 햇볕 쪽으로 빙글 돌려놓는다. 꽃잎이 햇볕을 맛보기도 전에 다시 원위치 시키기를 반복한다. 매일 오전 열 시면 시작되는 K의 화분 돌보기에 나도 슬그머니 끼어든다. 주전자를 들고 K 흉내를 내본다.

  S는 여름에 접어들면서 정원에 산다. 챙 넓은 밀짚모자에 꽃무늬 장화를 신고 기다란 호스로 나무들에게 농을 건다. 나무들은 물세례를 받고 자지러진다. 그 앙증스런 이파리들을 바르르 떨어대며 깔깔댄다. 협죽도는 허리를 출렁거리고 물을 흠뻑 머금은 분홍 앵초가 앙증스런 걸음을 뗄 것 같다. 그렇다고 자꾸만 물을 주는 것은 아니다. S의 눈은 꽃나무들의 뿌리까지 내려다보는 것 같다. 뿌리 끝 흙의 기운까지 알고 있을 지도. 

  겨울이 되자 정원의 화분들이 구내식당 한 구석에 자리를 잡았다. 식당은 이내 식물원이 되었다. 온갖 종류의 나무들과 여름에나 볼만한 풀꽃들도 밥 짓는 냄새를 맡으며 한 식구가 되었다. 가지들은 튼실하고 이파리들은 살이 쪄서 통통하다. 아침부터 왁자한 음악이 식당 쪽에서 들려온다. S가 출근했다는 신호다. 나도 모르게 식당으로 올라간다. 아니나 다를까 S가 블루투스를 켜놓고 꽃나무들을 둘러보고 있다. 물을 주는 것도 아니다. 화분의 위치가 바뀌는 것도 아니다. 그냥 별 할 일도 없는데 S는 그냥 화분 앞에 서서 멀뚱히 쳐다보고만 있다. S정도면 나무들과 대화가 충분히 가능할 것이다. S의 음악을 들으며 두 손 들고 반응하는 식물들을 상상한다. 입을 크게 벌리고 눈웃음을 치며 환호하는 꽃나무들. 

  “비결이 뭐에요?”
  “눈맞춤이죠.”

  눈을 맞춘다고? 대화를 넘어 눈빛을 주고받는다고? K가 물주전자를 들고 다니는 것도, S가 그냥 바라만 보는 것도 다 눈맞춤이었던가. 많은 신체 중 눈을 맞추는 일, 그것이 생명을 살리는 일. 눈을 바라볼 때 생명이 숨을 쉬고 자라고 반응하는 것이다. 

  눈을 맞추는 순간 사랑이 시작된다. 눈맞춤은 사랑의 필수다. 사랑하는데도 눈을 맞추지 않으면 사랑이 아니지. 눈맞춤으로 성장하고 성숙한다. 따뜻해진다. 불평불만은 해소되고 죽어가던 것도 생기를 찾는다. 눈 맞추는 것은 의지이다. 노력이 필요하다. 

  K와 S가 보살피는 꽃과 나무들에 모든 이들이 다 눈을 맞추는 것은 아니다. 모두의 사랑이 아니더라도 단 한 사람과의 관계로도 충분히 생명이 생명다워질 수 있다는 것을 본다. 누군가 한 사람만의 관심과 사랑으로도 생명은 생명으로 존재할 수 있겠다. 

  그러고 보니 오래전 대학에서의 일이 생각난다. 한 교양 수업에서 한 학기 내내 강사의 눈밖에 있었던 게 떠오른다. 참 열심히 듣던 수업이었는데 은근히 서운했다. 코가 삐뚤어진 것도 아니고 눈이 귀에 붙은 것도 아닌데 줄곧 외면을 당하다 급기야 나도 강사를 쳐다보지 않았다. 줄곧 창밖만 보다 종업식을 맞았다. 이후 식사자리에서 농담처럼 물어보았다. 

  “선생님은 한 번도 저 안 쳐다보대요. 제가 그렇게 못생겼어요?” 
  “아, 그게 아니고, 제가 눈맞춤에 서툴러요. 서운했나보네요.”

  변명 아닌 변명을 들었지만 개운하지 않았다. 눈맞춤이 없었기 때문인지 점수도 바닥을 쳤다. 가끔 제대로 눈맞춤이 있었다면 여태까지 그 강사를 이렇게 기억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눈맞춤은 우리가 살아가는 인간세상, 인간관계에서 어디든 필요한 자세다. 부모자식 간, 사제지간, 친구 간, 연인 간, 하물며 인간과 식물 간에도 눈맞춤 없는 관계는 무의미하다. 극적으로 죽음으로 이르는 관계가 될 수도 있겠다. 더 깊은 사랑으로까지 눈맞춤 하지 않는다손 치더라도 멈출 수는 없다. 우리에게 주어진 은근한 눈맞춤 한 번이 서로를 살게 하는 것이다. 

  누가 보든 보지 않든 나부터 눈맞춤을 해야겠다. 그게 누군가를 살리는 일이라면. 사람이든 돌멩이든 꽃이든 바람이든.

설성제 수필가
북울산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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