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성’이라는 단어를 처음 들었다. 일본의 침략을 방어하기 위해 세운 성이겠거니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일본인 장수가 세운 성이라 왜성이라고 한다. 울주군 서생면 진하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 서생포 왜성이 있다. 관광해설사가 일본에도 왜성의 흔적이 많지 않아 일본사람들도 다녀가는 곳이라고 한다. 내 고장에 낯선 일본의 흔적이라니 마음이 불편하기도 하지만 한번 둘러보고 싶었다.
왜성은 해발 113 미터 정도의 높이에 위치해 있다. 북서쪽으로는 회야강, 동쪽으로는 진하 바다가 내려다보이고 급격한 경사지 위에 세운 성이다. 강과 바다를 모두 살피고도 간단히 뛰어 올라올 수 없는 곳에 성을 꾸렸던 일본인 장수의 전리가 예사롭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성을 오르는데 주변 정비 사업 진행으로 통행에 불편을 끼쳐 죄송하다는 안내판이 보인다. 무참히 잘려나간 나무들의 사체가 언덕에 즐비하다. 쑥쑥 자라면 더 찬란한 숲을 이루고도 남을 터인데 측은하다. 병든 것도 아닌데 단지 정비한다는 목적으로 이들을 무참히 도륙한 것이 씁쓸하다. 수백 년 전 일본인들이 우리에게 행한 만행처럼 무섭다.
왜성 입구를 지나 꼬불꼬불하게 이어진 성벽을 따라 들어간다. 야산의 가파른 경사를 따라 층층이 성을 복잡하게 쌓아둔 그는 굉장히 치밀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왜성의 정상인 천수대 한쪽 성벽에 계단이 보인다. 스무 개 남짓한 계단을 오르내리며 최전방 철책에서 근무하던 시절이 생각난다. 매일 수백 개의 계단을 오르내리며 땀을 쏟았다. 내 가족과 사랑하는 이들을 지킨다는 자부심으로 살았다. 적과 대치하고 있는 최전방 철책이었지만 평화로운 편이었다. 고배율 쌍안경으로 살펴도 실제 북한군을 육안으로 식별하기 어려웠다. 적을 눈앞에서 본 적이 없었다.
여기 천수대에 성벽을 쌓으면서 또 쳐들어오는 적과 싸웠을 선조들을 생각해 본다. 총도 없던 시절에 활과 창칼을 들고 근접 전투를 감내해야 했을 것이다. 오직 피와 땀으로 조국의 운명을 사명으로 여기고 감내했을 군사들의 삶이 아득하다. 평화롭게 철책을 거닐던 것마저 부끄럽다. 천수대 정상에서 수많은 군사들이 뿌린 선홍빛 피가 푸른 이끼로 찬란하게 피어난 것만 같다.
성벽 모양은 제각각이지만 하나 같이 깎아 만든 돌이다. 제 모양 그대로 쓰인 돌이 없다. 본 모양을 모두 잃어버리고 일본인 장수가 원하는 모양으로 다듬어진 채 성벽이 되고 수 백 년을 살았다. 일본의 식민지배를 받던 우리 민족을 보는 것만 같다.
성벽의 다듬어진 돌을 보며 딸 생각이 났다. 나는 남에게 폐가 되는 것이라면 사소한 것이라도 그냥 볼 수 없는 아빠다. 아내는 교사라 조금이라도 흐트러진 것을 그냥 보지 않는다. 딸은 당최 정리라는 것을 모른다. 엄마 아빠 모두 말을 아끼고 조심하는 편인데 딸은 침묵을 견딜 수 없다. 단 일 분도 잠잠히 있을 줄 모른다. 그런 딸을 십일 년간 다듬으며 살아온 것 같다. 그렇게 딸의 얼굴이 아픈 표정으로 굳어져 가는 줄도 모른 채 나와 아내의 바람대로 깎아보려 했던 것 같다. 그렇게 서로 마손된 채로 지쳐 가고 있는 일상이 보인다.
우울한 생각 탓에 무심히 산을 내려온다. 깎이고 깨지고 다듬어져 상처 난 투박한 얼굴로 성을 지키고 있는 성벽의 돌이 다시 보인다. 그 틈을 타고 넝쿨이 자라고 있다. 아픈 표정으로 굳어버린 성벽의 돌 주위엔 친구들이 자란다. 이끼가 자라고 나무가 무성하다. 무성한 나무는 성벽을 감싸고 있다. 저들이 이 아픈 돌에게 모진 세월을 이겨낼 위안이 되었나 보다.
나무 그늘로 인해 땅 위의 명암이 선명하다. 태양 빛을 그대로 맞은 양지와 커다란 나무의 무성한 잎으로 그려진 그림자의 그늘이 분명히 다르다. 곁에 있던 나무가 돌에게 비와 볕을 피할 휴식을 주었다. 장마에 수마가 할퀴지 못하도록 성벽 주변의 흙을 버틴 것도 나무였다. 성벽 위에는 이끼와 잡풀이 적절히 물기를 나누어주었다. 그저 딱딱한 돌이어서 살아남은 것이 아니라 함께 한 수풀이 그를 살게 했다.
조금은 가벼워진 걸음으로 산을 내려온다. 처참해 보였던 벌목 현장에는 까마귀가 서성인다. 비참한 그들 곁에도 곡조를 들려줄 친구가 있어 다행이다. 산 중턱에는 어느 노부부가 밭을 가꾸고 바쁘게 경작 중이다. 모두가 어울려 살아가는 우리의 일상을 보는 것 같아 흐뭇하다.
왜성에서 얻은 게 많다. 평화롭게 사는 일상이 그저 감사하다. 내 조국이 자랑스럽고 이 시대를 사는 것이 행복하다. 함께 하는 모든 것이 감사하다. 가두고 깎을 것이 아니라 곁을 지키고 돌보며 응원하는 나무처럼 살고 싶다.
안상후 장로
청도송금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