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불산이다. 구름 한 점 없는 파란 하늘이 억새밭에 낮게 내려앉았다. 쭉 뻗은 손끝에 하늘이 닿을 것만 같다. 울산의 12경답게 억새로 유명해서 텔레비전이나 사진으로는 많이 봐 왔는데 직접 두 눈으로 보게 되니 꿈만 같다.
은빛 솜털처럼 보드라운 꽃을 피워낸 억새는 바람 부는 대로 이리저리 몸을 흔들며 춤을 춘다. 억새꽃을 어루만진다. 목화솜을 만지는 것처럼 부드럽다. 귀를 기울이니 자기들끼리 몸을 부딪쳐 차르르르 차르르 소리를 낸다. 마치 나의 산 나들이를 반겨주는 팡파르 소리 같다.
얼마 전이었다. 가깝게 지내는 친구들과 차를 마셨다. 단풍철이 되어서인지 친구들은 산에 다녀온 얘기로 이야기꽃을 피웠다. 오랫동안 함께 지낸 친구들인데 내 마음도 모르고 자기들끼리 희희낙락거리는 것이 은근히 섭섭했다. 산 얘기가 듣기 싫어서 마음에 없는 화장실을 다녀왔는데도 그칠 줄을 몰랐다.
그때 이야기에 열을 올리고 있던 모임의 막내가 내 기분을 살피는가 싶더니 남은 커피를 한꺼번에 몰아 마셨다. 그리고는 각자의 소원을 말해보는 시간을 가져보자고 했다. 나는 그가 화제를 바꾸어 준 것이 고마워서 얼른 손을 들어 가을철만 되면 억새로 유명한 ‘신불산’에 가보고 싶다는 말을 해버렸다.
그런 일이 있고 며칠 후에 막내로부터 전화가 왔다. 군수가 참석하는 간담회가 있다는 소식을 듣고 부랴부랴 찾아갔다고 했다. 행사가 이어지는 내내 설득력 있는 말을 준비하느라고 다른 것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단다. 본 행사가 끝나고 사회자가 질문이 있느냐는 말에 장애인 한 분이 신불산 가보는 것이 소원이라는데 차로 간월재까지 소방도로 진입을 허락해 달라고 부탁했단다.
뜻하지 않은 기쁜 소식에 가슴이 뭉클했다. 흘려듣지 않고 그렇게까지 마음을 써준 친구가 고마웠다. 산은 어린 시절부터 얼마나 가보고 싶었던 곳인지 모른다. 학창 시절에 소풍 가면 언제나 저수지 아니면 야산이었다. 중고등학교 시절은 마음이 성장하여 그나마 괜찮았는데 초등학생 때는 원색 옷차림에 모자를 쓰고 도시락 가방을 울러 메고 줄을 지어 소풍 가는 친구들이 한없이 부러웠다.
두 다리가 약했던 나에게 등산이란 감히 이룰 수 없는 꿈이었다. 바다 없이, 온통 산으로 둘러싸인 두메산골에 살았지만 멀리서 눈으로만 산을 바라보았을 뿐 산 능선에 올라 숲을 체험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아카시아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앞 뒷산을 하얗게 물들이면 친구들은 달곰한 꽃을 따먹기 위해 삼삼오오 짝을 지어 산으로 달려갔지만 나는 코끝까지 전해지는 아카시아 향을 킁킁대며 향기로만 맡을 수밖에 없었다.
친구들은 봄부터 가을까지 소를 먹이기 위해 꼴을 베어 오기도 하고 들로 산으로 쫓아다니며 소몰이를 하였다. 농번기에 어른들은 논밭에서 일했고 학교를 파하고 돌아온 친구들은 으레 소 뜯기러 가는 것이 일상이었다. 산골짜기에 소를 풀어놓고 이곳저곳 찾아다니며 철에 따라 앵두, 찔레, 오디, 개복숭아, 대추, 감 등의 열매를 따 먹었다. 해가 설핏하면 소도 사람도 배가 불룩하여 돌아오곤 했다. 배를 곯던 시절이라 그런 모습이 얼마나 부러웠는지 모른다.
오색으로 치장한 나무들이 바람을 타고 나풀나풀 인사한다. 두근거리는 마음을 달랠 수가 없다. 친구들도 나와 같은 마음인지 감탄사를 연발한다. 붉게 물든 산은 마치 커다란 손을 가진 누군가가 갖가지 물감을 온 산에 흩뿌려 그림을 그려놓은 것 같다. 어느 곳은 불이 붙은 듯 새빨갛고 어느 곳은 미다스의 손길이 닿은 듯 샛노랗다.
넋을 잃은 사람처럼 멍하니 사방을 둘러본다. 나무가 내뿜어주는 맑은 공기를 폐부 깊숙이 들이쉬고, 속에 좋지 않은 공기를 내뱉으며 깊은 심호흡을 해본다. 머리가 맑아지고 마음이 평온해진다. 사람들이 왜 산에 다니는지 알 것 같다. 상쾌한 공기를 마시니 기분이 맑아지고, 어여쁜 자연물과 대화하니 눈과 귀가 호사스럽다. 신불산 억새들은 상상했던 것만큼 거대한 면적은 아니었지만 하얀 솜을 깔아놓은 듯 포근한 느낌을 준다. 단 몇 분이라도 드러눕고 싶은 충동이 인다.
지금까지 많은 사람의 도움을 받으며 살아왔다. 오늘도 친구들이 도와주지 않았으면 여기까지 온다는 것은 감히 꿈도 꾸지 못했을 것이다. 산에는 억새만 있는 것이 아니라 키 작은 소나무도 떡갈나무도 다양한 식물들이 어우러져 살고 있다. 칡넝쿨에 몸을 내어주고, 서로 다른 듯 서로 비슷하게 살아가는 나무와 풀들이 가을 산을 더 풍요로운 빛깔로 채워 아름답게 한다. 어우렁더우렁 살아가는 모습을 보니 사람이든 식물이든 혼자서는 살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김용숙 집사(울산갈릴리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