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문화/신앙에세이 썸네일형 리스트형 여름의 냄새들 7월, 붉은 꽃들의 계절이다. 접시꽃 능소화 수국 등등, 꽃만 보면 코를 킁킁대곤 한다. 꽃이 아무리 예쁘고 탐스러워도 향기 없는 꽃은 생명을 잉태치 못한 애송이들만 같다. 냄새가 어디 꽃에서만 나나. 사람에게서도 사물에서도 자연 만물에 냄새가 있는데, 유독 내 눈을 멀게 했던 냄새들이 아직 코끝에 살아있다. 나는 한여름의 도랑을 좋아한다. 어린 시절 도랑에서 훅훅 끼쳐 오르던 냄새가 좋았다. 도랑물 속에는 소낙비 맞은 후에 피어오르는 흙냄새가 있고, 삘기 씹을 때의 연둣빛 풀냄새도 설풋, 무더운 여름 땅속의 잡초뿌리들 냄새도, 그리고 저녁 어스름에 묻어오는 서늘한 저녁 냄새도 난다. 이런 냄새들이 합쳐져서 풍기는 달고 비릿한 도랑물냄새에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지금도 도랑을 만나면 코부터 먼저 달려 나.. 더보기 캠핑카 여행 어느 단체에서 코로나19로 집에서 지내는 장애인들에게 캠핑카를 대여해주고 1박 2일 여행경비를 지원하겠다는 공지가 있었다. 지원 신청서를 검토해 보고 심사하여 대상자를 선정한다고 했다. 곧 생일이 다가오는데 생일날 여행을 통하여 멋진 추억을 만들고 싶다는 장문의 신청서를 보냈다. 다행히 대상자로 선정되어서 남편과 함께 여행을 떠나게 되었다. 코로나로 집에서만 지내는 반복된 생활에서 벗어나 캠핑카를 타고 떠나는 여행은 답답한 가슴을 시원하게 뚫어주었다. TV에서만 보아오던 캠핑카는 카니발 차 실내에 두 사람이 생활하는 데 불편함이 없도록 숙식 공간이 잘 꾸며져 있었다. 찌개 한 가지만 끓여서 먹어도 동심으로 돌아가 소꿉놀이하는 것처럼 재미가 쏠쏠할 것 같은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여건상 우리는 식사는 식당.. 더보기 철책선 사계절 군 복무 중에 최전방 휴전선을 지키는 경계 작전에 일 년 간 투입되었다. 산세가 험하기로 유명한 강원도 어느 철책에서 수많은 계단을 오르내리며 사계절을 보냈다. 야간 경계 근무를 마치고 소초 막사로 돌아오던 어느 아침, 저 멀리 안개가 자욱한 풍경을 보면서 여기를 떠나면 무척 그리워질 것만 같았다. 그 풍경을 담아두고 싶었지만, 디지털카메라가 막 공급되기 시작하던 시기라 감히 엄두를 못 내었다. 설령 카메라를 장만하더라도 보안 문제로 실제 찍을 수도 없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 시절, 그 풍경은 점점 더 그립기만 했다. 처음 철책 경계 작전에 투입되었을 때는, 살을 에는 추위로 주위 풍경을 둘러볼 여유가 없었다. 부족한 잠과 적응해 나가야 하는 수많은 일상이 자리 잡고 있었다. 살기 위해 눈을 치우고 또.. 더보기 선택에 대하여 우리의 삶은 선택의 연속이다. 수많은 선택이 모여 삶을 채워간다. 외출할 때 옷차림과 점심 메뉴를 고르는 일은 사소한 선택이다. 결혼과 직장 등 인생의 진로를 결정짓는 중대사는 큰 선택이다. 애초에 우리가 세상에 태어난 것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었다. 태어날 때는 모두 같은 사람으로 태어났다. 하지만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서 점차 삶의 경로가 갈라지고 격차가 생겨난다. 우리 사회에서 그렇게 조금씩 쌓인 격차가 누군가에게는 까마득한 수준으로 커져 버린다. 각자 삶의 길을 어떠한 방향으로 그리게 될 것인지는 우리가 어떠한 선택을 하느냐에 달렸을 것이다. 내가 걸어온 삶의 궤적마다 어떤 선택에는 재빠른 결심을 하는 경우도 있었고, 선택의 기로에 서서 망설이다 포기할 때도 많았다. 일단 들어서면 되돌리기 어려.. 더보기 디딤돌 새끼줄로 얼기설기 엮은 초가지붕 처마 밑에는 디딤돌이 놓여있었다. 그것은 봉당과 마당 사이에 있는 평평한 돌로 뜰을 오르내릴 때 디디라고 어머니가 나를 위해 가져다 놓았다. 봉당이 낮아 가족들은 마당으로 바로 올라서고 내려섰지만, 다리에 장애가 있는 나는 그렇지 못했다. 어머니는 그것을 늘 깨끗하게 닦아 놓으셨다. 그 디딤돌은 내가 세상 구경을 하고 싶을 때 스스로 내려갈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마당 가장자리 담장 밑 화단에서 수런대는 꽃들을 가까이 보고 싶을 때나 친구들이 뛰어다니며 노는 모습을 보고 싶을 때 그것을 유용하게 사용했다. 엉덩이를 바깥쪽으로 향하고 다리를 곧추세워 디딤돌에 발을 디딘 다음 마당으로 내려섰다. 그런 모습을 지켜보던 어머니는 내가 잘 걸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으셨던 모양이다.. 더보기 눈 오랜만에 산책을 나선다. 찬찬히 공원을 둘러보며 계절의 변화를 살핀다. 녹음은 짙어가고 군락진 꽃들은 저마다 화려함으로 벌과 나비를 불러들인다. 얼굴을 스치는 풀냄새를 머금은 바람이 싱그럽다. 두 팔을 벌려 쏟아지는 햇살을 마시며 고개를 들어 눈부시게 화창한 하늘을 바라본다. 갑자기 미확인 물체가 눈앞에서 둥둥 떠다닌다. 좁쌀 크기의 동그란 물체는 옅은 회색과 검은색 경계의 색상으로 잠자리 날개만큼의 두께를 지녔다. 왼쪽 눈에서 나타난 이 물체는 1시에서 7시 방향으로 사선을 그리듯 서서히 이동한다. 간혹 서성이다 11시 방향으로 틀기도 한다. 숨바꼭질의 술래처럼 어딘가 숨어있다가 다시 나타나며 하나가 되었다가 여러 개가 보이기도 한다. 안과에 갔다. 몇 가지 검사 후 의사는 비문증이라고 했다. 낯선 단.. 더보기 무지개 마을 화사한 빛을 받아 감천 문화마을이 화려한 풍경을 자랑한다. 마을 입구에서 바라보면 어느 화가가 무지개를 그리려다 엉뚱한 영감을 받아 알록달록 예쁘게 흩뿌려 그린 듯하다. 마을 전체가 한 폭의 풍경화가 되어 있다. 골목길을 따라 걷다 보니 발걸음이 절로 느려진다. 벽면마다 누군가의 손길이 닿아 예술작품이 되어 있다. 고갯길 한쪽에 앉아 마을을 내려다보고 있는 어린왕자 모형 옆에서 나도 잠시 걸음을 멈추어 마을 풍경에 젖어든다. 여느 관광지와는 다른 풍경이다. 화려하고 웅장한 건축물이 자리 잡은 것도 아니다. 그저 골목길 풍경일 뿐인데 무수히 많은 사람의 손길이 문화마을을 만들어낸 것이다. 생각 없이 적은 문구가 하나도 없다. 화살표 하나 글귀 하나 모두가 반짝이는 별과 같다. 반듯하지 않은 것들이 그저 사.. 더보기 약쑥 한 자루 텔레비전 볼륨을 높였다. 어머니께 보내는 밥 한상이 소개되고 있었다. 한 해를 갈무리하는 시기에 보내는 효도밥상이라 그런지 가슴에 거미줄 같은 그리움이 번지며 코끝이 시큰거렸다. 베란다 창을 통해 쏟아져 들어오는 겨울 햇살이 얼굴을 달아오르게 만든다. 지금은 내 곁을 떠나신 어머니의 잔영이 나타났다 사라졌다 너울춤을 추기 때문이리라. 사회에 첫발을 내딛고 구한 직장이 고향과는 너무 먼 지역이라 반대하셨다. 딸을 자주 볼 수 없어 안된다던 어머니의 예감은 현실이 되었다. 타지에서 만난 남편과 가정을 꾸리고 울산에 터를 잡았다. 어머니를 만나는 횟수는 일 년에 서너 번 뿐이었다. 연년생 아이 둘을 키우느라 힘들 때였다. 어머니가 찾아오셨다. 위염으로 고생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약쑥 한 포대를 뜯어오셨다. .. 더보기 무름의 힘 밤새 감꽃이 떨어졌다. 엄지손톱만한 배꼽들, 천연스레 낙화했다. 푸른 바람, 맑은 햇살만을 골라먹고 꽃받침 위에 몽우리를 맺어놓았다. 온몸이 욱신거렸다. 꽃 진 자리마다 이미 푸른 젖이 부풀기 시작했다. 까치가 수시로 와서 살피고 직박구리도 눈독 들였다. 새들의 입질로 봉긋해진 가슴들, 여물기도 전에 떨어진 풋것들을 모아 항아리 속 소금물에 쟁였다. 세상을 그리 함부로 얕잡아보고 뛰어내리면 안 된다는 것을 풋감들은 몸으로 알았을까. 캄캄한 소금물속에 들앉아 떫은맛을 삭여낸 풋감들이 서늘한 단맛을 물고 나왔다. 한입 베면 어린 것들의 고진감래가 그대로 전해져왔다. 감나무에 감이 익어가고 여름도 저물어가는 즈음이면 홍시가 생겨났다. 성미 급한 것들의 손은 헐거워져서 중력을 이기지 못했다. 땅바닥에 파열음을 .. 더보기 친절하게 배웅까지 결혼 전에 있었던 일이다. 다리 수술하러 병원에 가기 위해 집을 나섰다. 추수철이라 일손이 모자라서 부모님 대신 두 살 위의 언니랑 함께 가기로 했다. 충북 지역에서는 여수까지 바로 가는 기차가 없어서 조치원역까지 버스를 타고 나가야 했다. 조치원역은 경부선 기차가 다니는 역으로 서창역과 내판역 사이에 있다. 우리는 밤차를 타려고 해가 설핏할 때 나섰기 때문에 캄캄한 밤이 되어서야 역에 도착했다. 그곳은 환승역이라 그런지 진풍경들이 벌어지고 있었다. 가을밤이라 싸늘한데도 노숙자들이 곳곳에서 신문지 몇 장을 이불 삼아 잠을 청하고 있었다. 어떤 걸인은 잔돈이 없다고 하는 사람을 끈질기게 따라다니더니 결국, 몇 푼을 얻어 냈다. 한 남자는 아가씨를 강제로 끌고 가려고 했다. 여자가 발버둥을 쳤지만, 억센 남.. 더보기 [8월의 산책] 태화강대공원에 놀러오세요 4만평 태화강대공원에 오면 십리대숲도 만나고 밤에는 대숲에 떠다니는 은하수 속으로 빠질 수 있다. 대숲 속엔 여름 냄새가 난다. 대숲으로 기어이 파고든 햇볕이 댓잎들과 버무러진 냄새. 그 냄새 속엔 대숲이 옆구리에 끼고 도는 강물 냄새도 들어와 있다. 밤 대숲 은하수 속엔 시도 때도 없이 만나는 견우직녀들의 웃음이 흘러 다닌다. 어둠 속에서 그림자처럼 따라붙기도 하고 무정하게 스치기도 하는 현대판 견우직녀들이 마냥 부럽기도 할 것이다. 8월 염천의 태화강대공원은 부용화가 너풀거리며 지나는 사람들을 사로잡는다. 넓은 치맛자락을 뒤집어놓은 듯한 부용화. 가까이서 보면 참으로 속없이 웃고만 있는 우리 옛날 할매들 같고 엄마들 같다. 밭일 들일 가리지 않고 일만 하여 머리에 짚북데기나 먼지를 뒤집어 쓴 듯하고 .. 더보기 까막눈 프랑스 출장 중에 잠시 쉬어갈 여유가 있어 노천카페를 들렀다. 직원이 다가와서 주문을 받았다. 영어로 커피를 주문했더니 알아들을 수 없는 불어로 대답을 했다. 동일하게 다시 주문했지만 계속 알아들을 수 없는 말만 돌아왔다. 도저히 대화가 되지 않아서 일행 중 회화에 능통한 사람을 찾아서 겨우 주문할 수 있었다. 알고 보니 원하는 커피가 따뜻한 것인지 차가운 것인지 확인하기 위해 되물었던 것이었다. 짧은 출장 일정에도 말과 글이 통하지 않는 곳에서 ‘문맹’으로 사는 것은 답답한 일이다. 관광지나 외국인을 배려하는 곳이라면 조금은 소통이 되지만 그렇지 않은 지역일 때는 꼭 필요한 일정 외에는 숙소 밖을 나설 생각을 하지 않는다. 이럴 때면 외국어 공부를 다시 해볼까 싶어진다. 그러다 영어도 어설픈데 또 다른.. 더보기 이전 1 2 3 4 5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