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문화/이서원 시인의 <詩視한 이야기> 썸네일형 리스트형 “비 오는 날 아침의 모놀로그” 비가 내린다. 처마 밑으로 떨어지는 물방울이 바닥을 오목하게 만들었다. 보드라운 흙은 씻겨가고 작은 돌과 모래알만 모인 곳에 빗물이 튄다. 동그라미 그리기가 무한 반복이다. 쉽게 거칠 줄 모르는 여름비가 싫지 않다. 좁은 마루에 걸터앉아 마당 가의 감나무를 바라본다. 초록 잎에도 비가 고여 후드득 채전으로 떨어진다. 세상에 흐르지 않는 것이 어디 있으랴. 시간도, 바람도, 마음도 길을 내며 자신의 방향으로 유유히 떠난다. 뜰 한쪽으로 고인 물들도 제 낮은 곳을 찾아 골목 어귀로 빠져나간다. 기댈 어깨가 없는 사랑채에서 혼자 책을 펼쳤다 덮었다 뒹굴어도 싫지 않은 아침의 이 유려한 달콤함이 오히려 생경하다. 대들보 위쪽에 걸린 괘종소리가 뎅, 뎅, 뎅 아홉 시를 흘러간다. 낡고 오래된 시계지만 변함없는 .. 더보기 "사과를 깎으며" 이브의 사과처럼 붉은 유혹은 사람을 혼미케 하는 매력이 있는가? 아내가 내민 사과를 받아쥐고 테이블에 앉는다. 전등에 반사된 은빛 과도의 반짝이는 섬뜩함을 슬며시 뒤로 감추며 사과를 깎는다. 단박에 목숨을 끊어야만 덜 아픈 냉혈한 마음처럼, 과감하게 꼭지 부분을 칼로 한 번 내려찍는다. 손에 최대한 힘을 빼고 칼의 방향을 잡는다. 최대한 껍질이 끊어지지 않게 조심스럽게 칼을 민다. 바람의 결처럼, 푸른 보리밭의 이랑 사이로 불어오던 봄바람처럼 칼은 리드미컬하게 미끄러져 간다. 어머니가 그랬다. 길게 끊어지지 않게 잘 깎으면 장가를 멀리 간다고. 그래. 진정 그렇단 말이지. 믿었다. 아니 믿고 싶었다. 밑도 끝도 없는 속설을 품고 언제나 과일을 깎을 땐 조심스럽게 온 정성을 쏟았다. 최대한 길게, 최대.. 더보기 “새벽을 건너가는 교교한 달빛 한 자락” 시인은 시선과 감성의 모든 것에서 일상의 미세한 움직임도 인지할 수 있는 감각의 촉수를 곧추세우며 사는 운명의 주체다. 관조 되는 모든 것을 포용하여 두루 통섭의 창조성을 발휘할 수 없다면 그만 펜을 놓아야 한다. 아무리 논리가 정확하다 해도, 시는 그 너머의 사유를 담보하지 않으면 안 된다. 잠을 자다가도, 길을 가다가도, 어떤 일상의 부딪힘 속에서도 문득 번개처럼 스쳐 가는 언어의 포착은 쾌락을 선사한다. 문학의 서사는 항상 마음의 준비성에서부터 찾아오는 숭고한 계시가 아니고 무엇이겠나. 어떤 것을 갖다 놓아도 신선한 비유만이 살아남을 뿐이다. 오로지 일회성의 시, 단 한 번만 존재하는 시의 발산은 그래서 더 정제된 마음을 요구하는지도 모른다. 그저 그런 시는 휴지가 되고 만다. 하여 참으로 시.. 더보기 뒤뜰에 핀 살구꽃 뒤뜰에 핀 살구꽃 이서원 (우정교회, 시인)풋살구 몇 개가 은근슬쩍 익어가는신맛 같은 봄밤이정겹기도 하여라고요가뒤꿈치 들고달을 슬몃 당기는 「뒤뜰」 전문 뒤뜰에 살구나무 두 그루가 나란히 서 있다. 하나는 품이 너르고 키도 크고, 하나는 조금 작고 가지도 여리다. 재래식 화장실에 쪼그려 앉아 살구나무 그늘을 지붕 삼아 볼일을 본다. 바람이 조금씩 달큰해지는 봄날, 며칠 전 떨어진 꽃잎 속으로 파리한 열매가 언뜻언뜻 햇살 속으로 보인다. 아마도 큰 살구나무에서 떨어진 씨앗이 뿌리를 내려 용케도 살아남았을 작은 나무는 모녀지간이 분명하다. 지척에 터를 잡고 아이를 보살피려는 살뜰한 모성의 본능인가. 아직은 홀로서기에는 작은 .. 더보기 "나 여기 있어요" 고리에서 약 190km 떨어진 바르지아는 조지아의 남부 아스핀자 근교 에루셸리산의 측면에 동굴을 낸 수도원으로 유명하다. 일몰이 너무나 예쁜, 이름도 생소한 어느 시골 마을에서 하룻밤을 보낼까. 아니면, 그냥 평범하지만 의미 있는 도시로 가 볼까. 두 갈래에서 마음이 서성거렸다. 늘 선택은 자신의 몫이지만 거리와 시간 등 일정 앞에서 고민했다. 전날 잠을 잘 청하지 못했던 터라 아침에 일어난 내 상태는 그야말로 10라운드 이상 뛴 복싱 선수의 헝클어진 몰골 같았다. 그냥 상대를 끌어안고 더는 버틸 수 없으니 차라리 링 밖의 코치를 향해 흰 수건을 던져 달라고 애원이라도 하고 싶었던 마음이라고나 할까. 며칠 안 깎은 수염은 더부룩했고, 머리는 벌써 하얗게 뿌리가 눈 뭉치처럼 쌓이고 있었다. 갑자기 어느.. 더보기 "산정 일출" 누군가 내 뒤통수를 힘껏 내리쳐 까무러칠 만큼이거나, 자기 무릎을 오른손으로 때려 관절이 부러질 것 같은 박장대소의 고함을 지르거나…. 이만한 일이 살면서 몇 번이나 있을까. 이해하고 깨우친다는 것은 쉽지 않다. 한 편의 시를 읽고 기절할 듯한 충격에서 쉽게 빠져나오지 못한다면 그 시는 성공이다. 그저 그런 시 한 편을 읽은 뒤 돌아오는 감정을 어찌하지 못해 시원한 콜라 한 병 통째로 들이부어야 느끼함이 가신다면 그게 바로 내 시가 아닐까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오랜만에 무거운 배낭을 둘러메고 지리산에 올랐다. 스무 살 때 이후 처음이다. 등에 짊어진 배낭은 오를수록 태산보다 더 무겁다. 나이를 생각지 않고 이것저것 챙겨온 게 낭패다. 고도는 높아지는데 걸음은 천근을 훌쩍 넘긴다. 꺾어진 소나.. 더보기 "시의 여운" 시란 무엇인가? 이 명제 앞에서 명확한 답을 얻기란 쉽지 않다. 손에 잡힐 듯 바로미터에 있다가도 금방 신기루처럼 사라져 버리는 시의 정체 앞에서 절망하는 게 어디 한두 번이었던가. 그런데도 연말이 오면 수많은 문학 지망생들은 저마다 신춘문예의 관문을 통과하기 위해 날밤을 지새운다. 하나의 단어, 하나의 문장을 찾기 위해 고뇌하며 고군분투한다. 단 한 명만이 영광의 월계관을 차지하는 이 좁은 바늘구멍을 통과하기 위해 십 년을 투고하는 이도 보았다. 그만큼 어렵고 또 사람의 심장이 터질듯하게 만드는 묘한 매력이 있어서 문청 시절을 아름다운 추억으로 간직한다. 나 역시 30대에 신춘의 좁은 문을 통과하기 위해 거실 베란다에 좌탁 앞에 앉아 밤을 지새우길 여러 날 했다. 때론 가혹하리만치 문을 걸어 잠그.. 더보기 "유년으로 흐르는 추억" 창말 동산에 올라서면 그제야 한시름 놓았다는 듯 너럭바위에 잠시 몸을 기댔다. 푸른 소나무 몇 그루가 시원한 바람을 불러 왔다. 이고 왔던 보따리랑 광주리를 내리고 똬리처럼 굽은 황톳길을 바라보았다. 멀리 어래산이 보이고 그 아래로 아침에 떠나왔던 마을과 뾰족한 교회 종탑도 보였다. 십여 리를 걸어온 탓으로 어머님의 이마엔 송글송글 땀도 배였으리라. 몇 분도 채 쉬지 못하고 이제 안강 장은 멀지 않았다는 안도의 표정으로 내려놓았던 짐을 다시 머리에 이고 길을 나섰다. 5일 장은 벌써 인산인해다. 그 좁은 틈을 비집고 고추전을 지나 과일전 길가에다 광주리를 풀었다. 붉은 홍시가 그야말로 아침 햇볕을 받아 더 빛났다. 나도 그 곁에 병아리처럼 쪼그리고 앉았다. 몇 사람들이 우리 앞에서 흥정도 하곤 하였지만.. 더보기 "다시, 강가에서" 일상을 잠시 접어둔 채 배낭을 둘러메고 훌쩍 어디로든 떠날 수 있다는 건 작은 축복이다. 지난여름 조지아Georgia를 다녀왔다. 세계에서 기독교를 정식 국교로 인정한 두 번째 나라인 만큼 성지순례지로도 손색이 없다. 가는 곳, 보이는 곳, 대부분이 교회다. 역사에 의하면 약 320년경 니노Nino에 의해 기독교가 전파되기 시작했다고 전해진다. 이후 왕실과 귀족들은 물론 모든 국민까지 말씀이 선포되고, 마침내 아르메니아에 이어 세계 두 번째의 정식 기독교 국가가 되었다. 조지아의 옛 수도인 므츠헤타 스베티츠호벨리Svetitskhoveli 자리에 이 나라 최초의 교회가 세워졌다. 이곳 교회 뜰 잔디밭에 앉으면 그야말로 모든 시간이 멈춘 듯 마음이 평온해지고 푸른 하늘마저도 경이롭고 숭고해 보인다. .. 더보기 “문사(文士)” 문장을 짓는 일은 온 우주를 끌어당기는 듯한 힘과 끝없는 자기와의 지난한 싸움이 필요하다. 때로는 꿈에도 시를 좇고, 더러는 길을 가거나 운동을 하다가도 불현듯 뇌리를 스치는 단어 하나에 몰두하는 집중력, 그런 집요한 파고듦이 없이는 결단코 작가의 대열에 끼어들 수 없다. 남들은 무모하다고 고개를 가로저어도 절대 이해할 수 없는 게 어쩌면 글을 쓰는 일 아니겠나. 지난달 파리 올림픽 여자 마라톤이 모든 경기의 피날레였다. 42.195km라는 엄청난 거리를 달리는 건 아무나 도전할 수 없다. 그래서 올림픽의 꽃이라고 하는 것이리라. 인간의 한계에 도전하는 일, 조금도 멈춤 없이 오로지 앞만 보고 달리는 듯하지만, 그들의 무한 경쟁은 복잡한 계산과 치열한 작전이 필요하다. 근대올림픽이 시작된.. 더보기 "고사목" 고사목 이서원 시인 (우정교회 집사) 네게도 맞서야 할 고뇌가 있는가 발 앞에 휘몰아치는 된바람과 눈보라 등 한 번 돌리지 않는 순교자의 외길 같은 그 어떤 유혹에도 꿈쩍 않는 믿음으로 아흔아홉 굽이돌아 산정을 고수한다 피골이 상접이라도 절규조차 사치라며 채찍에 부러져도 무릎 꿇은 적 없는 어디서 본 듯한 눈 맑은 절대자인가 재단 위 저녁노을이 제물 같아 느껍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 더보기 "오전 열 시 모노드라마" 한여름의 뜨거운 볕이 키 큰 감나무를 타고 오르더니, 이제 창을 밀치고 들어와 집 안 흔들의자에 주인처럼 앉아 있다. 지붕 낮은 사랑채 대들보에 걸린 괘종시계가 댕! 댕! 댕! 열 시를 알린다. 내 어릴 적 어머니가 쌀 몇 되를 주고 사서 머리에 이고 십 리를 걸어온 소중한 것이다. 기척 없는 고요한 마당을 제가 온전히 지키고 있다는 양, 째깍째깍 아직도 틀림없이 잘 가는 게 의젓하다. 뒤꿈치를 들어도 닿지 않아 목침을 괴고 겨우겨우 태엽을 감았던 어린 시절이 있었다. 이후 시간은 제 바퀴의 테두리를 얼마나 풀며 돌아갔을까. 서로의 나이가 엇비슷하게 조금씩 기울어 가는 세월이지만, 아직도 제 반경을 조금도 어긋남이 없다. 녹슨 철 대문 옆 정자에 앉는다. 앞집 연붉은 능소화가 담장을 넘어와 눈치를 살피며.. 더보기 “썸(SOME)” 젊은이들 사이에 쓰는 단어 중 하나가 썸(SOME)이다. 여기서 파생되어 온 단어가 썸남, 썸녀다. 서로 호감은 있으나 쉽게 고백을 못하는 단계의 썸을 지나 썸을 타는 단계까지 나아감은 이제 사랑하는 관계로까지 발전한 것을 의미한다. 큰애가 어느덧 스무 살의 중후반을 넘어서자 여자 친구 하나 없는 게 못내 걸렸다. 쉽게 사귀고 헤어지는 게 요즘의 세대라지만, 내심 사회성 결여인지 아니면 여자 친구는 아예 관심이 없는 건지 도무지 알 길이 묘연했다. 그런데 어느 날 느닷없이 사진 하나를 보내왔다. 코로나 시국이라 마스크를 꾹 눌러쓴 채 찍은 사진은 분명 아들이었다. 얼굴을 반쯤 맞대어 있는 옆 사람도 분명 여자 같았다. 소위 교회 오빠인 아들에게도 드디어 바라던 친구가 생겼구나 싶어 나도 모르게 이것저.. 더보기 「파도」 바닷가 카페에 앉는다. 이른 아침부터 몇몇 사람들이 서로 마주 보며 나누는 즐거운 대화가 그저 부럽다. 윤슬처럼 반짝이는 잔잔한 음악이 아름답다. 밀린 원고를 앞에 두고 한참이나 고민하며 머리를 도리질해도 풀리지 않는다. 쓰던 글을 잠시 덮고 통 큰 유리창으로 바다를 바라본다. 저 눈부신 푸른 출렁임과 포말이 숭고한 제 본연의 거룩한 사명인가 싶어 그저 부러울 따름이다. 주어진 일을 아무런 불평불만 없이 최선을 다하는 일, 그것만큼이나 진중한 것은 없다. 글을 쓰겠다며 꿈을 품은 지 꼭 40년이다. 아직도 변변한 글 한 편 내놓지 못한 채 날마다 허방 짚으며 가고 있는 모습이 부끄럽다. 길이 아닌가 싶어 그만두려고 해도 무슨 미련이 있는지 쉽사리 돌아서지 못한다. 지상에 발을 디딘 작은 호수의 잔잔.. 더보기 헛신발 봄날도 짙어가는 오월의 끝자락, 산과 들에는 저마다 피어난 꽃들로 제 극치의 아름다움을 선보이고 있다. 그예 질세라 모내기로 물을 머금은 논에서는 개구리 울음소리가 밤의 달빛보다 더 청명하다. 이런 호사스러운 봄날엔 그저 시골길을 걷기만 해도 저절로 기분이 사뿐사뿐 왈츠의 음계다. 해넘이로 어래산 자락의 그림자가 큰골 못에 서서히 제 발등을 담글 즈음 지천으로 핀 노란 낮달맞이꽃 한 아름 꺾어 집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인기척이라곤 없이 나지막한 집의 고요만 수직으로 내리꽂혀 마당에 뒹굴고 있다. 순간, 그 여유롭던 마음은 사라지고 무대 위의 독백 같은 대사로 어린애처럼 “엄마!”하고 부른다. 결 고운 월남 치맛자락이 스쳐 지나가듯 어린 참새 소리만 허공 위로 날아간다. 뒤뜰에 있는 만삭의 새색시 같.. 더보기 이전 1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