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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문화/이서원 시인의 <詩視한 이야기>

"산정 일출"

     누군가 내 뒤통수를 힘껏 내리쳐 까무러칠 만큼이거나, 자기 무릎을 오른손으로 때려 관절이 부러질 것 같은 박장대소의 고함을 지르거나…. 이만한 일이 살면서 몇 번이나 있을까. 이해하고 깨우친다는 것은 쉽지 않다. 한 편의 시를 읽고 기절할 듯한 충격에서 쉽게 빠져나오지 못한다면 그 시는 성공이다. 그저 그런 시 한 편을 읽은 뒤 돌아오는 감정을 어찌하지 못해 시원한 콜라 한 병 통째로 들이부어야 느끼함이 가신다면 그게 바로 내 시가 아닐까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오랜만에 무거운 배낭을 둘러메고 지리산에 올랐다. 스무 살 때 이후 처음이다. 등에 짊어진 배낭은 오를수록 태산보다 더 무겁다. 나이를 생각지 않고 이것저것 챙겨온 게 낭패다. 고도는 높아지는데 걸음은 천근을 훌쩍 넘긴다. 꺾어진 소나무 옆 바위에 걸터앉아 저 발아래를 돌아본다. 앞보다 뒤가 더 아름다우니 자꾸 돌아볼 수밖에. 과자 하나 우물우물 씹어 먹으며 땀을 닦는다. 저기가 섬진강인지 먼 물빛이 희미하다. 땀을 다 쏟아내고, 한기가 조금씩 밀려오면 다시 걷는다. 숨이 목구멍을 넘어 턱에 차올라 절정을 향해 치닫고 있다. 내려가는 사람에게 정상까지의 시간을 묻는다. 대답은 한결같다. 다 왔으니 조금만 힘내란다. 한 시간 전부터 그 답이 아직도 변할 줄 모른다. 더딘 발걸음을 여기서 멈출 수는 없으니 믿으며 갈 수밖에.

  그렇게 도착한 장터목 산장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이른 새벽 다시 주섬주섬 길을 나섰다. 일출을 보기 위함이다. 어제의 태양이 오늘의 태양과 다르지 않을 텐데 반백 년 늘 보아온 일출이 무어라고 이리도 고생을 사서 하나 싶다. 그래도 다시 무릎에 힘을 주고 오른다. 정상은 그저 주어지는 게 아니니 탓할 수 없다. 새벽 찬바람을 맞으며 별빛이 영롱하게 반짝인다. 오늘 일출은 아름다울 거라며 앞선 이들의 대화에 나도 덩달아 힘이 난다. 몇 번을 올라도 지리산 일출을 보기란 쉽지 않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으니 참으로 다행이다. 차츰 명징한 별들이 조금씩 희미해진다. 곧 날이 밝아온다는 뜻이다.

나도 정상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저 멀리 붉은 기운이 엄마 배 속의 아이처럼 태동하듯 꿈틀거린다. 누가 시는 훠이훠이 춤사위라고 했던가. 여명이 뒤꿈치를 들고 무대 위로 사뿐사뿐 걸어 나오는 듯하다. 숨을 죽인 채 관객인 양 설렘으로 두 손을 모은다. 마침내 절정의 시간, 모두가 환호성에 나도 박수로 오늘의 해를 공손히 받는다. 산이 서서히 제 모습을 드러낸다. 더할 나위 없는 광휘다. 

  눈을 감는다. 마치 수천수만의 군사들이 저 요동 벌판을 달려 진군해오는 말발굽 소리 같다. 창을 든 병사가 다급하게 궐문을 두드리며 반정의 소식을 전한다. 저 군사들의 반란을 어찌 막을까. 궐 안은 아수라장이다. 나라의 곳간이나 축내던 대신들은 저 하나 살길을 찾아 쥐구멍이라도 찾을 요량으로 도망친다. 

  이산 저산 이골 저골을 건너와 다시 성삼재를 뛰어오르는 빛살! 저들의 함성이 온 산을 휘감는다.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힘차게 진격해 온다. 광활한 기상으로 중무장한 거침없는 도발은 이미 더는 막을 수 없는 대변이(變異)다. 창검으로도, 인해전술로도 어찌할 수 없다. 안개 군단을 걷어치우며 이 나라의 백성을 구하겠다는 일념이 저 볕의 단호한 결의인가. 마술사가 손에서 꽃 한 송이 피워올리듯 동 두렷한 저 햇덩이가 혼 천상천하를 비춘다. 승리의 기운생동이 우리로 하여 경건한 무릎을 꿇게 한다.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시19:1) (사진_지리산일출_이서원)

    

궐문을 두드리는 다급한 목소린가

반정의 그날인 양 성채를 에워싸고

삼엄한 경계를 넘어 산 그리메로 진군한다

 

성삼재를 뛰어오라 숨 가쁜 거사의 변

실정의 안개군단을 속전속결 베어 낸다

명분은 민초를 향한 새 하늘을 받드는 일

 

원추리 물레나물 속단이 산오이풀

공신의 함성이 천상을 뒤흔들자

마침내 지리의 기상 양팔 가득 껴안는다

 

「산정 일출」 전문 

 

  거사를 할 때는 신중한 계획과 치밀한 준비가 필요하다. 어리숙한 시도는 오히려 목덜미를 잡히고 만다. 태양은 날마다 이 세상의 어둠을 몰아내는 일에 최선을 다한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창조 이래 단 한 번도 실패한 적이 없다. 매일 거대한 꿈의 반정을 실행에 옮긴다. 마침내 세상은 빛에 정복당한 채 어둠은 물러나기 마련이다. 일출은 석양과는 사뭇 다른 엄청난 에너지를 주는 매력이 있다. 모두가 제 잘난 공신을 내세우지만, 그마저도 포용할 줄 아는 너그러운 품성이 있다. 저 멀리 산을 휘돌아 푸드덕거리며 날아가는 딱새, 밤새 이슬에 젖은 날개를 털며 힘찬 하루의 일상으로 제 모습을 다하는 지리산이 눈부시게 현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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