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뜰에 핀 살구꽃
이서원 (우정교회, 시인)
풋살구 몇 개가
은근슬쩍 익어가는
신맛 같은 봄밤이
정겹기도 하여라
고요가
뒤꿈치 들고
달을 슬몃 당기는
「뒤뜰」 전문
뒤뜰에 살구나무 두 그루가 나란히 서 있다. 하나는 품이 너르고 키도 크고, 하나는 조금 작고 가지도 여리다. 재래식 화장실에 쪼그려 앉아 살구나무 그늘을 지붕 삼아 볼일을 본다.
바람이 조금씩 달큰해지는 봄날, 며칠 전 떨어진 꽃잎 속으로 파리한 열매가 언뜻언뜻 햇살 속으로 보인다. 아마도 큰 살구나무에서 떨어진 씨앗이 뿌리를 내려 용케도 살아남았을 작은 나무는 모녀지간이 분명하다.
지척에 터를 잡고 아이를 보살피려는 살뜰한 모성의 본능인가. 아직은 홀로서기에는 작은 체구에 왜소한 묘목, 대나무 몇 개로 받침대를 고이고 아버지는 듬뿍 물을 준다. 어미를 닮아 유월이면 샛노란 살구를 풍성하게 열릴 것을 기대한다.
살구, 그냥 속으로만 이름을 불러도 이미 침이 고인다. 덜 익은 풋살구를 따 먹은 듯 저절로 눈이 감긴다. 살구꽃은 새잎이 아직 피어나지도 않았는데 꽃부터 피우고 만다. 바람이 아직은 찬데 꽃은 그 밤을 견디려 안달이다. 앞집 여동생 춘화의 볼처럼 볼그스레한 꽃은 사실 오래가지 못한다. 대게의 경우 꽃이 피었다 싶었는데 벌써 뒤뜰은 꽃이 지난겨울의 눈발처럼 바람에 흩날리며 지붕으로 떨어진다. 마치 오선지의 맨 앞에 그려진 높은음자리처럼 맴돌며 제 자리를 쉽게 찾지 못한다. 하늘하늘 산화하는 꽃을 보면 마음 한쪽이 어쩌지를 못한다.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무모한 열정의 저 낙화가 아프다. 미세한 바람의 파동에도 가지에서 떨어지고 마는 저 연약함을 어쩌랴. 춤사위의 가락이 아리랑 곡조 같다. 일렁이는 봄밤, 교교한 달빛은 어래산을 넘어가는데 목숨의 덧없는 꽃은 제 가는 길을 알고나 있으려나,
사실이지 앞집에 동생뻘 춘화는 이름처럼 예뻤다. 군대를 막 제대한 봄이었다. 어둑한 어스름 녘 동구 밖 버스에서 내렸다. 집으로 걸어가는 신작로를 앞서 종종걸음으로 가는 아가씨가 있었다. 시골 동네의 사람들 대부분을 아는데 저 친구는 누군가 싶었다. 한참을 걸어도 우리의 거리는 좀처럼 좁혀지지 않았다. 그렇게 마을에 닿았고 좁은 골목으로 들어섰다. 이제 곧 막다른 길 끝인데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의문이 극에 다다랄 즈음 그는 앞집으로 쏙 들어갔다.
다 큰 숙녀는 어느덧 스무 살을 갓 넘긴 춘화였다. 겸연쩍은 헛웃음이 봄밤의 달빛으로 흘러갔다. 그로부터 몇 년 후 춘화는 제 이름처럼 그렇게 세상을 홀연히 떠났다. 앞집 어머니의 통곡은 보름을 넘겨도 담장 너머 밤마다 우리 집으로 건너왔다. 애끓는 어미의 통한은 세월이 지나도 살구꽃 이파리처럼 슬프다.
슬그머니 사랑방 문을 열고 나와 뒤뜰에 섰다. 그때의 살구나무는 이미 춘화처럼 세상을 떠났다. 새로 심은 살구나무 몇 그루는 개량종으로 그날의 위엄처럼 고목이 되지 못한다. 덜 익은 개살구를 가방에 쟁여 넣고 학교에서 친구들이랑 나누어 먹었던 추억도 아릿하다. 뒷짐을 진 채 그저 하릴없이 서성여 본다.
궁싯거리는 바람이 아직은 차다. 산란한 마음의 자락을 옷깃처럼 여미고 고요가 봄밤을 건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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