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리에서 약 190km 떨어진 바르지아는 조지아의 남부 아스핀자 근교 에루셸리산의 측면에 동굴을 낸 수도원으로 유명하다. 일몰이 너무나 예쁜, 이름도 생소한 어느 시골 마을에서 하룻밤을 보낼까. 아니면, 그냥 평범하지만 의미 있는 도시로 가 볼까. 두 갈래에서 마음이 서성거렸다.
늘 선택은 자신의 몫이지만 거리와 시간 등 일정 앞에서 고민했다. 전날 잠을 잘 청하지 못했던 터라 아침에 일어난 내 상태는 그야말로 10라운드 이상 뛴 복싱 선수의 헝클어진 몰골 같았다. 그냥 상대를 끌어안고 더는 버틸 수 없으니 차라리 링 밖의 코치를 향해 흰 수건을 던져 달라고 애원이라도 하고 싶었던 마음이라고나 할까. 며칠 안 깎은 수염은 더부룩했고, 머리는 벌써 하얗게 뿌리가 눈 뭉치처럼 쌓이고 있었다. 갑자기 어느 동네 느티나무 아래서 여름볕을 피해 쉬고 싶었다. 꼭 가야만 될 곳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안 보면 후회할 것 같은 이 사이에서 저울질했다.
아침 볕은 우리나라보다 더 뜨겁게 열기를 뿜고 있었다. 그래, 또 언제 오랴! TKO를 당하더라도 다시 두 주먹에 힘을 불끈 쥐었다. 무슨 거대한 파이터를 만나러 갈 것도 아니면서 이리도 요란스러운 감정의 소용돌이가 일어날꼬. 주섬주섬 짐을 챙겨 다시 차에 올랐다.
하나님을 향한 간절한 믿음의 사도들은 언제나 내면의 갈등보다 하늘을 향해 온전히 자신을 내어드리는 일에 기꺼이 헌신하지 않았겠나. 두어 시간을 달렸을까, 저 멀리 웅장한 산이 눈앞으로 성큼 다가왔다.
산을 깎은 절벽으로 거대한 바윗덩이가 마치 벌집처럼 구멍이 숭숭 뚫려 있다. 고대 동굴 거주지, 기독교인인 이곳 사람들은 모슬렘의 튀르크인 침입이 항상 두렵고 골칫거리였다. 이후, 오스만 제국 등의 침략에 대비해 1185년경에 건설되었다. 당시에는 므트크바리강의 비밀 통로들을 통해서만 접근이 가능했다고 한다. 이후, 몽골의 침략에도 무너지지 않았던 동굴은 1293년 큰 지진에 그만 2/3가 파괴되었다. 이때 숨겨졌던 구역들이 노출되었다. 총 6개의 층층을 이루며 약 300개의 방과 5만 명의 사람들이 살았다고 전해진다. 이곳에는 연회장, 마구간, 상점, 빵집, 계단씩 밭, 종교 시설 등이 있는 그야말로 엄청난 규모의 마을이라고 해야겠다.
아버지 기오르기 3세 뒤를 이어 이 동굴 도시를 완성한 타마르(조지아 전성기를 이끈 여왕)가 어린 시절 이곳에서 놀다가 그만 길을 잃어버렸다고 한다. 그때 삼촌이 애타게 찾으며 “타마르! 타마르!”를 부르자 “아크 바르지아(나 여기 있어요)”라고 해서 이곳 이름을 ‘바르지아’라고 부르게 되었다.
“나 여기 있어요” 생각해 보면 이보다 더 안심되는 말이 어디 있을까.
그대 먼 마음 자락 두고 온 지 열 사나흘
수도사의 흰 수염 같은 정오의 햇살 너머
돌계단 밟아 오르는 종소리가 초록이네요
까닭 모를 그리움이 강물처럼 출렁일 때
새까만 제복 같은 어둠 홀로 침잠하고
천지가 바윗덩이라도 쪽창 하나 새겨봅니다
세상과 단절된 채 무덤 같은 침묵의 제단
누구의 부름인가요. 귀를 가만 기울이면
아득한 고립의 독백, 나 여기 있어요
「나 여기 있어요」
뜨거운 볕이 강물 소리보다 더 명징하게 쏟아지는 돌계단을 타박타박 밟아 올랐다. 저 아득한 푸른 나무 곁으로 오밀조밀 집들이 모여 있는 마을을 바라보며 이곳 은신처에서의 기독교인들은 얼마나 자신을 다그치며 하나님과의 소통을 갈망했을까. 거처를 위해 변변찮은 도구를 들고서도 숱한 날 동굴을 파며 지난한 자신과의 싸움을 견뎠을 조지아인들의 숭고한 정신이 위대하고 거룩해 보였다. 창 하나 없는, 오로지 딱딱한 돌무덤 같은 이곳에서 삶을 견디는 일은 어쩌면 이 생을 버리고 저 생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간절함만이 저들의 전부였을 것 같았다.
날마다 무릎을 꿇는 일, 날마다 자신을 바치는 일은 오로지 자기를 부인하는 일에서부터 출발하는 길임을 잘 알기에 더 마음 한쪽이 애련했다. 갑자기 보고 싶은 얼굴이 저 초록 이파리에 반짝이는 햇살처럼 떠올랐다. 나는 조용히 텅 빈 돌집에 걸터앉아 빛도 없는 어둑하고 오목한 자리에서 일어날 줄 모른 채 오래도록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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