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란 무엇인가? 이 명제 앞에서 명확한 답을 얻기란 쉽지 않다. 손에 잡힐 듯 바로미터에 있다가도 금방 신기루처럼 사라져 버리는 시의 정체 앞에서 절망하는 게 어디 한두 번이었던가. 그런데도 연말이 오면 수많은 문학 지망생들은 저마다 신춘문예의 관문을 통과하기 위해 날밤을 지새운다. 하나의 단어, 하나의 문장을 찾기 위해 고뇌하며 고군분투한다. 단 한 명만이 영광의 월계관을 차지하는 이 좁은 바늘구멍을 통과하기 위해 십 년을 투고하는 이도 보았다. 그만큼 어렵고 또 사람의 심장이 터질듯하게 만드는 묘한 매력이 있어서 문청 시절을 아름다운 추억으로 간직한다.
나 역시 30대에 신춘의 좁은 문을 통과하기 위해 거실 베란다에 좌탁 앞에 앉아 밤을 지새우길 여러 날 했다. 때론 가혹하리만치 문을 걸어 잠그고 어린 두 녀석이 오지 못하게 철저한 고립을 선택했다. 그렇게 3년째 새해에 드디어 그렇게 바라던 서광이 비춰주었다.
시는 누구나 할 수 있어도 아무나 쓸 수는 없는 것일까? 많은 이가 물었다. 타고난 재능이 있었던 건 아니냐고? 결코 그런 건 없었다. 중학교 시절 일기 몇 줄 잘 쓴다는 소리 들었던 게 고작이었으니. 시는 멀리 있는 게 아니었는데, 늘 저 하늘 끝자락 어디쯤 있다고 믿었다. 그러니 아무리 찾아다닌들 보이겠냐 말이다.
지난주 시골집에 들렀다. 사랑채 굴뚝에 하얀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기에 보니, 그 큰 쇠죽솥에 노모는 콩을 삶고 있었다. 해마다 올 해는 안해야지 하면서도 수년 째 이 일을 놓지 못하고 늘 해마다 연례행사처럼 콩을 삶는 것이다. “간장, 된장이 없으면 한국 사람이 어찌 사노” 늘 같은 말씀이다. 당연한 이치지만 수고로움에 걱정이 앞서는 아들의 잔소리를 흘러 듣는 걸 안다.
장작을 아궁이에 넣고 밤새도록 불을 지피는 노고를 아는 이가 있을까. 사랑방은 쩔쩔 끓어 장판이 누렇게 변해도 허리 쑤시는 노동 뒤에 오는 맛의 달콤함을 어찌 모르겠나. 이른 봄, 자투리땅에 콩 씨앗을 넣으면 움이 돋기가 바쁘게 비둘기가 와서 반은 먹고 그마저 반도 안 되는 콩을 수확하는 일에도 소소한 기쁨이 있다. 작은 막대로 꼬투리를 털고 멍석에 쏟아지는 너덧 되의 노란 콩.
체로 걸러내고 바람에 풍구질하여
너덧 되 겨우 얻은 메주콩을 삶는 저녁
한 아름 구수한 냄새 온 마을이 들썩인다
「시」 전문
오늘은 온 마을에 메주콩 삶는 냄새가 진동한다. 요즘은 사랑채도 다 허물어지고, 마구간도 없어 무쇠솥이 있는 집이 거의 없다. 그나마 우리 집이 유일하게 있으니 급식 배급을 받으려 차례를 기다리는 아이처럼, 동네 분들이 초겨울이면 다 굽은 허리에 콩 몇 말씩 들쳐 메고 온다. 자식들에게 줄 요량이니 그 사랑 더욱 뜨겁다.
오랜만에 아궁이 앞에 앉아 더불어 나도 장작을 밀어 넣는다. 불은 너무 타올라도 안 되고 너무 약해도 안 된다. 마치 한약을 달이듯 뭉근하게 느긋함을 겸해야 한다. 급하다고 마구 쑤셔 넣다간 콩이 다 타고 만다. 천천히 마을 어귀 몇 바퀴를 돌아와도 아직은 아궁이에 불길이 있어야 한다.
시란 이런 것이다. 마치 메주콩 냄새 같아야 한다. 그 냄새 온 마을을 진동하며 누군가의 가슴에 향취로 오래 머물러야 한다. 너무 설익어도, 너무 타도 메주가 될 수 없듯이 시는 사골국처럼 오래 우려서 뭉근해야 한다. 시의 여운이 마음의 한 자락을 움켜쥐고 들판의 풍경으로 아스라이 사라져 갈 때, 뒷짐을 진 채 물끄러미 바라보며 영혼의 한쪽이 텅 비어지는 감흥이 있어야 한다. 그게 시다.
“나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여 나의 구원이 그에게서 나오는도다”(시편 62:1)
'기독문화 > 이서원 시인의 <詩視한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나 여기 있어요" (0) | 2025.02.28 |
---|---|
"산정 일출" (0) | 2025.01.30 |
"유년으로 흐르는 추억" (1) | 2024.11.29 |
"다시, 강가에서" (4) | 2024.11.02 |
“문사(文士)” (1) | 2024.10.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