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을 잠시 접어둔 채 배낭을 둘러메고 훌쩍 어디로든 떠날 수 있다는 건 작은 축복이다. 지난여름 조지아Georgia를 다녀왔다.
세계에서 기독교를 정식 국교로 인정한 두 번째 나라인 만큼 성지순례지로도 손색이 없다. 가는 곳, 보이는 곳, 대부분이 교회다. 역사에 의하면 약 320년경 니노Nino에 의해 기독교가 전파되기 시작했다고 전해진다. 이후 왕실과 귀족들은 물론 모든 국민까지 말씀이 선포되고, 마침내 아르메니아에 이어 세계 두 번째의 정식 기독교 국가가 되었다.
조지아의 옛 수도인 므츠헤타 스베티츠호벨리Svetitskhoveli 자리에 이 나라 최초의 교회가 세워졌다. 이곳 교회 뜰 잔디밭에 앉으면 그야말로 모든 시간이 멈춘 듯 마음이 평온해지고 푸른 하늘마저도 경이롭고 숭고해 보인다.
무너진 옛 돌담을 따라 아이들이 뛰어놀고 개, 고양이들이 어슬렁거려도 싫지 않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순교한 이후 입었던 성의聖衣가 이곳 교회 기둥 아래 묻혀있다고 전해진다. 그래서일까, 수많은 교인과 관광객들이 저 기둥 앞에서 기도하고 촛불을 밝힌다. 혼자 맨 뒤에 앉아 단상 위로 천장에서 쏟아져 들어오는 빛살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부서지는 빛과 성화의 조화가 그저 모든 걸 품고 나아가라는 하나님의 계시처럼 가슴에 쏟아져 눈물이 왈칵 쏟아진다.
마당 가의 종탑은 우리네 어릴 적 교회의 종탑과 비슷하다. 종소리가 가슴을 울리고 마음을 출렁이게 한다. 종소리는 거룩하고 숭엄하다. 이 세상의 다툼과 시기와 슬픔을 잊게 할 만큼 모든 걸 덮게 하는 것 같다. 이 마을 사람이 더없이 부럽다. 매일 이 종소리에 속에서 자신을 다독이며 사랑과 온유를 생각할 것이기에.
니노가 저 건너 산에 올라가서 십자가를 세웠던 곳을 바라본다. 저기가 바로 즈바리 수도원이다. 즈바리는 ‘십자가’라는 뜻이란다. 천천히 굽이진 길을 따라 저곳에 오른다. 말들이 한가롭게 풀을 뜯고 있다. 쿠라강과 아그라비강이 만나는 두물머리를 본다. 튀르키예에서 발원하여 수천 km를 흘러와 삼각지에서 합해진다. 그리고 다시 큰 줄기를 이루어 마침내 카스피해 에 닿는 강물, 수많은 굴곡과 협곡을 만나도 흐름을 포기하지 않고 낮은 데로 간다. 흙탕물도, 오수도 거부하지 않은 채 만절필동萬折必東 정신을 품는 건 우리가 지향해야 할 가치관일지도 모른다. 믿음도 이와 같은 것일까. 이런저런 핑계로 늘 내 삶에만 전력 질주했다면, 다시 옷깃을 여미고 십자가를 바라보아야 하리.
소박한 수도원은 마치 나무 위의 작은 새 둥지처럼 질박하다. 그 난간에 기대서서 지는 해를 바라보며 소멸의 시간을 건너 내일의 희망을 조용히 묵상해 본다.
떨림과 울림의 여행은 자신을 돌아보는 부드러움과 여운이 있다. 타박타박 산길을 걷는 이 낯선 이방의 길, 마치 강물이 제 속으로 소리를 삼키며 묵언으로 걸음질하는 것처럼 나 역시 생각을 저미며 포개본다. 한참을 내려와 강가에 드디어 닿았다. 흰 수염이 멋진 어르신이 그물을 던지고 있다. 작은 나룻배의 흔들림에도 능숙한 손놀림이다. 첨벙첨벙, 물소리는 고요하던 수면을 깨우며 동근 원으로 멀어져 간다. 어디를 던져도 물은 중심이다. 거기서부터 다시 동그랗게 물결무늬를 새긴다. 모가 난 각을 일체 거부하는 저 포용의 너그러움이 이 세상을 안는다, 마치 예수님의 품성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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