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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문화/이서원 시인의 <詩視한 이야기>

헛신발

 

  봄날도 짙어가는 오월의 끝자락, 산과 들에는 저마다 피어난 꽃들로 제 극치의 아름다움을 선보이고 있다. 그예 질세라 모내기로 물을 머금은 논에서는 개구리 울음소리가 밤의 달빛보다 더 청명하다. 이런 호사스러운 봄날엔 그저 시골길을 걷기만 해도 저절로 기분이 사뿐사뿐 왈츠의 음계다.

  해넘이로 어래산 자락의 그림자가 큰골 못에 서서히 제 발등을 담글 즈음 지천으로 핀 노란 낮달맞이꽃 한 아름 꺾어 집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인기척이라곤 없이 나지막한 집의 고요만 수직으로 내리꽂혀 마당에 뒹굴고 있다. 순간, 그 여유롭던 마음은 사라지고 무대 위의 독백 같은 대사로 어린애처럼 “엄마!”하고 부른다. 결 고운 월남 치맛자락이 스쳐 지나가듯 어린 참새 소리만 허공 위로 날아간다. 

  뒤뜰에 있는 만삭의 새색시 같은 수줍은 모양으로 앉아 있는 항아리 하나를 갖고 와 들고 온 꽃을 담았다. 집은 토라진 아이가 금방 웃음을 되찾듯 노란 향기로 풍성하다. 두 팔 가득 항아리를 들고 꽃보다 더 환한 웃음을 머금으며 사랑채 평상에 올려 두었다. 그때 마침 앞 댓돌에 눈길이 갔다. 순간 바윗돌보다 더 무거운 그 무엇이 쿵! 하고 가슴을 때렸다.

 

댓돌 위에 세워진
고무신 한 켤레

그 안에 고인 물이
찰방찰방 맑아라

아버지 가신 지 십 년
희고 고운 마음 하나

「헛신발」 

 

빈방 앞에 신발이라니, 그것은 바로 헛신발

 

방금 꽂아둔 여린 꽃잎의 하늘거림보다 더 내밀한 언어가 댓돌 앞에 세워져 있었다. 빈방 앞에 신발이라니, 그것은 바로 헛신발이었던 것이다. 접두사 헛은 ‘이유 없는’ ‘보람 없는’의 뜻이다. 즉, 헛것, 헛수고, 헛걸음, 헛말 등으로 필요 없는 것을 의미한다. 아마 조금 전에 먼지 묻은 흰 고무신을 비누로 빡빡 문질러 새하얗게 씻어 세워둔 모양이다. 아직 채 마르지 않은 흰 고무신 끝으로 모인 물이 맑다. 그 안에는 하늘 한 조각, 달빛 한 줌, 지나가던 바람 한쪽도 쉬어갈 만큼 품이 너르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지 십 년, 어머니 혼자 살며 보낸 세월도 어지간하련만, 아직도 마음 한구석에 남은 인정을 어쩌지 못한 것일까. 텅 빈 사랑방의 한지 창에 쏟아지는 봄날의 비둘기 울음소리조차도 설움에 겨운 한이라면 한이란 말인가. 갖은 고생 끝에 좋은 날 한 번 맞이하지 못한 채 이 아름다운 봄날에 가셨으니….

  혼자 남았다고 누가 탓하겠나. 그런데도 살아있음이 죄스러운 양, 날마다 아버지의 부재를 인정하지 못하는 건가. 흰 고무신을 씻어 반들반들한 댓돌 앞에 세워두면서까지도 ‘나는 혼자가 아니다’ 무언의 시늉을 해보는 것인가. 밤이 깊어 어두워지면 헛신발 하나의 위안으로 그 두렵고 캄캄한 무서움으로부터의 해방을 누리는 걸 생각하면 가슴 더욱 아프다.  

  신에 남은 물기를 탁탁 털고 내 발을 넣어 보았다. 꽉 낀다. 볼이 볼록하니 튀어나온다. 그러고 보니 아버지도 키가 조그마했다. 환하게 소리 내어 웃기보다 항시 헛웃음처럼 속으로만 웃었다. 봄이면 하릴없이 산에 올라서는 매번 빈 지게에 진달래, 참꽃, 사리 꽃을 꺾어 꽂아오길 잘했다. 생각해 보면 어쩜 지게 위에 지고 온 건 자신보다 더 무거운 생의 전부는 아니었을까. 새삼 마음이 저린다. 

  좁은 평상에 앉아 헛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 본다. 헛되고 헛된 세상이라고 했던가. 무위자연 속에서 헛것만 따라가는 부질없는 발걸음은 아니었기를 두 손 모아본다. 비록 저 마당 가에 겨우겨우 피어난 풀 한 포기 같을지라도 제 몫으로 최선을 다하는 움틈의 의미를 모른다면 얼마나 슬픈가. 생명의 저 깊은 안쪽으로부터 울컼울컥 삐져나오는 가없는 경이! 혼자 헛헛함을 달래며 서성이는 사이 대문을 밀치며 들어서는 어머니를 보자 달려가 와락 껴안았다. 다섯 살 적 응석받이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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