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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문화/신앙에세이

양탕국

 

양탕국 홈페이지 갈무리(www.ytgccmc.com)

 

  홍 선생 그는 눈물의 둑이 터져버린 원인도 의미도 몰랐다. 그즈음 했던 일이란 하염없이 걷는 것뿐이었다. 머릿속은 텅 비었고 가슴엔 휑한 바람이 불어 한곳에 붙박여 있기가 힘들었다. 어디로 가야할지 무엇을 해야 할지 아무것도 가늠할 수 없어 눈물이 내는 길을 따라 걷기만 했다.

 

  터진 눈물은 골목을 넘어 대로를 적시고 사직운동장을 뒤덮은 함성마저 삼켜버렸다. 세상은 아득한 물 속 같았다. 그 깊은 곳을 헤매다 집으로 돌아와 잠을 청하여도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잠을 자는 중에도 눈물이 흘러 아내가 수건을 들고 곁을 떠나지 못했다.


  수 개월이 흘렀다. 그날도 사직운동장을 몇 바퀴나 돌며 앞을 가린 눈물로 사람들에게 부끄러움조차 느낄 수 없을 지경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정수리를 치는 음성 하나가 번개처럼 떨어졌다. 세상을 삼킬 듯한 고성이었다. “양! 탕! 국!” 생전 처음 들어보는 말, 도대체 ‘양탕국’이 무엇인가? 그날로 온통 책을 뒤지고 사전을 찾고 인터넷 검색을 했지만 양탕국이란 말은 어디에도 없었다. 세상에 없는 말이 내 안에 디밀고 들어와 자릴 잡고 이름을 굳혀가는 사이, 어느 한 역사자료집에서 이 단어를 발견했다. 사막에 떨어진 바늘처럼 눈에 띄지 않는 글귀로 들어앉아 있을 뿐이었다. 그 바늘을 간절히 찾고 있었기에 알아볼 수 있었다. 이제 그것을 들고 오랜 눈물의 나날들을 깁기로 했다.

 

  한 시대의 말(末)은 언제나 혼란스럽듯 조선도 마찬가지였다. 나라 안팎이 그랬다. 탐관오리들의 횡포는 백성의 주린 배를 더욱 뒤틀었고, 흥선대원군과 고종은 쇄국이냐 개방이냐를 두고 생각이 갈렸다. 독일인들이 와서 흥선대원군의 아버지 남연군의 묘를 팠고, 프랑스인들은 외규장각의 도서와 물품들을 훔쳐갔으니 어찌 쉽게 서양문물을 오냐오냐 할 수 있으랴. 문을 닫고 조선인들끼리 똘똘 뭉쳐 사는 것이 평안이라 여겼다.

 

  고종은 생각이 달랐다. 일렁이는 세계화의 물결을 타야만 어떻게든 살아갈 것이라 여겼다. 일본은 강화도에서 자기들 좋은 대로 강제 조약을 썼다. 조선의 앞바다를 관리해주겠다느니, 치외법권을 인정하라느니 우습지도 않은 헛소리에 고종과 민비는 청나라에 마음을 두었다. 때문에 민비는 결국 일본의 칼에 죽어 불태워지는 시해를 당하고 말았다. 고종은 러시아를 택해 신하들의 손에 이끌려 아관파천했다. 양탕국의 역사는 여기서부터다.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에서 지냈다. 모래알 같은 밥을 먹고 후식으로 식혜 대신 커피를 마셨으리라. 그런데 이 커피가 머리를 팽팽 돌게 하고 정신을 번쩍 치켜세우고 눈을 반짝거리게 했으니 두고 온 조선, 백성들, 아버지 흥선대원군, 품이 그리운 민비의 죽음을 커피로 다스렸을까. 러시아산 화려한 잔에 담긴 커피로 시름을 달랬으나 한편, 더더욱 또렷해지는 슬픈 조선이여! 백성들이여!


  일 년의 아관파천 후 고종은 어쩌면 문익점이 붓 뚜껑에 담아온 목화씨처럼 그 소맷부리에 커피콩을 담아왔을까. 그것은 조선의 음식문화에 따라 달이고 절이고 우려서 조선의 탕으로 재개발되었다. 나뭇짐 지고 봇짐 진 백성들, 세금을 만들어 올리느라 고혈을 짜내던 백성들이 주막에 들러 마신 이 해괴망측한 검은 탕국으로 마음을 달랬던 모양이다. 너도나도 이것을 마시기 위해 기를 쓰고 이를 앙 다물고 일을 했다. 검은 빛깔 탕의 붐이 일어났다. 조선의 무를 쑴벙쑴벙 썰어 넣은 여느 탕국이 아닌, 서양에서 들여왔으므로 ‘양, 탕국’이라 이름 했던 모양이다. 그것이 어느 방대한 사료집에 한 단어로 들어앉아 지금의 눈물로 걷던 홍 선생께 발탁되기까지 백 년이 걸렸다.


  홍 선생은 양탕국을 우리나라 대표 음식 중 하나로 자리매김을 했다. 창조는 모방에서 시작된다. 하나님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시고, 사람은 유에서 재창조를 한다. 아관파천 시 마셨던 커피가 ‘양탕국’으로 거듭난 것이다. ‘동양탕국’도 아니고 ‘조선탕국’도 아니고 서양에서 들여온 것을 떳떳하게 인정하고 우리한테 맞는 이름 ‘양탕국’이라 했으니 완연 우리 것이 되었다. 이것을 찾아내고 우리 옷을 입혀 우리만의 독창적 문화로 만든 홍 선생은 애국민이다.

 

  홍 선생이 뿌리내린 차의 시배지 하동은 양탕국의 본거지가 되었다. 외국에서 홍 선생의 지인들이 유기농으로 키운 커피콩과 하동에서 직접 키운 커피콩을 탕기에 넣고 은근한 불로 달여 양탕국을 만든다. 술이나 물과 누룩, 이스트와 설탕을 이용해 삼투압으로 맛을 내는 절임법도 있고, 물에 넣고 오래오래 맛을 토해내길 기다리는 우림법도 있다. 조선의 기법으로 거듭난 커피가 문화재청에 인정을 받고 세계를 향해 나간다. 코카콜라 회장이 세계 모든 사람들의 몸에 콜라가 흐르게 하라고 말한 것처럼, 세계 모든 사람의 몸속에 양탕국이 자릴 잡길 원하는 것은 비단 홍 선생만의 바람이 아니다. 양탕국이 세계 각 문화 공간 카페를 통해 우리민족의 사귐과 어울림의 정(情)문화가 뻗어가길 바란다.

 

  여느 시대를 막론하고 앞서가는 문화를 가진 나라가 선진국이다. 더욱 품격 있는 문화 창조로 세상을 제패하고자 한다. 양탕국, 이 이름을 다시 찾기까지는 백 년 넘게 걸렸으나, 인터넷 시대 요즘은 세계화되기 순식간이다. 이미 ‘양탕국’ 프랜차이즈가 세계 속에 자리를 만들어가고 있다. 우수한 대한(大韓)의 얼이 담긴 차(茶), 양탕국이 들어가는 세계 곳곳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시는 하나님의 선한 혁명이 일어나길 바란다.

 

설성제 집사

태화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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