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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문화/신앙에세이

발자크와 함께

 

  독일에 온 김에 베를린은 한번 들렀다 가야지 싶었다. 함부르크를 떠나기 며칠 전, 우리는 급하게 뜻을 모아 인터넷으로 다음날 아침 6시30분 발 열차표를 예매했다. 


  갑자기 계획한 마지막 여정을 기대하며 새벽길을 나섰다. 초행에서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우리 모습이 긴장한 소부대 같았다. 중앙역에 닿았다. 전광판에는 아직 우리가 탈 베를린 행 열차의 선로번호가 뜨지 않았다. 출발 시간은 점점 가까워지는데, 우리 뒤차들의 번호가 먼저 떠오르기 시작했다. 속수무책 전광판만 뚫어지게 바라보며 안절부절못했다. 출발 십여 분 정도를 남겨두고 빨간 불빛만 깜빡거리던 전광판에 안내 글자가 떴다. 


  ‘6시30분 발 베를린 행 열차 실패!’ 


  우리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햐아! 입이 벌어졌다. 안내소를 찾아갔다. 


  “아임 쏘리!” 


  “아임 쏘리?” 


  그러고는 정오에 출발하는 다음 열차를 타겠냐고 물어왔다. 왜 열차가 갑자기 출발하지 못하는지 따지고 들 언어실력도 부족하지만, 따진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 우리는 모두 고개만 내저으며 허탈에 빠졌다. 꼭두새벽부터 서둘렀던 탓도 있지만 실패한 열차 티켓 환불도 문제였다. 일곱 식구 인적 사항을 모두 독일어로 작성하여 이메일로 보내야 했고, 그 값을 되돌려 받는 데 한 달 정도 소요된다는 것이었다. 

 

  숙소로 돌아가려다 휴식을 좀 취해야겠다싶어 카페를 찾아 나섰다. 이른 아침이라 거리가 한산했다. 써늘한 기운에 어깨가 움츠려 들었다. 아직 문을 연 가게는 보이지 않고 햇살 드는 길을 골라 걷는 우리 모습이 난민 같아 꼴이 말이 아니었다. 길을 헤매다 눈에 띈 곳이 카페 ‘발자크 커피’였다. 아직 손님이 없었지만 카페는 커피 향으로 스며드는 중이었다. 바리스타의 손에 들린 주둥이 긴 주전자에서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것을 보니 긴장이 풀어졌다. 식구들이 한 자리에 모여 앉으려 넓은 2층으로 올라갔다. 따끈한 커피를 탁자위에 놓고 마치 집인 양 소파의자에 몸을 묻었다. 

 

  발자크는 생전 하루 60잔이 넘는 커피를 마셨다고 한다. 카페인의 힘을 빌어 글을 썼다더니 죽어서도 커피를 잊지 못한 모양인지 프랜차이즈 카페를 남겨 그 영혼은 아직 커피를 마시고 있을 지도 모를 일. 발자크는 보이지 않았지만 왠지 나와 약속이나 된 듯 이리로 달려오고 있을 것 같은 상상을 했다. 질 좋은 커피 하나를 고르기 위해 몇날 며칠 커피상가를 돌며 신중하게 골랐다는 그가 어쩌면 지금도 최고의 커피를 찾아 헤매고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그와 함께 커피를 마시면서 매일 16시간씩 글을 썼다는 그의 습작 이야기에 나의 습작 이야기를 곁들일 수 있다면 좋겠다 싶었다. 그토록 유명한 『고리오영감』 이야기도 알고 싶고, 『인간희극』에 나오는 수많은 인물들에 대해서도 직접 듣고 싶었다. 소파에 기댄 식구들이 잠이 들기도 하고 휴대폰을 만지며 놀기도 하는 사이, 나는 발자크를 기다리듯 천천히 커피를 마셨다. 

 

  마침 한 신사가 나타났다. 그는 하필이면 옆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단발머리에 못생겼기 그지없는 발자크와는 달리 큰 키에 양복을 차려입은 멋진 신사였다. 혹시 발자크 씨? 그는 커피를 마시며 먼저 신문을 펼쳐 읽기 시작했다. 꼼꼼하게 오래오래 신문을 읽고 나서는 잡지를 꺼내어 훑어갔다. 그가 나에게 눈길을 주면 눈인사를 해야지 싶었다. 그러나 그는 이제 잡지를 덮더니 노트북을 열었다. 타다닥, 타다닥 타이핑 소리가 났다. 나는 말을 붙이고 싶은 마음이 들끓어 미칠 지경이었다. ‘익스큐즈 미! 이야기 좀 해도 될까요?’ 그러나 이곳 언어를 할 줄 몰라 벙어리 냉가슴만 앓았다. 말은 못해도 그가 타이핑한 글은 대략 알아볼 수 있을 지도 모르는데, 가까이에서 끙끙 애만 태웠다. 

 


  세계적인 문호 발자크에겐 죽도록 사랑하는 여인이 있었다. 안타깝게도 그녀는 유부녀였다. 발자크가 그녀를 바라보며 기다린 시간이 무려 18년, 그 긴 시간을 사랑의 열정으로 글을 썼다. 그녀의 남편이 죽어 드디어 결혼을 했지만 5개월 만에 발자크가 죽고 말았다. 그토록 애호하던 커피 카페인에 놀란 심장 탓이라는 이야기도 있지만 생전 빚더미에 앉아 생계를 위해서도 글을 써야 했으니 사랑과 커피와 글이 그에겐 독이자 약이며, 약이자 독이었다. 

 

  이른 아침 카페에서 하필 내 옆 테이블에 앉아 글을 쓰고 있는 이 발자크 씨도 지금 고뇌에 찼을까. 그가 써내려가는 글은 어떤 내용일까. 눈과 귀를 떼지 못하고 있는데 한 여자가 들어왔다. 그 여자는 발자크 씨 옆에 다소곳이 앉아 커피만 홀짝였다. 그들은 대화하지 않았지만 오랜 다정함이 느껴졌다. 나는 말 한번 붙여보지 못한 데 대한 애달픔도 있지만 그녀에게 불쑥 질투심을 느꼈다. 문호 발자크의 유난히 짧았던 결혼 기간이 머리에 맴맴 떠오르는데 나의 발자크 씨와 여자가 책과 노트북을 주섬주섬 챙겨 일어났다. 어깨를 나란히 하고 웃으며 나무 계단을 타고 내려가는 그들의 뒷모습을 나는 멀뚱히 바라보았다.

 

  여행에서 돌아온 후 한 달쯤 지났다. 잊고 있었던 베를린 행 열차표 값이 환불되었다는 소식이 왔다. 휴대폰 갤러리를 열어보았다. 프랑스 로댕미술관에서 찍은, 코가 참 뭉툭하고 펑퍼짐한 단발머리 발자크가 눈을 부릅뜨고 나를 쳐다보았다. ‘죽도록 사랑하고 죽도록 글을 써라!’

설성제 집사
태화교회
울산의빛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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