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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문화/신앙에세이

사이

석주들이 살고 있는 어둠 속을 걷는다. 어깨 위로 떨어져 내린 물 한 방울에 온몸이 움칫한다. 카르스트지형이 만들어지던 아득한 때부터 이 순간까지 포스토이나 동굴에 돌이 자라고 있다. 위아래에서 스며든 물이 돌의 양식이다. 물속에 든 탄산칼륨을 먹고 종유석과 석순이 석주를 꿈꾸며 자란다.
  

1mm가 자라는 데 일 년이 걸린다고 한다. 항간의 길이를 재는 자로 돌의 시간을 측정하다니, 부질없다. 이미 석주가 되어 옆으로 지경을 넓혀나가는 것들도 있으니 이 동굴의 나이를 계산할 엄두조차 내지 못한다. 종유석과 석순이 만나 석주가 되는 데 걸리는 시간을 사람이 기다리거나 참아낸다는 것은 도무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그저 수만 년의 시간 속을 돌며 숨 한 모금 쉬었다 갈 뿐이다. 스쳐가는 아쉬움에 두 팔을 뻗어 돌들의 시간을 가늠해보지만 애오라지 헛짓이다.
  

햇볕도 바람도 없이 수천수만 년이 흘러야만 만나게 될 종유석과 석순들이 꿈을 꾸는 듯하다. 천장과 바닥에서 긴긴 시간을 지나왔지만, 닿을 듯 말 듯 백지 한 장 차이로 비껴나고 마는 것들 앞에서 숨이 멎을 것 같다. 차라리 본래의 자리로 되돌아 갈 수만 있다면 이 아득한 간극을 없앨 수 있을까. 안타까운 시간과 시간이 서로 비껴나는 틈을 보며 나그네 길을 스쳐갈 뿐인 미약한 인간으로서 할 말을 잃는다.
  

서로 비껴가는 이것을 질서라고 부를까, 섭리라고 할까. 자연이라고 여길까, 차라리 운명이라고 할까. 아니 처연한 아름다움이라고 말해본다. 석주가 되는 것보다 서로 간격을 둔, 그러니까 이제 다시 수만 년의 시간이 흘러도 어쩌면 만나지 못할 그 사이가 어쩌면 영원한 관계라는 것을, 가장 아름답고 멋있는 관계라는 것을, 짧은 생에 집착하며 살아가는 인간은 느낄 수 없는 거리라는 것을 생각한다. 석주가 되지 못한 돌과 돌의 그 아득한 사이에서 나무와 나무의 간격, 한 사람과 한 사람의 사이, 한 발 떨어지거나 혹은 저만치 물러서서 바라보는 저 서늘한 풍경을 그려본다.
  

하루하루가 수백 년 같을 때가 있다. 바닥에서 천장을 올려다보며 자라는 석순이 되어, 천장에서 바닥을 향해 내려다보며 자라는 종유석이 되어 서로 그리워하다가 다가서는 과정은 인간의 시간을 초월해야만 되는 일이다. 시간이란 시곗바늘이 가리키는 숫자가 아니다. 이 나라와 저 나라의 시간, 이 마음과 저 마음의 시간, 지구와 달의 시간이 있듯 돌에게도, 그 돌을 먹여 살리는 물에게도 엄연히 시간이 존재한다. 이 포스토이나 동굴에 와서야 시간은 쫓아가는 것도 아니며 재거나 앞다투어 가는 것도 아니라는 것 깨닫는다.
  

돌들을 어림잡아 석주로 짝지어보다가, 우리 삶의 백 년이 돌의 자로 겨우 10cm만큼이라는 사실에 그만 고개가 숙여진다. 석주가 되지 못한 채 수만 년 동안 제 길을 묵묵히 가고 있는 돌들의 사잇길을 다시 더듬으며 걷는다. 닿았다고 기뻐하거나 닿지 못했다고 슬퍼할 일 아니다. 너와 나, 그 아득한 사이에 물이 스미고 있다.

설성제 집사(태화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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