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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문화/신앙에세이

백마부대에서 만난 하나님(박창도)

 

 꿈도 많고 일도 많고 탈도 많았던 고교시절. 나는 ‘카아네기’의 이생론을 읽고 기독교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리하여 스스로 교회에 나갔다. 그 후 입영하여 2년여의 세월이 흘렀다. 베트남 전쟁이 발발하던 1969년 10월 우리부대는 차출되어 월남으로 가게 되었다. 전쟁만큼이나 치열하고 혹독했던 무더위와 싸우며 하루하루 숨가쁘게 지나가는 와중에서도 나는 주일이면 부대내의 백마교회에 나가 성가대원으로 봉사도 하며 어엿한 신앙인 노릇을 하였다.


  그러다 문득 지금의 신앙생활이 완고한 종가의 종손으로 부딪혀야 할 나의 처지와 가난하고 나약하게만 보였던 예수믿는 사람들에 대한 선입견으로 억지로 이어가던 신앙에 대한 자세가 그만 느슨해지고 말았다.


  찬양대도 한두번 빠지고 급기야 주일예배도 빼먹는 날이 많았다. 어느날 부대안에 화재가 났다 그 일로 나는 얼굴에 온통 화상을 입었고 내얼굴은 흑인처럼 색까맣게 그슬렸다. 불행중 다행히 부대안에 미국의 좋은 의약품의 도움으로 나는 그전보다 더 깨끗한 아니 어린아이 같은 얼굴로 돌아왔다. 너무나도 다행한 일이었다.


  그런데도 나는 이 일이 하나님의 섭리인 줄을 깨닫지 못하였다. 혹독한 더위와 전쟁에 지쳐있던 나에게 어느새 한달후면 귀국이라는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전우들은 저마다 고향을 그리며 선물을 사 모으는 둥 귀국 준비에 열을 올리고 있을즈음 나에게 유혹의 손길이 뻗쳐왔다. 


  당시 나는 무기고의 실탄을 관리하는 업무를 보고 있었는데 어느 선임하사가 실탄을 공급량보다 더 얹어주고 눈감아주면 돈을 주겠다는 제의를 해왔던 것이다. 나는 고향에 계신 부모님 얼굴이 떠올랐다. 그래! 부모님께 드릴 선물을 마련하려면 돈이 필요하지 않는가? 나는 그 제의에 못이기는 척 허며 서명을 해버렸다. 여사부대 선임하사는 그 실탄을 아무데서나 쏘아버리고 남은 탄피를 납작하게 눌러 자신의 귀국 상자에 넣고 한국에와서 팔면 상자당 30만원의 돈을 챙길 수 있다고 했다. 눈을 감아 준 댓가로 내게 미화 50달러를 주었다.


  그런데 그것을 손에 쥔 나는 기쁨보다는 두려움이 앞섰다. 나의 가슴은 방망이질을 해댓다. 나의 양심은 나에게 소리를 쳤다. "야! 이놈아. 평화의 수호자로 이 머나먼 이국땅까지 와서 몇푼의 돈을 위해 그런 짓을 하다니…” 부정하게 싸인을 한 양심의 소리에 나는 견딜수가 없었다. 불안, 공포, 두려움이 나를 엄습해왔다. 평소 드나들던 보안대원들이지만 그들만 보아도 가슴이 철렁 내려앉고 숨이 막혔다.


  며칠을 그렇게 시달렸을까? 어느 이른 새벽 나는 잠을 설치고 야전 참호에서 일어나 조용히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는 두 손을 모았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여 이죄인을 용서하옵소서 ”


  “아버지 앞에서 범죄한 이 두손을 없애는 한이 있더라도 나를 용서하옵소서”

 


  눈물이 빗물처럼 쏟아져 내렸다 침구는 적셔지도록 울면서 기도했다.


  며칠후 1970년 10월 어느 주일 백마24호 작전이 있던날 나는 인생에 지울수 없는 참사를 당했다. 아니 저 물건이 왜 저기에. 아주 위험한 포탄 하나가 내 눈에 들어왔다. 저것을 저 자리에 두면 안돼! 누군가가 사고를 당할 것이 뻔했다. 나는 그것을 치우기 위해 들었다 아뿔싸 중도에 그것이 터져버린 것이다. 


  “웽~ 웽~”


  내 귀에는 알 수 없는 소리만 들렸고 나는 아무 것도 무슨일이 일어났는지도 알 수 없었다. 얼마 후 문득 정신이 들어 보니 나의 두손은 온데간데 없어졌고, 배에는 커다랗게 구멍이 뚫려있었고, 장기는 터져나와 피와 섞여 범벅이 되어 흘러 내리고 있었다. 순간 나의 뇌리를 스쳐지나가는 것은 자하도에서 구걸하고 있는 ‘걸인’의 모습이었다. 


  “아! 내가 그런 사람이 되겠구나. 그렇다면 살아서는 안돼! 안돼! 날 제발 죽여주시오.”


  그렇게 몸부림치다 정신을 잃었다. 그후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눈이 떠졌다. 아래로 정글이 보였고 나의 몸은 헬리콥터에 실려 야전병원으로 이송중이었다. 무더운 월남 날씨탓에 헬리콥터의 문이 열려 있었다.


  나는 이때다 하고 열린문쪽으로 몸을 굴렀다. 떨어지면 모든 고통은 끝이 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나를 지켜보고 문 쪽에 서 있던 흑인병사가 자신의 다리로 나를 재빠르게 막았다. 나는 떨어지지 못했다.


  나는 나의 불구가 된 육신에 절망하며 오로지 죽을 궁리로 하루 하루를 보냈다. 한국으로 이송되어 대구통합병원에 입원치료중이었다. 청십자 의료원 설립자인 ‘최기선’의 간증문을 듣고 나의 하나님을 새롭게 만났다.


  나를 만드시고, 나를 가장 잘 아시며, 나를 주관하시는 하나님께서 나에게 맡기신 일이 있기에 나의 자살기도를 막으시고 나의 생명을 잡고 계신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삶에 대한 절망의 깊은 계곡에서 전상의 고통으로 신음하는 나의 소리를 들으시고 나를 찾아오신 그 분. 가난하고 나약한 사람들의 위안처라고 내가 멸시했던 그 분. 예수 바로 그분이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심을 알게 하셨다.



히브리서 12장 5~8절
5 또 아들들에게 권하는 것 같이 너희에게 권면하신 말씀도 잊었도다 일렀으되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6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가 받아들이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라 하였으니
7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버지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8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친아들이 아니니라


  “들에 핀 이름모를 꽃들 하나도 발에 밟히는 풀 한포기도 세상에 났다가 그냥 가지 않고 다 나의 뜻을 이루며 열매를 맺힌단다. 너는 내 것이다. 내가 너를 만들었어. 네가 해야할 일이 남아 있어.”


  나의 이몸으로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내가 이웃을 위해 타인을 위해 무엇인가 할 일이 있다는 하나님의 잔잔한 음성에 내 마음은 희망으로 차 오르기 시작하였다. 


  나의 생각은 바뀌었고 나는 아버지를 찾았다. 그분은 나를 버리지 않으셨다. 나를 따뜻하게 안아 주셨다. 그때부터 썩어들어가던 나의 살은 치료가 급속도록 빨라지기 시작했고, 눈에 보이게 새살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할렐루야! 6개월간의 병상 생활, 제대 후 두부제조업에 몸 담은지 올해로 46년이 되었다. 언뜻 쉬워보이면서도 다루기가 까다로운 두부. 신선도가 생명인 일일식품. 많은 이웃들의 건강한 식단을 사명으로 여기고 평생외길을 걸어온 나에게 노환과 치매가 찾아왔다. 


  이제는 아버지앞에 설 준비의 시간을 허락하심에 순응하며 집에서 고요히 아내와 요양보호사의 돌봄아래 평안한 휴식을 취하며 하루 한시간 1분 1초마다 감사하며 영광을 아버지께 돌리고 있다.


  아버지 한분만 영광을 받으시기를 원하며 이만 올립니다.


박창도 장로
울산시민교회
(글 정리: 최금옥 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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