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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문화/신앙에세이

자화상

 

  오랜만에 집에 들렀다. 현관에 들어서기가 무섭게 아버지는 내 손을 잡고 안방으로 끌어당겼다. 어린애마냥 환한 웃음을 지으며 장롱에서 액자 하나를 꺼내 보여주었다. 액자 속 사진은 다름 아닌 아버지의 영정사진이었다. 


  조금은 먼 곳에 시선을 두고 입 꼬리가 살짝 올라간 모습이 한참은 젊어보였다. 깊게 패인 주름은 어디로 갔으며 약간 흐려진 눈빛은 또 어찌 이만큼이나 해맑게 처리하였을까. 아버진 마냥 천진한 아이가 처음 사진을 찍었을 때처럼 자랑을 하였는데, 팔십 년 지나오는 사이 사잇길로 끼어들었을 파란한 궤적들은 보이지 않았다. 꼭 그림 같은 사진, 아버지의 영정사진이 아무리 봐도 낯설었다. 


  화가들의 자화상이 떠올랐다. 렘브란트는 많은 자화상을 그렸기로 유명하다. 그는 젊은 시절 맛보았던 영예와 점점 몰락해가는 삶의 흔적을 오롯이 자화상에 남겼다. 진솔하고 절절한 삶이 배인 자신을 스스로 그려봄으로 더더욱 자아의 내면과 인생을 들여다볼 수 있었다. 그래서 말년에는 비로소 신앙으로 회귀할 수 있었던 모양이다. 멕시코 여류화가 프리다 칼로의 자화상 역시 간과할 수 없다. 그녀는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았고, 내가 가장 잘 아는 소재가 나였기에 자화상을 많이 그렸다”고 고백했다. 태어날 때부터 장애를 지닌 데다 열여덟에 사고를 당해 만신창이가 된 그녀는 평생 육신의 고통을 지고 살았다. 게다가 남편 리베라 디에고와 그녀의 여동생의 불륜으로 충격 받은 마음의 고통이 자화상에 고스란히 드러난다. 그녀는 자신의 옷이나 장신구로, 혹은 자연과 동물을 배경삼아 심중을 표현했는데 언제나 상처로 인한 슬픔이 밴 자화상이었다. 


  카메라기법의 하나인지 아니면 포토샵의 기술인지는 모르겠지만 실제와 다르게 보이는 아버지의 사진이 영혼 없는 자화상으로 남겨지는 것 같아 싫었다. 세계적인 화가들의 자화상과 범인(凡人)인 아버지의 사진 한 장을 어찌 비교할 수 있을까만 화가들의 깊은 고뇌와 비애가 스민 자화상처럼 사진 속 내 아버지도 분명 아버지가 걸어오신 궤적이 스며있는 사진으로 남겨지면 좋겠다. 살아온 날들에 대한 회한과 성찰, 그리고 자애가 배인 모습으로 말이다. 지금 아버지는 자신의 영정사진이 젊어 보인다고 자랑하시는 것은 아니다. 미리 준비해놓았다고 알리는 것이라 나는 애꿎은 사진사를 자꾸만 나무란다. 


  훗날, 그날이 되어 친척들과 지인들이 아버지를 들여다볼 때 그동안 보아왔던 아버지의 모습과 이 영정사진이 그들 뇌리 속에서 하나가 될 수 있을까. 나는 아버지를 달래듯 하며 다시 사진을 찍길 원했다. 그러나 아버지는 귀찮다며 발뺌을 하셨다.


  봄 문턱에 들어서자 평생 한 번도 앓아 누운 적 없는 아버지가 수십 일째 감기를 앓았다. 중이염까지 와서 한쪽 귀가 상하고 말았다. 염색 한번 하시지 않던 까만 머릿칼은 이제 물이 빠져 온통 희끗해졌다. 얼마 전에 해 넣은 틀니 때문인지 발음이 어눌해졌지만 세월을 비껴가지 않는 그 모습에 나는 금방 익숙해졌다. 얼굴에 팬 주름과 휘어가는 등과 허리도 이렇게 가까이에서 지켜볼 수 있다니 감사하다. 육류를 별로 좋아하지 않으셨는데 힘을 얻고 싶어 스스로 곰국을 찾는다니 이런 모습도 변해온 아버지이시다. 사진 속 아버지가 아니라 진짜 내 아버지이시다.


  아버지가 마흔 무렵에 지녔던 멋을 잊지 못한다. 그렇다고 세월을 역행할 순 없다. 그때의 미소, 그때의 눈빛이 내 마음에 퇴적되어 있다. 팔십의 인생행로 속에서 쌓인 연륜과 인자함과 부드러움이 가감 없이 담긴 사진이면 좋겠다. 억지로 꾸며낸 젊고 파란 아버지는 내 아버지가 아닌 것 같다.


  아버지를 많이 닮았다는 나는 어떤가. 시인 서정주의 ‘자화상’이 절로 떠오른다. ‘내 아버지는 종이었다’로 시작하는 서정주의 자화상에서 화자는 지나온 세월을 돌아보며 자아를 알아간다. 자신의 삶을 회고하며 자신을 키운 건 팔 할의 바람이었다고 고백한다. 그래도 바람같이 떠돈 삶을 후회하지 않는다. 아침마다 찬란한 햇빛 속에서 그의 이마엔 시의 이슬이 얹혀있는데 그 이슬 속에는 몇 방울의 피가 섞여있다고 노래한다. 삶의 고통을 시로 이겨냄으로써 정신적 예술적으로 승화한 모습을 보여주는 서정주의 자화상 앞에서 나는 얼마나 문학으로 나를 잘 그려낼 수 있을까하는 생각이 든다. 


  아버지의 지나간 시절이 담긴 사진첩을 들추어 보다가 내 할아버지와 할머니, 아버지와 어머니를 한눈에 볼 수 있었다. 자식이 부모를 쏙 빼다 박아 하나의 상(狀)을 이루어낸 모습들. 지금의 나와 내 아이들뿐 아니라 아직 태어나지 않은 후손들 또한 사진첩 속에서 보는 듯했다. 사람은 유전인자로 자신이 만들어지고 주어진 환경으로 자신을 다듬어간다지. 그 삶이 스스로 혹은 타인에 의해서도 다양한 모습으로 그려진다. 아버지의 멋지기만 한 영정사진이 획일화되고 향기 없는 조화처럼 벽에 걸려 자자손손 바라보게 된다면 어떨까. 가느다란 터럭 한 올 한 올, 깊게 패인 주름살 하나까지도 반추하며 그날을 맞이할 아버지, 자식들에게 서슴없는 아버지의 모습이면 충분히 좋겠다. 그 속에는 아버지의 딸인 나도 함께 들어있으니까.

 

설성제 편집위원
태화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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