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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문화/신앙에세이

곤고할 때(김용숙)

 

  귀금속 가게를 할 때다. 물질이 주는 풍요로움으로 되돌아볼 이유를 망각하고 살았다. 두 아들은 건강하게 학업에 충실했고 가게도 원활하게 돌아가서 남부러울 게 없었다. 이런 환경에서 신앙생활은 교회 문턱만 들락거리는 형식에 치우친 행동이었고 종교에 대한 의미보다 가게 운영에 치중했다. 저녁마다 친구들과 모여 자정이 넘도록 고스톱도 쳤다. 남편이 불만을 보일 때마다 내 손님을 만들려면 어울려야 한다는 구실을 대며 나날을 그렇게 보냈다.


  어느 날 남편은 나의 행동이 부질없는 짓이라며 닦달하는 바람에 새벽예배에 참석했다. 설교는 아버지의 뜻을 어기고 집을 나간 아들이 허랑방탕하게 지내다 궁핍하여지자 다시 아버지를 찾는 내용이었다. 나에게 들어보라는 식 설교가 마치 남편과 목사님이 짠 것처럼 느껴져 기분이 나빴다. 점점 남편의 잔소리 부피는 늘어났고 그럴수록 나는 어깃장을 부리며 세상 속으로 달려갔다. 사람들과 어울려 먹고 마시는 즐거움은 꿀처럼 달곰했다.    


  마음에는 즐거움이 넘치는데 밤마다 꿈자리는 뒤숭숭했다. 그때부터 인간의 우매함을 일깨워주듯 고개가 갸우뚱할 일이 일어났다. 열이면 일곱, 여덟 번은 따던 고스톱 판돈이 내 곁을 떠나기 시작했다. 그 시절에 2~3만 원이면 큰 액수였다. 어떻게 해야 딸 수 있을까. 잠자리에 들면 천장에 화투장을 펴고 작전을 세워도 매한가지였다. 하루 잃은 돈이 1주일 부식비가 된다는 걸 알면서도 어리석은 짓은 계속되었다.


  드디어 사달이 났다. 그때 우리 집 구조는 가게, 방, 부엌 순으로 일자형이었다. 부엌에서 밖으로 이어지는 통로가 없어서 가게 문으로 출입했다. 나갈 때는 셔터에 자물통을 채우고, 들어오면 안에서 갈고리를 걸었다. 그날도 늦은 시간까지 잃은 돈을 찾으려고 온 신경을 쏟았더니 허리 굽혀 갈고리 걸 일이 꿈만 같았다. 몇 번이나 망설이다 그냥 들어가 잠자리에 들었다. 변두리 지역이라 가호 수는 많아도 얼굴을 맞대면 다 아는 사이고 십여 년 동안 무탈했기 때문에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다음 날, 눈을 떴을 때 쪽창으로 비치는 가게 분위기가 심상찮았다. 셔터가 내려져 있어서 해가 중천에 있어도 어두컴컴해야 하는데 훤하게 밝았다. 허둥지둥 가게에 발을 내딛는 순간 깜짝 놀랐다. 아니, 정신이 혼미했다는 표현이 적절하리라. 셔터는 반쯤 올라가 있고 진열장 안이 깨끗하게 비어있었다. 밤손님 짓이었다. 결혼생활 15년 동안 모은 재산이 몽땅 사라진 순간이었다.


  허무했다. 미닫이문 하나 사이로 가게와 침실이 있는데 열여섯 자짜리 진열장 속 물건을 모조리 꺼내 가도록 그렇게 모를 수 있단 말인가. 셔터 갈고리를 걸지 않았다는 말을 들은 남편은 어이없는지 물건 찾을 생각은 아예 말라며 교회로 향했다. 나는 둔하고 미련하여 그때까지도 깨닫지 못했다. 남편을 우선순위를 모르는 사람으로 치부하고 경찰서를 향하여 발걸음을 재촉했다.


  경찰들은 검은 가루를 이곳저곳에 뿌리며 지문 채취를 위해 안간힘을 썼다. 가깝게 지낸 사람이 범행할 경우가 많다는데 수상쩍은 행동을 한 사람도 없었다. 경찰들은 잠복근무까지 서며 몇 달 동안 애를 썼지만, 단서는 단 한 가지도 없었다. 그때 알았다. 신의 뜻이라는 것을. 남편이 “찾을 생각은 아예 마라”고 한 말의 참뜻도 알게 되었다.


  다행히 금고는 손대지 않아서 적금 탄 얼마간의 돈은 있었다. 그러나 진열장을 채우기는 턱없이 부족하여 각 대리점에서 외상으로 물건을 대주고 팔리는 대로 갚아주는 조건으로 장사를 시작했다. 생활이 궁핍하니 풀어먹였던 친구들은 매몰차게 돌아섰다. 나의 넋두리를 들어주는 분은 오직 주님밖에 없었다. 아울러 허영은 겉치레에 불과하다고 가르쳐 주시며 덤으로 평안과 행복도 주셨다.


  사회적 거리 두기단계가 격상되어가는 지금이야말로 되돌아보아야 할 절박한 시점이다. 이미 코로나19 대처 능력이 뛰어나다고 각 나라에서 대한민국 방법을 인용하고 있지 않은가. 한 교수는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치료 후에도 남아있는 부작용을 알리며 바이러스의 심각성을 호소하고 있다.  


  의료진들 마음속에 잠재해 있는 천사의 모습도 보았다. 더운 날씨에 겹겹이 가운을 입고 환자를 돌보는 일을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내 일처럼 환자를 돌보다 감염되어 운명한 의사들도 있지 않은가.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아랑곳하지 않는 이들이야말로 되돌아볼 줄 아는 천사가 아닐까. 따뜻한 감사의 편지라도 보내는 일이 우리가 할 일이다.  


  처음보다 지금 더 유의하며 방어벽을 쳐야 한다. 바이러스의 변종과 무증상 출몰로 언제, 어떤 사람에게 전염이 될지 모르는 상황이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미련한 자가 아닌 곤고하기 전에 되돌아볼 줄 아는 지혜로운 사람이 되길 바라는 마음이다.


김용숙
하늘샘교회 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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