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 복무 중에 최전방 휴전선을 지키는 경계 작전에 일 년 간 투입되었다. 산세가 험하기로 유명한 강원도 어느 철책에서 수많은 계단을 오르내리며 사계절을 보냈다. 야간 경계 근무를 마치고 소초 막사로 돌아오던 어느 아침, 저 멀리 안개가 자욱한 풍경을 보면서 여기를 떠나면 무척 그리워질 것만 같았다. 그 풍경을 담아두고 싶었지만, 디지털카메라가 막 공급되기 시작하던 시기라 감히 엄두를 못 내었다. 설령 카메라를 장만하더라도 보안 문제로 실제 찍을 수도 없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 시절, 그 풍경은 점점 더 그립기만 했다.
처음 철책 경계 작전에 투입되었을 때는, 살을 에는 추위로 주위 풍경을 둘러볼 여유가 없었다. 부족한 잠과 적응해 나가야 하는 수많은 일상이 자리 잡고 있었다. 살기 위해 눈을 치우고 또 경계 작전 본연의 임무에 충실하기 위해 여유가 없었다. 총기와 실탄을 들고 철책선 너머 적을 마주하는 일상 자체가 긴장의 연속이었다. 하루하루 어서 이 생활에 적응되길 바랄 뿐이었다.
철책에 투입되고 몇 개월이 지났을 때쯤 봄이 찾아왔다. 주변 풍경은 하루가 다르게 변하고 있었다. 봄의 첨병은 무서울 만큼 빠르게 우리 곁을 지나갔다. 분명 군의 경계 작전엔 빈틈이 없었지만 계절의 첨병은 이미 우리 곁을 샅샅이 훑고 지나갔다. 쌓였던 눈이 녹기 시작하면서 푸른 산하가 눈에 들어왔다. 도시에서는 볼 수 없었던 수많은 잡초와 꽃들이 우리를 반겨 주었다. 어느 광고나 사진전에서나 볼 법한 꽃망울이 거친 군화의 이동을 잠시 멈추게 하고 향기에 취하게도 했다.
봄볕에 푸른 물결로 아우성치는 언덕의 울림을 보았다. 겨울 동안 시리고 아팠던 사연을 다 떨어내고 향긋한 봄 내음과 더불어 설렘과 따뜻함이 스며드는 것 같았다. 그 포근함을 부여잡고 오래 간직하고 싶었다. 그 부드러운 속삭임을 가슴에 새기며 살 수 있었다. 우뚝 솟은 나무의 깊은 자국을 따라 오랜 세월 흘러온 수많은 사연을 묵묵히 듣고 싶었던 하루도 있었다.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기 시작하던 때는 이른 아침의 안개로 인해 구름 위에 있는 신선의 마음을 가져볼 수 있었다. 주야로 수백 개의 계단을 오르내리며 흘리던 땀방울이 거친 숨을 몰아쉬게 했어도 아침마다 맞이하는 풍경은 깊은 위로와 응원이 되었다. 하늘과 가까워 먹구름이 거세게 충돌하는 풍경을 맞이할 때면 한낱 사람의 존재가 얼마나 나약한지를 다시 생각하게 됐다.
장마철 퍼붓는 빗물은 계곡 사이를 지나 홍수처럼 흘러내리기도 하고 차량과 병력들이 다니던 길을 삼켜 버리기도 했다. 무서운 일상 속에 하루하루 평범한 듯 살아갈 수 있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새삼 깨닫기도 했다.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긍휼하심이 절로 느껴지기도 했다. 소나기로 인한 불편함과 걱정도 컸지만 이 절명의 상황 속에 무사히 살아가는 것에 그저 감사할 수밖에 없었다. 여린 마음으로 그저 하늘을 바라고 언젠가 따사롭게 맞이할 하늘을 간절히 아주 간절히 바랐던 날들도 있었다.
가을에는 하루하루 습격을 당하는 기분이었다. 자고 일어나면 그토록 푸르던 주변 수풀이 여기 저기 붉게 변해 있었다. 높은 하늘 바라보며, 맑은 하늘에 구름을 그리고 어두운 시간에 별빛을 담으며 시원한 바람을 맞이할 수 있었다. 계곡마다 뿌려지던 땀방울 덕분에, 보다 시원한 바람맞으며 씩씩하게 철책을 지켰다. 군화마다 쌓인 먼지 속에 이러한 자유와 평화, 풍경, 이 모든 것을 만들어 가는 우리가 자랑스러웠다.
겨울은 눈부시게 화려했다. 우리가 있던 곳은 주변보다 높은 곳이었다. 가장 높은 곳에서 사방을 둘러보면 온 세상이 빈틈없이 흰색으로 덮여 있었다. 그 화려함에 눈을 가려야할 만큼 눈부셨다. 날마다 이어지는 폭설로 화사한 옷을 차려입은 산하를 보았다. 겨울을 닮아 앙상하기 그지없는 가지 위로 소복하게 쌓인 그 향연이 너무나 즐거운 날들이었다. 날이 저물어 고요함을 자랑하는 대지 위에 서서 싸늘한 바람보다 더 맑은 마음으로 하늘을 바랄 수 있었다. 어두운 그림자마저 하얗게 감싸는 풍경처럼 숨길 것 없이 밝은 마음을 꿈꾸기도 했다.
돌이켜 보면 모두 하나님의 은혜다. 철책의 일상은 평범하지 않다. 자는 시간과 일어나는 시간이 매일 다르다. 누군가를 죽이거나 죽을 수 있는 무기와 탄약을 늘 소지하고 다닌다. 손만 뻗어 누르기만 하면 주변을 모두 날려버릴 수 있는 장치도 설치되어 있다. 심하게 다치거나 죽지 않고 임무를 마친 것만 해도 감사할 일이다.
철책의 사계절은 분명 특별한 시간과 경험이었음은 틀림없다. 하지만 평범한 듯 살아가는 우리 일상도 모두 특별한 것이다. 사월 초에 회사 주변을 둘러보면 여기 저기 벚꽃이 만개한다. 아파트 주변에도 개나리가 금빛 물결을 안겨준다. 우리가 미처 돌아보고 기억하지 못할 뿐, 변함이 없으신 하나님의 성실하심은 늘 동일하다. 우리 모두의 일상이 특별하다. 나도 당신도 모두 특별하다.
안상후 장로
청도 송금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