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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문화/신앙에세이

디딤돌

  새끼줄로 얼기설기 엮은 초가지붕 처마 밑에는 디딤돌이 놓여있었다. 그것은 봉당과 마당 사이에 있는 평평한 돌로 뜰을 오르내릴 때 디디라고 어머니가 나를 위해 가져다 놓았다. 봉당이 낮아 가족들은 마당으로 바로 올라서고 내려섰지만, 다리에 장애가 있는 나는 그렇지 못했다. 어머니는 그것을 늘 깨끗하게 닦아 놓으셨다. 


  그 디딤돌은 내가 세상 구경을 하고 싶을 때 스스로 내려갈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마당 가장자리 담장 밑 화단에서 수런대는 꽃들을 가까이 보고 싶을 때나 친구들이 뛰어다니며 노는 모습을 보고 싶을 때 그것을 유용하게 사용했다. 엉덩이를 바깥쪽으로 향하고 다리를 곧추세워 디딤돌에 발을 디딘 다음 마당으로 내려섰다.  


  그런 모습을 지켜보던 어머니는 내가 잘 걸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으셨던 모양이다.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짚고 다니는 지팡이만 한 작대기를 디딤돌 옆에 가져다 놓았다. 처음에는 휘청거려 잘 걷지 못했지만, 그래도 어머니는 엄지손가락을 세워 보이며 칭찬해 주면서 내가 걸을 수 있도록 응원해주셨다. 지팡이에 의존해서 이제 갓 걸음마를 배우는 아기처럼 한 걸음씩 연습을 거듭하여 세상을 향해 나아갈 준비를 했다. 


  몇 달 후 나의 걷는 모습을 보신 어머니는 전에 없던 잔심부름을 시키기 시작했다. 한 줌밖에 되지 않는 쓰레기를 대문 밖 두엄 밭에 버리고 오라, 외양간 옆에 있는 호미를 가져오라, 뒤란에 있는 새끼줄을 가져오라, 귀찮을 정도로 쉴 틈을 주지 않고 계속 심부름을 시켰다. 그때는 힘든 마음을 헤아리지 않는 어머니가 미워서 투정을 부리기도 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난 뒤에서야 나의 다리에 힘이 실리도록 단련시키기 위한 계획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어머니는 당신의 딸이 학교에 갈 정도로 잘 걷는다고 느꼈던지 학교에 입학 신청서를 냈다. 그리고 더욱더 운동하도록 독려했다. 내가 아침에 일어나면 아랫마을을 지나 산모롱이를 돌고 뽕나무밭을 돌아 담배 밭을 거쳐 오고 나서야 아침밥을 먹을 수 있었다. 나도 사실 친구들이 학교 다니는 모습을 볼 때마다 무척 부러웠기 때문에 어머니가 시키는 대로 열심히 했다.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처음에는 아버지께서 커다란 짐받이가 달린 자전거로 태워주셨다. 그러나 호사는 그것으로 끝이었다. 농번기가 되자 어머니는 아버지가 바빠서 자전거를 태워주지 못하니 중고등학교에 다니는 언니 오빠를 따라서 같이 나서라고 하셨다. 새벽밥을 먹고 집을 나서야 했다. 


  시골길은 지금같이 포장된 길이 아니라 걷기가 몹시 불편했다. 여름에 소낙비가 퍼붓고 나면 자갈돌이 널브러진 길을 걸어서 신작로에 도착해도 신작로 역시 비포장도로라서 힘든 건 매한가지였다. 맑은 날은 차가 지나갈 때마다 뿌연 먼지를 남겨서 숨쉬기가 힘들었고 비가 오면 파인 웅덩이를 지나는 차들 때문에 흙탕물 세례를 받았다. 


  그러나 나의 처지가 어떻든 간에 지각을 면하기 위해서 열심히 걸어야 했다. 환경을 탓한다든가 주위를 바라볼 여유가 없었다. 새벽밥을 먹고 남들보다 열심히 걸었다고 생각했는데도 친구들은 나를 앞질러 가더니 나중에는 내 뒤에 오는 친구들이 없어서 가슴 졸일 때가 많았다. 지금도 가끔 지각하는 꿈을 꾸는 것을 보면 그때 그 영향 때문인 것 같다.  


  육 년 동안 초등학교를 오가던 걸음걸음들이 헛되지 않았다. 중고등학교에 다닐 수 있도록 다리에 힘을 실어주는 밑거름이 되었다. 언덕바지에 자리 잡은 학교를 거뜬히 오갈 수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때 기른 인내심은 살아오면서 무엇이든 시작하면 중도에 끈을 놓지 않는 마음을 길러주었다.  


  내가 세상에서 자립할 수 있도록 이끌어준 어머니, 때로는 인자하게 때로는 호랑이처럼, 어머니는 세상과 나 사이에서 내가 세상으로 조금이라도 편히 가도록 이어준 디딤돌이었다. 그때 엄하게 하지 않았다면 지금의 내가 존재하지 못했을 것이다. 어머니는 치매 때문에 정신이 오락가락하면서도 디딤돌을 옮기지 못하게 말리셨단다. 디딤돌을 바라보면서 막내딸을 보듯이 평생을 가슴 아파하셨을 것을 생각하니 마음 한구석이 저려온다. 


  올 가을에는 고향 앞산에 묻혀있는 어머니를 뵈러 가야겠다. 그곳에서 어머니처럼 붙박이로 고향 집을 지키고 있을 디딤돌도 한 번 더 보고 싶다. 오늘따라 하늘나라에 계신 어머니가 몹시 그립다.


김용숙 수필가
하늘샘교회 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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