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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세상사는 이야기

검수완박

  5월은 희망이다. 꽃들이 진 거리마다 열매들이 피어나고 산천초목은 여름맞이를 하며 두꺼운 그늘 옷을 차려입는다.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무엇보다도 희망이다. 아이들이 언제나 웃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어른들의 사명이기도 하다. 그 아이들이 어느새 자라 또 다른 아이들의 웃음소리로 전해져야 한다.


  아이들이 마음껏 웃어젖힐 수 있는 가정이 또한 희망이다. 아이들이 다 떠나버린 빈 둥지에서 부모들은 슬픔에 젖을 수밖에 없다. 더 이상 아이들이 돌아오지 않기 때문이다. 자식들마저도 아이들을 돌려주지 않는다. 결혼도 포기하고 출산을 거부한다. 희망이 사라지고 있다. 


  세상이 아이들에게 희망이 되지 못한다. 세상이 가정에 더 깊은 절망을 안겨다 주고 있다. 정치마저도 그 희망을 빼앗아 버리고 있다. 핑크빛 공약이 난무하지만 조금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것도 핏빛이 된다.


  검수완박, 개념 정리가 어렵다. 하도 신조어가 많다 보니 이 또한 유행어가 되어 사라져 버릴 말인 것 같기도 한데, 사람들은 자기 이해에 따라 열불을 달리하고 있다.


  그동안 누군가는 검찰에 어지간히도 당해왔나 보다. 칼자루를 쥐고 있는 동안 마무리해야겠다는 것이 공약처럼 쉽지는 않은가 보다. 검찰 개혁이라는데, 시작은 그럴듯하지만, 검사 영감들이 가지고 있는 칼자루를 빼앗아 버리겠다는 뜻이란다. 검찰 수사권을 완전히 박탈하고 기소권만 겨우 유지하는 것이라고 하는데, 조그마한 법적 상식만 가지고 있어도 어딘가 찜찜하다. 꼭 그렇게 하셔야 하는지, 도통 이해가 빨리 되지 않는다.


  “사람이 먼저다.”라고 일성을 토해내셨던 첫 시간부터 마칠 종이 울릴 때를 기다리고 있는데, “내 사람이 먼저다.”라고 종소리가 크게 울리는 듯하다. 칼잡이들의 날 선 칼날에 얼마나 많은 시민이 피를 흘려야 할까? 내 사람이 먼저이긴 한대, 그것이 티 나게 드러난다면 결국 그 칼끝이 누구에게 향할지는 뻔하다.


  칼의 손잡이를 잡고 있다고 해서 위험을 없앨 수는 없다. 칼끝은 언제나 방향을 가르쳐 주고 있다. 칼날은 아무리 무디어도 칼날에 피를 볼 수 있는 것이다. 지금 칼 손잡이를 잡고 있다고 해서 함부로 휘두르다 보면 자기 생각보다 더 빠르게 칼끝을 잡아야 한다.


 역사의 수레바퀴 속에서 정치는 언제나 부메랑이었다. 부메랑은 호주 원주민들이 사냥감을 찾아내기 위한 것이었단다. 최소한의 가족 먹거리를 위해 수풀 위로 힘껏 던져야 한다. 아이들의 웃음소리를 듣기 위해 가장인 아버지가 그렇게 하셨기 때문에 아들 또한 그렇게 한다. 아버지와 아들과 아이들이 떠들며 맘껏 웃어젖힐 수 있는 그런 희망을 찾고 싶다. 검수완박이 그런 희망일 수 있을까? 아니면 그 칼날에 목숨을 내걸어야 할까? 대수롭지 않을 것 같기도 한데, 심각해지는 것은 왜일까? 법의 문턱을 드나들던 상식이 못마땅해한다. 


  5월은 희망이다. 5월은 푸르르다. 아이들에게 웃음을 되돌려 주고 싶다.

 

진영식 목사

소리침례교회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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