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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세상사는 이야기

라떼의 눈물


  눈물을 화학적으로 분석해 본 결과들은 때와 상황에 따라 다르다는 것이다. 아이, 어른,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눈물을 흘린다. 눈물의 종류도 제각각이다. 기쁨, 슬픔, 두려움, 절망, 아픔, 감사, 회개, 후회……, 수없이 많은 경우에 눈물을 흘리게 된다, 눈물이 마를 때도 있다. 더러는 인공 눈물을 눈에 넣어야 하는 경우도 많다. 어찌 되었든 눈물이 있다는 것은 살아 있다는 뜻이고 아직은 희망이 있다는 말이다. 이참에 눈물 한 번 흘려보고, 눈물 펑펑 쏟아내고, 눈물을 닦아주기도 하고, 흐르는 눈물을 옷깃으로라도 닦아 내렸으면 좋겠다.


  나는 눈물을 좋아하지만, 우는 것은 싫다. 이것은 아무런 의미 없는 눈물이 싫다는 뜻이다. 나름대로는 뜻이 있을 테지만 내 눈에는 쓸데없는 눈물, 흘려서는 안 될 눈물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나는 눈물을 정말 좋아한다. 눈물만큼 가능성이 있고, 희망이 있다는 뜻이다. 가치 있고 의미 있는 눈물 한 방울은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이라고 믿는 탓이다.


  아이들이 말뜻도 제대로 알아들을 수 없을 때부터 눈물에 대하여 억지를 부렸다. 실컷 울어 젖히도록 해 줘야 하는데도 오히려 그런 눈물샘을 틀어막은 것이다. 조금은 후회가 되기는 해도 눈물에 대한 고집은 여전하다. 그만큼 눈물이 귀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아주 어릴 적 ‘야학’이라고, 촌 동네 허술한 창고를 세내어 여러 가지를 가르치려고 했던 젊은 선생들이 생각난다. 야학이 끝나고 나면 그 선생들은 강단 한가운데 커다란 태극기를 걸어 놓고 눈물을 흘리며 뭔가를 읊조리고 있었다는 기억이 생생하다. 지금 생각해보면 기독교 이단들이다. 그런데도 그들에게는 간절한 눈물이 있었다.


  대학생 때는 여기저기 친구들이 경찰을 피해 다니면서 ‘학습’이라는 것을 받는다고 했다. 그들에게는 민족 해방, 조국 통일이라는 대명제 앞에서 벌벌 떨며 눈물을 쏟아낸다고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것이 사상이고 이념이다. 사상과 이념 앞에서 집단으로 눈물을 쏟아낼 수 있다는 것이 대단하다. 누군가 한 사람이 울게 되면 그 울음이 바이러스가 되어 집단 눈물이 흥건하게 된다. 거짓과 선동에 눈물이 뭔지도 모르면서 함께 부둥켜안고 울 수 있게 된다.


  교회가 희망이라는 뜻은 세상 어디에도 없는 눈물이 많다는 것이다. 회개의 눈물, 감사의 눈물, 긍휼의 눈물. 모든 눈물이 선하다는 것은 아니다. 눈물샘이 터지게 되면 그만큼 자신의 속내가 후련해지고 뭔가 치유가 일어나기 때문이다. 다윗의 노래에도 “내가 흘린 눈물을 주님의 가죽 부대에 담아 두십시오.(시56:8)”라고 했다. 어쩌면 지금은 교회의 눈물을 주님의 가죽 부대에 가득 채울 때가 아닌가 싶다.


  눈물에 대한 내 고집은 한 고집을 한다. 눈물을 흘려야 할 경우 세 가지는 지금도 분명하다. 첫째, 부모님을 생각하면서 울 것. 둘째, 나라와 민족을 생각하면서 울 것. 셋째, 십자가 앞에서 울 것. 이 세 가지 경우를 제외하고는 그 어떤 경우에도 눈물을 보이지 말아야 한다. 그런데 나 스스로도 어려운 규칙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론은 여전하다.


  김현승 시인의 눈물이라는 시를 가슴 시리도록 읊조린다.


더러는

옥토에 떨어지는 작은 생명이고저……

흠도 티도,

금 가지 않은

나의 전체는 오직 이뿐!

더욱 값진 것으로

드리라 하올 제,

나의 가장 나아종 지닌 것도 오직 이뿐!

아름다운 나무의 꽃이 시듦을 보시고

열매를 맺게 하신 당신은,

나의 웃음을 만드신 후에

새로이 나의 눈물을 지어 주시다.


  나무의 꽃이 시들어 질 때, 그만큼 나이가 들어서 그러한지 눈물이 많아진다. 그 눈물의 열매를 보고 싶다. 내 눈에 단 한 방울 눈물방울이지만 옥토에 떨어지는 작은 생명이 되고 싶은 바람이 간절해지기 때문이다. 내 부모님이 물려준 금수강산, 십자가 아래에서, 조국의 장래를 애타하며 흘리는 눈물이 작은 생명으로 피어날 수 있는 그 날을 위해 이보다 더욱 값진 것으로 드리라 하오시면, 내 눈물을 당신의 눈물 병에 담아내고 싶다.


  3.1절. 조국 해방을 위한 자유 대한민국 만세! 소리가 잊혀지고 있다. 악어의 눈물이 선동하고 있다. 3월 9일. 과연 나와 교회의 눈물은 어디에 떨어져야 할까? 멀지 않은 날에 누군가 나와 교회의 눈물을 기억하며 함께 라떼의 눈물을 이야기하는 전설이 되고 싶다. 아픔과 슬픔, 서러움이 아닌 기쁨과 감사, 희망스런 눈물이고 싶다.

 

진영식 목사

소리침례교회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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