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해 전만 해도 태화강은 죽은 강이 되어 역한 냄새를 피워 올리고 있었다. 지금은 생태하천으로 거듭나게 되고 생물들이 살아 숨 쉬고 있다. 어디론가 숨어버리고 도망친 물고기들이 찾아오고, 1급수에만 산다는 수달마저 눈에 띈다고 한다. 태화강 국가정원으로까지 탈바꿈하는 것을 보면 자연을 자연으로 돌아가게 하는 것이 얼마나 귀한 일이며 이 또한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회복하는 일이기 때문에 더욱 의미가 있다.
아침, 저녁나절에는 태화강 줄기를 따라 걷고 뛰기도 하고, 자전거를 타고 땀을 흘리기도 한다. 공업 도시라는 삭막한 이미지에서 생태 도시, 생태가 살아난 태화강이 더욱 아름답다. 강변으로 다듬어진 길을 따라 걷다 보면 오가는 숨 가쁜 사람들을 대부분 만나게 된다. 아름다운 꽃들이 철마다 달리 피고, 미처 다듬어지지 않는 잡초들이 우거진 것이 정겹다.
사람들은 무엇 때문에 강변을 따라 걷고, 뛰고, 자전거 페달을 부지런히 밟아대야 하는가? 자연을 보는 것보다는 자기 건강을 챙기고자 하는 또 다른 욕망의 열심이다. 자연 속에서 한 부분이 된 자신을 발견할 기회임이 분명한데도, 자기를 전혀 볼 수 없게 된다. 나 또한 또 한 사람의 타인의 대열에서 숨을 가쁘게 몰아쉬어야 편한 것 같다.
내가 태화강변을 걷지 않는 핑계 구실이 분명하다. 내 생각마저도 지배하려는 굳은 신념의 사람들이 무섭다. 내 마음을 훔쳐 가려는 음악들이 가로등 스피커에서 스물네 시간 쉬지 않고 뼛속까지 침략하려 든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알 수 없는 음악에 세뇌당해야 하고, 사람들의 인상 잔뜩 한 표정들에 주눅이 들어야 한다. 내 사상과 이념의 자유를 여지없이 박탈당해야 하는 상실감으로 다시는 아름다운 태화강변을 걷지 않는다.
‘절대다수가 무엇이며, 소수자라는 것 또한 무엇인가? 생태하천 태화강이 물 흐르듯 바다로 이어지는 순리를 생각해 내지 못하는가? 절대 소수인 내 자유를 무참히도 빼앗아가고, 짓밟아도 괜찮은 건가?’를 질문한다.
포괄적 차별금지법에 왜 이런 경우는 한 번도 생각조차 못 하면서 성 소수자에게만 인권이라는 화려한 옷을 입혀야 하는가? 하나님의 창조질서보다도 지극히 인간적인 몇몇의 탐욕을 누군가에 의해서 포장되어야 하는지 질문하고 싶다. 정말 인권을 빙자한다면 비정상을 정상으로, 비상식을 상식으로 돌로 놓는 일에 힘과 마음을 쏟아야 하지 않을까?
지성(?)을 자랑하는 몇몇 정치 잇속이라면, 그것을 사회현상 내지는 절대다수의 긍휼한 감상을 자극하는 것이라면 그런 설득력이야 대단한 감동을 주겠지만, 인간의 본질이라는 면에서, 또한 하나님의 창조질서에서 본다면 뭔가 잘못되어도 한참이나 잘못되었다.
태화강 가로등에 꼽사리 끼어 있는 스피커의 알 수 없는 노래와 음악에 동화되거나 지배당하듯이 싫어도 끝까지 참아내야 한다면, 이같은 소수자의 인권은 누가 보장해 주는가? 한 사람의 불필요한, 전혀 공감이 없는 소리에 불과한 것인가?
나는 지극한 절대 소수자다. 나와 같은 소수자를 위한 차별금지법은 왜 발의되지 않는지 질문한다. 생태하천 태화강에 또다시 악취가 나면 어쩌나? 인간이 마구 내다 버린 오수와 폐기물들이 버려지면 어떻게 될까? 그 강변을 다시 거닐 수 있는지 나는 질문한다.
진영식 목사
소리침례교회 담임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