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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문화/이종인 목사와 이 달의 책

두 나라에 속하여 / 데이비드 반드루넨, <하나님의 두 나라 국민으로 살아가기>

6월이다. 나라사랑이 강조되는 달이기도 하다. 나라수호를 위한 희생을 생각하는 계절. 주변의 열강의 한복판에서 꿋꿋하게 나라를 보존해 온 나라. 자랑스러운 조국. 누군가 말했다. 세계에 3대 강족(强族)이 있다고. 첫째는 유대인. 둘째는 베트남사람들. 그리고 세 번째가 한민족이라고 했다. 모두 수많은 외침에도 건재하고, 폐허와 상실의 고통을 털고 일어선 민족들이다. 피와 땀, 눈물의 희생 탓에 세 민족 모두 민족에 대한 애착이 강렬하다는 공통점이 있다. 
  

대한민국에서 교회를 이루고 살아가는 성도들은 두 나라에 속한 사람들이다. 모든 나라들은 흥망성쇠(興亡盛衰)를 반복한다. 흥할 때가 있는가 하면, 약해지고 몰락하는 때가 반드시 다가온다. 영원했던 지상의 나라는 역사상 존재한 적이 없다. 성도들은 가난하거나 부유하거나, 성장하거나 후퇴하는 나라의 상태와 상관없이 변함없는 영원한 나라, 하나님나라에 속한 사람들이다. 이 땅을 사는 성도들 모두는 두 나라에 속해 있다. 이 땅에 거류민이요 나그네로 살아가는 성도들은 이 땅에 속하여 살아가지만, 동시에 하나님나라에 속한 이중국적(二重國籍)이다.
  

두 나라에 속하여 살아갈 성도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하나님의 백성으로 공교육과 성경교육을 어떻게 조화시켜야 하는 것일까? 성도로서 직업의 선택과 갈등 많은 일터에서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 건가? 반목과 투쟁으로 가득한 정치와 정당문제. 진보와 보수의 갈등 속에서 성도는 어떤 선택을 하고 살아가야 하는 것일까? 성도들은 하나님나라의 논리로 세상을 정복하고, 주변의 문화를 기독교문화로 변화시켜가야 하는 것일까? 아니면 세상의 문화를 반대하고 성도들만의 문화를 형성해야 하는 것일까? 세상 나라 또한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는 것이라면, 성도는 두 나라에 속한 국민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저자는 문제해결을 위해 성경에 매달린다. 첫째 아담과 마지막 아담이신 그리스도를 통해 세상의 창조와 타락, 종말을 내다보고 있다. 또한, 노아언약을 통해서 온 세상국가 모두에게 주신 하나님의 보존언약과 열국의 질서를 설명한다. 이와 달리 아브라함의 언약을 통해서 구속의 나라를 세우심을 성경의 구속사를 따라 풀어낸다. 바벨론 포로 된 타향살이에서 구속받은 성도의 삶을. 구속의 나라에 속한 다니엘과 세 친구가 세상나라의 공직에 머물며 처신했던 예를 들어 두 나라를 사는 방식을 이야기한다. 요셉이 세상국가 이집트에서 총리되었던 점도 마찬가지다.
  

하나님나라의 도래를 선언하셨던 주님. 내 나라는 이 땅에 속하지 않으셨다(요18:36)하셨지만, 동시에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마22:21)하셨다. 주님은 이 땅에서 반(反)문화적, 반국가적으로 살지 않으셨다. 난지 8일 만에 할례를 받으셨고, 절기를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다. 동시에 주님은 이 땅에만 속한 것이 아니라고 하셨다. 천국복음을 전하셨고, 제자들과 택한 무리들을 하나님나라로 들이셨다. 하나님의 왕국백성으로 이 땅 한 복판을 살아가게 하셨다. 주의 몸 된 교회, 하늘에 속한 교회. 하나님나라를 현시(現示)하는 교회는 세상의 정치에 편속될 수 없다.
  

교회에서 우파적 논리를 강조하기 시작하면, 젊은이들을 교회에서 내쫓는 일이 될 것이다. 반대로 진보와 급진을 강조하면 앞선 세대를 포괄하는 보편교회의 모습을 형성하기 어려워질 것이다. 교회는 좌‧우의 이념에. 진보와 보수의 프레임에 기울어져서는 안 된다. 교회는 이 땅 한 복판에 세워져 있으나, 세상에 속하지 않고 하나님께 속했기 때문이다. 교회는 하나님의 복음, 하나님나라의 법에 따라 존속하는 기관이다. 국가정치논리에 경도되는 때로부터 이데올로기의 희생양이 되고, 좌‧우의 정치프레임에 갇히게 될 것이다. 하나님나라를 드러내는 기관인 교회는 국가의 이념에 속할 수 없다. 그 이상이기 때문이다. 독립투사요, 열심당원이었던 시몬과 로마총독부 시절의 세관에 앉았던 관리 마태가 주님 안에서 제자로 함께 묶였다. 좌‧우가 그리스도 안에서 묶이지 못하고, 하나 되지 못한다면 주님을 따르는 교회라고 부르기 부끄럽지 않을까?
  

일반국가는 정의를 외친다. 공의를 구한다. 공평을 요구한다. 이에는 이를, 눈에는 눈을 요구한다. 형평성. 죄에 합당한 형벌이 정의이다. 피해 입힌 만큼 배상하는 일, 일한 만큼 수익을 얻는 일이 정의다. 세상국가는 정의를 요구한다. 그러나 하나님나라의 윤리는 세상의 윤리를 넘어선다. 천국은 평화를 외치고, 용서를 구하며, 사랑을 요구한다. 오른뺨에 왼뺨을 돌려대고, 오리를 십리로 바꾼다. 천국질서를 교회는 받았다. 마태복음 18장의 원리는 회개와 용서의 법. 천국의 법을 보여준다. 일만 달란트 탕감 받은 이가 어긴 법은 사랑의 법이다. 백 데나리온의 빚진 동관을 용서하지 못한 죄다. 천국의 법률은 용서와 사랑이기 때문이다. 
  

햇발이 점점 뜨거워져가는 유월이다. 하나님께 속하며 동시에 이 땅 위를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일어나는 갈등이 어디 한 둘일까? 갈등하고 힘겹게 씨름하며 살아가는 일을 피할 수는 없겠으나, 균형 잡힌 세계관이 없이는 바르게 씨름할 수 없다. 성도답게 바르게 살아가기 위한 분별력을 본서와 함께 다듬고 벼루는 한 달을 보내면 어떨까? 일독을 권해 본다. 

이종인 목사
울산언약교회
울산대학교 외래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