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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문화/이종인 목사와 이 달의 책

혼돈의 시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을 위한 치유 『기독교세계관』

 

 

헤르만 바빙크 『기독교세계관』 (김경필 역/서울:다함, 2020)

 

기독교세계관하면, 우리는 창조, 타락 구속을 떠올린다. 하지만 바빙크의 통합적 방법론은 세계관에서도 여지없이 드러난다. 기독교세계관을 전개함에 있어 당대의 학문논의의 방식으로 변증하며, 기독교 인식론, 존재론, 윤리학을 통해 개혁주의적 세계관의 정당성을 논한다. 책은 3장으로 심플하게 구성되어 있다. 

 

  1장 “사유와 존재”에서 바빙크는 객관적 실재는 우리의 의식으로부터 독립적으로 존재하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시고 계시하는 것이므로 믿음으로부터 출발하지 않으면 결국 회의주의로 미끄러진다 말한다. 쇼펜하우어나 니체 같은 사람들이 빠진 진흙탕이다. 진리를 아는 것은 주체와 객체의 관계에서 출발한다. 하나님의 창조를 믿을 때라야, 우리는 엉뚱한 인식론에 휘말리지 않을 수 있다. 우리가 아는 이유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비롯되고, 창조하신 피조물과 관계하기 때문이다. 성경이 가르치는 인식론은 자기 이성을 이리저리 내밀하게 살피라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창조세계에서 드러내신 것을 알아가는 일이다. 

 

  개념과 직관은 모두 중요하다. 개념 없는 직관은 맹목이 되고, 직관 없는 개념은 공허하기 때문이다. 구름위에 건축물을 올려서야 쓰겠는가. 현상적 세계는 환상에 불과한 것으로 사람의 정신으로 가공해낸 것이기 때문이라 말한다. 우리가 눈으로 보는 사물세계는 무 논리적 의지나, 맹목적 의지, 자연적인 힘에 의해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창조에 의해 존재한다는 점에서 창조교리는 인식론의 전제라 할 수 있다. 믿음의 내용이 믿음 행위에 선행하듯, 인식내용이 인식행위에 선행하는 것이다. 인식 대상은 우리가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만들어 우리에게 드러내셨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근본적인 제일 원인을 찾아가기를 열망하는 본성을 가졌다. 하나의 통합된 시선과 원인을 규명하기를 갈망한다. 다형의 모습으로 다양하게 구성되어 있는 세계를 유기적으로, 하나로 통합시키는 지혜는 하나님의 지혜다. 바빙크는 헤겔과 슐라이어마허의 방법론의 한계를 적시하면서 오직 기독교세계관만이 관념과 경험을 하나로 묶어내는 일관된 세계관이라고 설명한다. 창조와 재창조는 하나님의 행동(경험)이지만, 그 이전에 영원한 작정(관념)이 구체화 된 것이다. 관념으로의 작정과 예정, 경험으로 세계인식과 재창조는 모두 동일하신 하나님으로부터 우리에게 주신 계시로 말미암는다. 

 

  2장 “존재와 생성”에서 바빙크는 존재와 생성, 하나와 여럿, 하나님과 세계의 문제를 논한다. 오직 존재만 있다는 관점과 오직 생성(변화)만 있다는 관점으로 둘 중 하나를 희생시키는 세계관들의 극단의 결과를 나타냈다. 이 사이에서 원자론, 즉 더 이상 나눌 수 없는 작은 입자와 운동으로 구성된다는 이론과 동력적인 세계상으로 역본설(力本說), 즉 모든 자연현상을 힘으로 설명하려는 환원주의적 생각으로 아리스토텔레스나 라이프니츠, 베르그송이 주장한 방식들 모두 환상론으로 미끄러졌고 회의주이에 빠져 실패했다. 

 

  바빙크는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조차 감각과 이념의 세계를 부당하게 대함으로 치우쳤다고 보았고, 세계는 원자론이나 에너지로 환원될 수 없다고 주장하며 유기적 세계관의 필요성을 논한다. 진리는 성경을 통해서라야 주어질 수 있는데, 구분되는 종류와 이름을 따른 다양성 속에서도 하나이며, 하나 됨 속에서도 다양함은 성경적 세계관에서라야 구현된다. 기계론적 세계관이 많은 이들을 매혹시켰으나 편협함을 숨길 수 없다. 기계론적 세계관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신비롭고 놀라운 세계이기 때문이다. 유기적 관점 안에서 기계론적 관점은 역할과 지위를 확보할 수 있다. 이방철학과 종교에서 물질은 부정하고 불온하게 생각했으나, 성경은 물질 역시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것으로 하나님께 대항하는 존재로 보지 않고 통합한다. 정신과 물질이 이원론적으로 분리되어 있지 않은 것이다. 존재와 생성이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다원주의는 피조물간의 구별을 설명한다는 의미에서 유기적 관점 안에서 진실의 영역을 확보한다. 하나님은 초월하시지만 동시에 내재하신다. 

 

  기계론적 세계관에서는 믿음이 들어설 틈이 없다. 허무한 반복만 있고 목적이 상실되어 절망만 남는다. 다윈주의가 발전의 이유를 우연에서 찾고 있다. 도킨즈의 『이기적 유전자』 에서 말하듯, 진화와 발전은 우연에 우연이 철저하게 곱해진 결과이며, 유전자가 사람을 숙주 삼아 진행하는 과정으로 허망하게 설명한다. 오직 기독교세계관만이 목적과 발전을 진실되게 말하고, 미래를 이야기할 수 있다. 유기적 세계관은 철저히 목적론적인데, 발전의 이유는 하나님의 창조와 목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정하신 뜻 가운데 진행되기 때문이다. 세계는 하나의 기계이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뜻에 따라 건축되어가는 유기적 작품인 셈이다. 

 

  3장 “생성과 행동”에서는 기독교윤리학을 다룬다. 진화론에 바탕을 둔 세계관은 도덕과 규범을 포기한다. 상대주의는 상재적인 것 자체를 절대적인 것으로 만듦으로써 모든 권위와 법을 파괴하는 원리를 내장하고 있다. 도덕은 어디에서부터 왔을까? 사람의 양심은 도대체 어디로부터 비롯된 것인가? 하나님의 존재와 하나님의 법, 하나님의 통치를 인정하게 될 때 해결되는 문제이다. 칸트는 하나님과 영혼불멸과 자유의 문제를 불가지의 영역으로 보았는데 실천이성의 영역, 즉 도덕을 위한 요청으로 설명한다. 그는 도덕위에 종교와 신앙을 세우려고 시도했으며, 도덕을 하나님 없이 설명하려고 노력함을 통해 결국 사람을 입법자요, 자율자로 만드는 오류를 범했다. 칸트는 하나님의 대한 불가지론을 주장함으로 도덕의 토대를 인간 스스로 입법자가 되도록 강제했다. 하나님의 존재를 도덕을 위한 요청으로 논함으로 인간의 행위에 대한 보상자로 전락시켰기 때문이다.

 

  바빙크는 윤리에 대한 두 가지 선택지만 있다고 보았다. 첫째는 도덕은 역사진화를 통해 발생했고, 선과 악이 절대적이지 않고 상대적이라고 보았다. 상황에 따라서 얼마든지 선이 되기도 하고, 악이 되기도 하는 주관주의적 방식이다. 둘째는 도덕은 절대적이고 불변적인 입장이다. 역사 속에서가 아니라 초월적이고 형이상학적 성격을 지닌다고 보는 입장이다. 기독교세계관 안에서라야 사유와 존재, 존재와 생성, 생성과 행동이 유기적으로 조화가 된다. 생성과 윤리, 자연과 윤리, 인식론과 윤리학, 머리와 가슴에 조화가 된다고 보았다. 기독교 형이상학의 원리에서 논리학과 자연학, 윤리학이 조화되고, 헤겔의 지성과 슐라이어마허의 신비, 칸트의 윤리가 화목할 수 있다고 말한다. 

 

  칸트와 쇼펜하우어 모두 공통적으로 인간본성의 타락과 근복악에 주목했는데, 단지 인간 저변에 머물지 않고 인간 본성에 있음을 인식했다. 그럼에도 결론은 이율배반적인데, 칸트는 인간의 원죄, 즉 근본악을 이야기하면서도 결론은 정언명령으로 선해야 한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쇼펜하우어도 인간이 의지할 것은 생의 맹목적 의지밖에 없는데, 세계의 고통을 통찰하고 자신의 행위에 놀라 물러서 스스로를 부인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타락과 인간의 전적 무능상태를 알면서도 구원의 길, 순종의 길(윤리)을 열어주는 것은 오직 기독교밖에 없다. 

 

  재미있는 것은 바빙크가 로마교회의 개혁교회 비판의 오류를 지적하고 있는 내용이다. 로마교회는 칸트를 프로테스탄드주의의 대표적인 철학자로 여기면서, 종교개혁의 항의와 개혁적 지향을 인간자율성으로 치부하려는 몰상식을 꼬집고 있다. 개혁과 변화로의 항의는 누구의 이름으로, 무엇에 대항하는 것이냐를 따라 판단되어야 정당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종교개혁은 인문주의와 구분되기 때문이다. 칸트는 루소와 유사한 계몽주의 철학자였지 개혁신학자가 아니었다. 칸트를 루터와 동일시했던 로마교회를 비판하고, 칸트의 일면, 즉 이성의 한계에 대한 적실한 이해를 인정하고 수납하고 있다. 

 

  기독교세계관은 자율성과 자주성에 대해 온 힘을 다해 반대한다. 성경에서 말하는 인간은 자율적 존재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법아래 머물러 있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살도록 지음 받았다. 세계는 맹목적이지 않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목적을 따라 진행되고 발전되어 간다. 진리는 객관적으로 우리로부터 독립적으로 존재한다. 우리는 진리를 향하여야 하고, 온 땅이 주를 아는 지식으로 가득할 때까지 확장해가야 한다. 이것이 바로 종교개혁의 정신이며 일관된 소망이라 할 수 있다. 

 

이종인 목사
울산언약교회 담임
울산대학교 철학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