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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문화/이종인 목사와 이 달의 책

정돈해야 할 삼위일체론

이동영, 『송영의 삼위일체론』 

(서울:새물결플러스,2017)

 

  우리는 모두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고 고백한다. 삼위하나님에 대한 이해는 기독교의 서고 넘어짐의 사활적인 문제이다. 신앙의 대상이신 하나님에 대한 바른 이해의 중요성을 두말해 무엇 하겠는가. 본서는 동방과 서방의 삼위일체론의 방법론적 접근에 대해서 깔끔하게 정돈하고 있고, 불필요한 오해들을 걷어내고 있다. 서방은 일체로 출발해서 삼위로 나아가고, 동방은 삼위에서 출발하여 일체로 나아간다. 서방은 동방이 종속론의 위험에 놓였다 오해했고, 동방은 서방이 양태론의 위험에 노출되었다고 우려했다. 이는 사실 양자택일의 문제가 아니라 상보적으로 바라보아야 할 내용으로 보고 있다. 평가보다 책 내용을 충실하게 요약하는 것이 더 큰 유익이라 판단되는 까닭에 장별로 요약을 시도해 본다. 


  1장 <하나님에 관한 지식의 중요성>에서 신학은 곧 신론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신학의 유일한 과제는 하나님이며, 이는 독점적이라는 점을 분명히 한다. 신학의 어원과 의미를 논하면서, 신학은 “하나님을 향하여 말하는 것”으로 하나님을 향하여 말하고 노래하는 송영이라고 정돈한다. 신론은 곧 삼위일체론이며, 군주적 일신(一神)이 아닌, 삼위일체 하나님, 창세전부터 성부와 성자, 성령 곧 삼위로 계셔 교제가운데 온전한 하나이신 하나님에 대한 것이다. 삼위(tres)가 하나(unitas)이신 하나님이 신학의 유일한 주제이자 독점적 내용이라는 것이다. 이 삼위일체 하나님은 사변적 지식일 수 없으며, 마음과 목숨과 힘을 다하여(눅10:27) 알아가며 높이며 찬양해야 할 송영의 지식이다.


  2장 <신학, 경륜 그리고 세상과 관계하시는 하나님>에서 신학은 결코 3인칭으로 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한다. 하나님을 향하여 객관적이고 가치중립적인 신학자가 아니라 종교학자일 뿐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언제나 2인칭으로 하나님과 관계한다. 하나님을 예배하고 찬양하고 기도하는 분이시다. 하나님을 높이는 이가 신학자라고 말할 수 있다. 동방교부들은 “신학”은 삼위일체론으로 규정하고 그 외 다른 교리들은 삼위하나님의 구원사역을 다루는 “경륜”이라고 구분했다. 오직 삼위일체론만이 신학이라고 본 것인데, 저자는 동방학자들의 경직된 입장에 대해, 신학은 광의의 의미로 인간이 논구할 수 있는 경륜에 대한 부분까지 포함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성경은 사변적인 논리에 관심이 없으며, 그리스철학을 따라 하나님을 형이상학으로 사변화해서는 안된다고 강조한다. 하나님은 사람과 세상과의 관계 속에서 자신이 누구이심을 나타내시며 관계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3장 <구약의 신론과 신약 신론의 강조점의 차이>에서 구약은 하나님의 초월성이 강조되지만, 신약에서는 하나님의 내재성이 강조된다고 말한다. 구약과 신약 모두 하나님의 초월과 내재가 나타나지만, 이 분깃점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에 있다 하겠다. 초대교회 이단인 영지주의가 구약과 신약의 하나님이 다르다고 주장했다. 말시온은 그리스철학의 영향을 따라 육체와 영혼을 극단적으로 분리하고 창조의 신을 데미우르고스(Demiurgos)라고 부르며 심판하는 잔인한 신으로 이야기한다. 구약의 율법은 구약사람들에게만 유효하고 신약시대에는 무효하다는, 구약과 신약의 불연속성에 대한 강조는 율법폐기론을 낳았다. 칼뱅은 당대의 율법폐기론자들이었던 리버틴파(the Libertines)를 비판하며 그들의 기원이 말시온과 마니교에 있다고 보았다.


  4장 <말씀의 신학이냐, 경험의 신학이냐?>에서 객관적 말씀의 신학과 성경의 조명을 통한 경험의 신학은 나뉘어 질 수 없고 함께 가는 것이라고 말한다. 신학 할 때, 말씀과 경험을 극단적으로 말씀과 경험을 분절시켜 양자택일로 몰고 가면 안 된다고 보고 있다. 경험만을 강조하면 신학의 빈곤을, 객관적 말씀만을 강조하여 생동감을 상실해서도 안 된다. 그러나 우선순위는 분명해야 하는데, 모든 경험은 객관적 말씀에 의해 검증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성경을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식하고 우리의 삶 가운데 역사하시는 성령하나님의 조명을 구하고 기도해야 할 것이라고 말한다.


  5장 <하나님을 안다는 것의 의미>에서 성경에서 ‘안다(야다)’의 의미는 사변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주지적 지식이 아니라 인격적 관계에서 획득되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다. 헤르만 바빙크는 성육신 사건을 “하나님의 자기전달”이라고 불렀는데, 하나님의 자기전달로서의 성육신 사건으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교제와 사귐이 가능하게 되었다 말한다. 성자의 강생과 우리와 같은 사람 되심으로 하나님의 영원한 신성이 우리의 육체에 참여하심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영원한 신성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고 말한다. 신앙은 삼위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성령을 통하여 그리스도와 연합함으로 획득되는 하나님에 과한 지식이다. 삼위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교제 속에서 얻어지는 지식이지 주지주의적 방식의 지식과 구별되는 관계적 지식이다. 관계적 지식은 동적이며 참여적인 것으로 ‘도상의 지식’ 또는 ‘나그네의 지식’(scientia viatorum)으로 불린다. 우리는 아직 본향에 이르지 않았기에 고정적이고 교조적인 지식일 수 없기 때문이다.


  6장 <그리스도교의 신론으로서의 삼위일체론>으로 기독교의 신론은 삼위일체론 외에 다른 것일 수 없음을 강조한다. 삼위일체 하나님만이 초월과 동시에 내재하시는 하나님이실 수 있기에 구원의 하나님이 되신다. 하나님의 초월성만 강조하면, 세상 보다 크신 하나님을 설명할 수 있으나 세상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한계를 가지고, 하나님의 내재성만 강조하면 세상보다 작아 우리를 구원하실 수 없게 된다. 삼위일체 하나님만이 초월이시며, 내재하실 수 있음은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통해 증명된다. 저자는 삼위일체 교리에 대한 서방적 이해에 대해 반성적으로 성찰하고 있는데, 왜냐하면 성경에 천착하여 철저히 삼위일체적인 접근보다는 철학적 신의 개념에 따라 초역사적, 무시간적, 정태적 유일자로 접근하는 경향성을 가졌기 때문이다. 그 결과 군주론적 일신론 내지는 일위일체론적으로 오해된 면이 없지 않다. 이를 대변하는 인물이 토마스 아퀴나스로 그의 삼위일체론 논구에는 군주론적 일신론의 그림자가 짙에 드리워 있다.


  초대 교부들은 부동의 일자로 정태적 신 개념을 강조한 것에 대항하여 “태초에 삼위가 있었다”를 강조함으로 신학을 출발한다. 삼위, 즉 성부하나님, 성자하나님, 성령하나님이 계셨다고 천명함으로 부동의 일자로부터 만물이 유출되어 나왔다는 그리스 주류 세계관을 밀어냈다. 하나님의 본질이 사랑이시라면, 하나님은 처음부터 관계적 존재이실 수밖에 없다고 강조한다. 이슬람식의 일신론은 하늘에 있는 고독한 존재이며 전제군주적인 일신의 사랑은 결국 이기적인 자기사랑일 수밖에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사랑의 하나님은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이해로 설명될 수 있다.


  7장 <동방과 서방의 삼위일체론의 이해방식의 차이에 대한 드 레뇽의 통찰>에서 19세기 교부학자였는 데오도르 드 레뇽이 구분한 동방의 삼위일체론 이해와 서방의 삼위일체론 이해방식의 차이를 정돈하고 있다. 서방은 질문은 “한 분 하나님이 어떻게 세 위격들, 즉 성부와 성자와 성령으로 존재할 수 있는가?”를 물었다면, 동방은 “세 위격들, 즉 성부, 성자, 성령이 어떻게 하나가 될 수 있는가?”를 물었다. 얼핏 비슷해 보이는 질문이지만 경우에 따라 전혀 다른 이해가 도출될 위험이 있다. 서방은 한 분 하나님의 ‘본질’로부터 시작해서 ‘삼위’를 설명하려 했다면, 동방은 ‘삼위’ 즉 ‘세 위격들’의 구분으로 시작해 세 위격들의 ‘하나 됨’을 ‘본질’로 파악하고 있다.


  8장 <그리스도교의 정체성을 결정하는 교리로서의 삼위일체론>에서 아타나시우스의 말을 빌려 삼위일체론은 기독교의 정체성과 연관된 사활적 고백으로 강조하고 있다. 삼위일체 교리를 고백하면 기독교이고, 이를 고백하지 않으면 기독교가 아니기에, 삼위일체론은 기독교를 결정하는 교리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예배하는 대상이 삼위일체 하나님이심을 생각하면 정당한 논의이지 않은가. 바빙크는 “하나님의 삼위일체성의 고백과 더불어 전체 그리스도교는 서고 넘어진다”고 말했다. 저자는 삼위일체는 이론이 구성된 뒤에 예배가 진행된 것이 아니라 거꾸로 삼위일체교리가 정교하게 정립되기 이전부터 삼위 하나님을 부르고 예배했음을 강조한다. 예배에서 신학이 나온 것이지, 신학이 예배를 낳지 않았다는 점을 주지하며, 송영의 삼위일체론을 강조한다.


  9장 <삼위일체 신학의 르네상스와 한국교회의 무관심>에서 아우구스티누스와 토마스 아퀴나스로 이어지는 중세신학의 노정 소에서는 초대교회의 구원경험과 구체적인 삶에서 이탈하며 추상적이고 사변적인 형이상학적 논쟁으로 후퇴되었다고 설명한다. 계몽주의의 영향을 따라 칸트의 도덕적 일신론과 슐라이어마허의 경험적 일신론, 아돌프 폰 하르낙에 이르러서는 삼위일체론을 복음과 아무런 상관없는 비본질적 교리로 치부되기에 이르렀다. 계몽주의 사조가 들끓는 한복판에서 거의 유일하게 헤겔은 “하나님이 삼위일체 되신 분임을 모르는 사람은 기독교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것”이라고 강조했고, 불가지론을 주장했던 칸트와 주관적 지식으로 신지식 획들이 가능하다던 슐라이어마허에 대항하여, 성부 하나님을 절대정신으로 성자는 자기 자신을 대상화한 존재이며, 성령은 모든 구분을 통일, 통합하는 것이라고 양태론적 삼위일체론을 주장했다.


  삼위일체교리가 냉대 받던 시절의 한 복판에서 헤르만 바빙크는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고백이 기독교의 서고 넘어짐과 관계한다고 단언했다. 많은 교리 중 일부가 아니라 사활적인 것으로 보았다. 칼 바르트는 바빙크를 인용하여 삼위일체 하나님을 강조했지만 양태론적 위험성에 주의를 요한다. 칼 라너는 서방교회에 만연했던 군주론적 일신론의 경향을 비판하며 초월과 경륜을 분리하지 말고 하나로 보아야 한다는 ‘일치성의 원리’를 주장했다. 삼위일체 르네상스는 위르겐 몰트만과 볼프하르트 판넨베르크, 에버하르튼 윙엘, 이브 콩가르, 발터 카스퍼, 레아노르도 보프와 같은 신학자들로 인해 도래했다. 몰트만과 판넨베르크, 윙엘은 삼위일체의 세 위격들을 구원경륜의 역사 가운데서 파악하라 제안했다. 삼위일체의 르네상스에도 불구하고 이상근은 삼위일체는 ‘이해 불가능성’을 강조했고, 안병무의 경우에는 삼위일체 교리가 무의미하다고 강변했다. 저자는 물론 삼위일체의 신비를 인간 이성으로 온전히 파악하기는 불가능하고, 우리를 넘어선 영역에서는 침묵해야 하나 반지성적이고 몰지각한 입장은 옳지 않다고 말하며, 삼위하나님을 합당하게 예배하기 위해서 올바른 지식을 추구해야 함이 마땅하다 주장한다.


  10장 <삼위일체론과 교의학의 구성문제>에서 토마스 아퀴나스 이래로 신론 구성의 전통에 대해서 반성적으로 성찰하고, 계몽주의 하에서 삼위일체론 서술과 배열의 방식의 문제점을 논하고 있다. 칼뱅의 <기독교강요>에서 삼위일체론적 신학구조로 이상적인 배열을 제시하고 있지만, 제대로 계승되지 못했다고 아쉬워한다. 바빙크는 삼위일체론이 모든 신학의 기반이요 기초라고 보았는데, 저자는 빌프리트 예스트의 시도를 따라 성부론(신론), 성자론(기독론), 성령론을 출발로, 삼위일체론적을 통해 인간론, 구원론, 교회론, 종말론을 다룰 것을 제안하고 있다.


  11장 <삼위일체 교리의 예비와 삼위일체 교리에 대한 양대 이단>에서는 일신론의 양대 이단인 양태론과 종속론을 이야기하고 있다. 양태론적 군주일신론은 서방에서 영향력을 가졌고, 역동적 군주일신론은 동방에서 종속론으로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이해를 왜곡시켰다. 둘 모두가 아주 달라 보이지만, 사실은 같은 뿌리를 가졌는데, 하나님이 오직 한 분이라는 사실에 공통점을 가진다. 삼위일체론을 바르게 이해하기보다 일신론(一神論)이 그 배후라는 것이다. 12장 <동방과 서방의 삼위일체론, 그 이해 방식의 차이>에서 동방은 “세 위격들은 하나다, 한 분이 아니라!”의 접근이라면, 서방은 “하나의 본질을 소유하신 한 분 하나님이 세 위격들로 존재한다!”로 말할 수 있다.


  서방은 동방이 종속론의 위험에 노출되었다고 의심했고, 동방은 서방이 양태론의 위험에 빠졌다고 의심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인간의 영혼의 삼중구조, 즉 “기억”, “지성”, “의지”를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입하여 기억은 성부로, 지성은 성자로, 의지는 성령으로 묘사하여 후대에 ‘심리적 삼위일체론’이라고 비판받았다. 저자는 동방과 서방의 삼위일체 이해방식은 양자택일의 문제라기보다는 상보적으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종속론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페리코레시스적인 이해가 필요하며, 양태론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전유교리, 즉 성부와 창조, 성자와 구속, 성령의 성화와 같은 개별과 독자의 전유성이 확보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본질의 하나 됨을 위해 삼위의 구분을 희생하지 않아야 하며, 삼위의 구별을 위해 본질의 하나 됨을 희생해서도 안되기 때문이다.


  13장 <삼위일체의 내(재)적 구성의 원리에 관한 교리>에서 6장에서 다룬 삼위하나님의 존재방식을 보다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14장 <성부, 성자, 성령은 누구신가?>에서 제 1위격 되시는 성부하나님에 대해서, 제 2위격되시는 성자 하나님에 대해, 제 3위격되시는 성령하나님에 대해 차근차근 설명한다. 성령하나님에 대해 요약하자면, 1) 성령은 아버지와 같이 신성의 원천이 아니다. 2) 성령은 아들과 같이 출생하지 않았다. 3) 성령은 아버지로부터 나오신다. 4) 아버지로부터 성령의 나오심은 아버지와 성령 사이의 독특한 관계로서, 성령을 규정하는 속성이다.


  15장 <나는 사변하느니 차라리 경배하리라!>에서 삼위일체 교리는 책상에서 논하는 형이상학적 관념이 아니라 구원의 경륜과 이로 인한 경험에서 출발한다. 저자는 삼위일체론을 포함한 모든 교리가 교회 공동체의 예배로부터 형성된 것이라고 보고 있다. 그러므로 삼위일체론과 더불어 모든 교리는 예배 가운데 바르게 실천되어야 한다. 16장 <경륜적 삼위일체와 내재적 삼위일체 개념과 그 신학사적 배경>에서 내재적 삼위일체는 내적인 본질의 신비를 묘사하는 삼위일체라면, 경륜적 삼위일체는 창조와 구원 역사 속에서 드러난 삼위일체를 의미한다. 쉽게 요약하면, “자기 자신 속에 계시는 하나님”과 “우리를 위한 하나님”으로 이야기할 수 있다. 종교개혁자들은 경륜적 삼위일체, 즉 ‘밖을 향한 사역’에 대해 관심을 집중했다.


  17장 <경륜적 삼위일체와 내재적 삼위일체의 관계>에서 구별하여 이해하는 것은 타당할 수 있지만 지나친 분리는 옳지 않다고 말한다. 몰트만과 판넨베르크를 위시한 현대신학자들은 이전의 내재와 경륜으로 분절하여 이해한 것에 대해 플라톤적 이원론이라 비판했는데, 이들의 주장또한 비판적으로 걸러 수용해야 한다. 왜냐하면 내재적 삼위일체를 경륜적인 부분으로 환원시킬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비록 인식론적 관점에서 경륜적 삼위일체가 내재적 삼위일체를 앞서지만, 내재적 삼위일체는 경륜적 삼위일체의 존재기반이라는 것에서 상보적이라 할 수 있다. 존 프레임(John M. Frame)은 “존재론적 삼위일체는 창조를 떠나서도 존재하는 그 자체이며, 경륜적 삼위일체는 창조세계와의 관계 안에 있는 삼위일체”라고 요약한다. 우리는 성경을 따라 내재적 삼위일체와 경륜적 삼위일체를 구분하되 분리해서는 안 될 것이다. 저자는 “내재적 삼위일체는 경륜적 삼위일체보다 더 크고, 더 깊고, 더 넓고, 더욱더 부요하다”로 표현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마지막 18장 <하나님의 삼위일체성은 우리의 참다운 사회적 프로그램인가?>에서 인간사회가 하나님의 내재적 삼위일체를 삶에 온전히 반영할 수 없지만, 교회 공동체와 사회가 삼위일체 하나님의 삶을 반영해야 하는 것을 당위이자 의무라고 할 수 있다. 단지 인간적인 이상사회 건설을 위한 프로그램으로써는 오류와 문제발생을 불러올 수 있다고 경고한다. 삼위일체적 삶의 실천을 긍정하되, 유비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몰트만이나 보프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것이 문제이지, 삼위일체 하나님을 삶에 반영하는 것은 의무라 할 것이다. 다양성은 분열이 되지 않고, 일치성이 획일화 되지 않는 유일한 길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이해하고 실천하는 삶이 아니겠는가. 삼위일체론에 대한 속 시원한 책이다. 강력 추천한다.



이종인 목사
울산언약교회 담임
울산대학교 철학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