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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문화/이종인 목사와 이 달의 책

알베르 카뮈의 『페스트』를 읽고

 

  모든 사람들은 사망이라는 근본적인 페스트를 앓고 있다. 사망의 영향 아래에서 세상의 구조적 한계, 개인과 공동체의 능력의 한계, 자신을 향해 치우친 본성으로 인해, 우리는 서로 질병을 주고받기도 하고, 스스로 질병이 되어버리기도 한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페스트는 어떤 면으로는 항상 우리에게 머물러 있는 사망이기도 하고, 어떤 면으로는 그 사망의 증상으로 나타나는 질병이기도 하다.


  살아온 날들을 돌아보면 내 사랑하는 이들은 언제나 페스트로 신음하고 있었다. 그들이 앓았던 페스트는 때로는 가난이었으며, 때로는 불화였으며, 때로는 자기애(여기에서 기인한 자기혐오든, 교만이든지 간에)였고, 가끔은 좌절해버린 선의거나, 반대로 과도하게 충족되어버린 선의이기도 했다. 어머니로 물려받은 유전자였을까, 아니면 어머니의 교육 때문이었을까. 꽤 어린 시절부터 내 삶은 그들을 향해 내던져졌고, 결과는 대체로 절망적이었다. 결국 나도 감염자였을 뿐이었다. 성인이 된지 한참이지만, 나는 여전히 아버지를 피해서, 동생을 들쳐업은 어머니와 함께 야반도주 하던 유치원 시절과 동일한 한계에 머물러 있다. 다만 그때의 페스트가 주로 아버지의 모습이었다면, 지금은 다른 꼴을 하고 있을 뿐이다.


  내 삶을 찾아온 페스트에 대한 반항은 의미가 있었을까? 그럴 수도, 아닐 수도 있다. 늦은 새벽 호기롭게 “내가 엄마랑 강희를 지켜줄게”라고 말하며 앞장섰던 그 꼬마가, 어쩌면 중증의 페스트에 시달리던 어머니를 다시 살게 했을 수도 있기에, 비록 한시적이나마 의미가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미약하디 미약했던 세 사람의 그때 그 순간에서 시선을 거두고, 몇 발자국 떨어져서 보다 멀찍이에서 지켜보면, 비록 과거보다는 경증이지만 우리 식구들은 언제나, 그리고 여전히 페스트 속에서 살고 있음을 보게 된다.


  우리 모두가 그렇다. 우리 삶에 찾아오는 페스트의 모습은 다양하고, 대응하는 방식 또한 제각각이지만, 페스트가 결코 완전히 물러가지 않으며 언제나 따라다닌다는 점에서 우리는 같다. 페스트가 창궐한 상황 속에서 묵묵히 자기 역할을 감당했던 이가 아내를 잃기도 하고, 한 평생 투쟁했던 이가 이제 겨우 한숨 돌릴 즈음에 목숨을 잃기도 한다. 한참을 도망가다가 뒤늦게 참전한 사람이 의외로 행복을 얻기도 하고, 병세가 깊어 위독하던 사람이 소생하기도 한다. 이처럼 어느 한 시점에 주목하면, 누군가는 페스트로 인해 잃어버리고, 누군가는 지켜낸다. 하지만 렌즈의 초점을 인생의 순간이 아니라, 광각으로 돌려 큰 그림을 살펴보면, 내 삶에서 그러했듯이, 우리의 삶에도, 소설 속 인생에도 "페스트균은 결코 죽거나 사라지지 않으며" 머물러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극적이었던 그랑의 회복은, 나사로의 부활처럼 그림자일 뿐이다. 우리 주변엔 그랑처럼 기적적으로 소생한 사람들이 있지만, 그들의 삶은 엄밀히 말해 여전히 페스트 아래에, 사망 아래에 있다. 다만 유예되었을 뿐이다.


  내가 아니라 너를 사랑함으로 페스트에 저항하는 인물들의 고결함도 그림자일 뿐이다. 물론 그 눈부신 모습들은 분명 신의 편린이며, 고귀하다는 표현이 아깝지 않다. 하지만 결국은 떨어져나온 조각에 불과하기에, 이 또한 언젠가 사그라들 불꽃일 뿐이다.


  그림자는 실체의 윤곽을 담고 있기에 아름답다. 하지만 우리가 그림자를 발견했을 때, 신속히 고개를 들어 실체를 바라보지 않고 언제까지나 그림자에만 시선이 머물러 있다면, 우리에게 손을 내밀었던 진짜 희망은 신기루처럼 사라져버리고 말 것이다. 그림자는 실체로 인해서 존재하기에, 실체를 아는 이에게 그림자는 그것을 누리는 방편이지만, 그렇지 않은 이에게 그림자는 그저 그림자일 뿐이다.


  교회는 신이 유일하다는 고백을 따라, 자연스럽게 신은 자기의 영광을 위한다고 쉽게 단정하기도 한다(물론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새 언약의 빛에서 옛 언약을 살피며, 그것들을 통일된 계시로 바라보면, 신이 자기의 영광을 위한다는 것이 그렇게 단편적으로 이해될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아들의 충만은 그의 신부에게 있기에(엡 1:23), 그는 그녀에게 자신을 내어준다. 아버지는 그렇게 허물어진 아들을 다시 일으키시고 영광스러운 자리로 들어 올리신다. 이처럼 우리의 신은 자기의 영광을 너에게서 발견하며, 내 안에 너를 담으며, 너에게 내가 들어가는 분이시다(페리코레시스). 신을 닮은 모습으로 지어진 사람 역시 그랬다. 우리가 처음 지어졌을 때를 돌아보면 나의 영광은 나에게 있지 않았고 너에게 있었다(창 2:23, 고전 11:7).


  페스트가 창궐한 도시마냥, 사망이 삼켜버린 세상 한 가운데로 들어오신 주님께서는, 세계를 생명으로 되돌리는 방향을 알려주셨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해라.” 이런 주님의 법과 반대로, 결국 우리의 신과 반대로,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집중하는 우리의 모습은 우리가 페스트 아래에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근본적으로 사람은 너를 사랑하며 사는 존재이다. 페스트에 대한 대응, 지금 우리에게 익숙한 코로나에 대한 대응도 별반 다르지 않다. 스멀스멀 기어 올라오는 내 배를 섬기는 욕망이 아니라, 너를 생각하는 것. 이것이 요즘 우리가 실천하는 사회적 거리두기와 무엇이 다르겠나.


  아마 20대 중반이 이르러서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살기 시작하지 않았다면, 지금의 나는 어땠을까 생각해본다. 그림자만으로도 충분한 의미를 발견하며 여전히 정신승리의 반항을 지속하고 있었을까. 알 수 없는 일이다. 확실한 것은 어떤 모양새든지 간에 결국은 페스트에 사그라들며 생명을 잃게 되었으리라.


  그리스도 안에 머물기 전과 후의 나는 겉보기에는 별다른 차이가 없다. 페스트의 영향 아래 신음하고 있는 사랑하는 이들로 인해서 하루하루 피로한 나날을 살고 있는 것은 여전하다(아니, 오히려 더 피로하다. 주님 날 피곤케 하시니). 하지만 결정적인 차이가 있는데, 결국은 페스트가 완전히 끝날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는 점이다. 그 날에 대한 기대는, 단순히 내가 내 배를 섬기는 욕망을 자제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진정으로 너를 섬기고 사랑하는 것을 바랄 수 있도록, 내 근원적인 욕망의 방향이 수정되도록 만든다. 페스트가 종결될 것이라는 선언은, 여전히 페스트가 내 주변을 어슬렁거릴지라도 거기서 자유로울 수 있는 기반이 되어준다. 어떻게 보면 페스트를 향한 나의 반항은 더 이상 반항이 아니라, 비록 미약하지만 진정 자유로운 몸짓이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리외의 어머니의 마음은, 비록 떨어져나가고 일그러진 조각이지만, 사람이 ‘너를 사랑하는’ 신의 형상임을 보여준다. “네가 꼭 돌아올 줄 알고 있으니 기다리는 것쯤은 괜찮다. 그리고 네가 집에 없을 때, 나는 네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생각해본단다.”


  하지만 주께서 다시 오셨을 때 신부의 고백은 이보다 훨씬 더 나을 것이다. 당신께서 다시 오신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조급하지 않았어요. 당신의 말씀은 나를 위로했고, 당신의 손은 나를 돌보았지요. 도저히 높이를 가늠할 수 없는 해일도, 당신 안에서는 작달막한 파도 밖에 될 수 없다는 사실을 보았기에, 나는 자유롭게 사랑할 수 있었어요. 그 무엇도 나를 당신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었답니다.”      

 


이태희 형제
타코야킹(울대후문) 대표
울산언약교회 청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