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세에 대한 묘사의 방향을 설정하는 기념비적인 작품”
“신학과 인문학을 아우르는 역작”
“인간 내면과 정신에 깊이 잠복해 있는 악의 가능성을 탐색해 가는
도전과 시도로 살펴나간다면 유익을 얻게 될 것”
누구나 한 번 즈음은 내세의 모습을 상상해 보았으리라. 고전들 중 다수에서 영혼과 내세에 대해서 이야기를 한다. 그려내는 풍경과 모습들은 저마다 다르지만 명확한 그림을 제시하지는 못했다. 단테의 『신곡』이 나오기 전까지는 말이다. 여러 부분 공감할 순 없어도, 『신곡』은 이후의 내세에 대한 묘사의 방향을 설정하는 기념비적인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저자는 잘 아는 대로 단테 알리기에리(Dante Alighier, 1265-1321)다. 이탈리아의 부요한 도시 피렌체에서 출생했고, 그의 작품은 피렌체의 역사와 깊은 연관을 가지고 있다. 그는 작품을 라틴어가 아니라 이탈리어로 기록해서 일반 소시민들도 널리 읽을 수 있도록 배려했다. 단테는 1300년, 피렌체라는 도시에서 6인의 최고위원으로 선출되면서 권력의 정점에 올랐다. 그러나 2년 후 정적들의 음모에 휘말려 추방되었고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20년간의 망명생활 중에 『신곡』을 집필했다.
사람들은 단테와 베아트리체와의 사랑에 대해 많이 언급한다. 단테가 실제 사랑했던 여인은 1285년에 혼인했던 젬마 도나티가 아니라고 말이다. 사람들은 단테가 젬마와 애정이 없었지만 정치와 경제적 이유로 결혼했다고 생각했다. 단테의 작품 속에는 젬마가 그 어디에서도 등장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신곡』의 내용을 살펴보면 그렇지 않았을 것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베아트리체는 작품의 영감을 위해서 필요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는 젬마와의 가정을 꾸리고 슬하에 네 자녀를 두었다는 사실도 이를 뒷받침한다.
단테의 『신곡』은 인간의 상상력으로 빚어낸 최고의 걸작인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오딧세이아』와 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이스』에 견줄만한 빼어난 서사시이다. 호메로스가 그리스의 문명의 동을 터오게 했다면, 단테는 기울어가는 중세의 노을을 그려낸 시인으로 천 년간의 무거운 침묵을 깨뜨렸다. 『신곡』은 지옥(inferno)편과 연옥편(Purgatorio)편, 천국(Paradaiso)편 모두 3부작으로 구성되어 있다. 「지옥편」은 지옥의 문에서 안내자 베르길리우스를 만나 10단계(고리)로 이루어진 지옥을 여행하며 탐색해 나가는 여정을 그리고 있다. 지옥의 여러 층계들에서 고통당하는 영혼들을 만나고 대화하는 이야기이다. 영혼의 깊음에 빠져 길을 잃어버린 한 인간이 하나님의 아들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게 되는 7일간의 영혼의 순례를 담고 있다.
『신곡』은 하나님의 사랑과 인간에 대한 이해의 다양한 단계를 묘사하고 있다. 「지옥」편은 사랑의 왜곡과 결핍으로 인한 비참한 결과를 보여주며, 「연옥」편은 이 땅에서의 삶과 닮아 있다. 「천국」편은 완전한 사랑을 달성한 사람들의 행복, 지복(至福)을 보여주고 있다. 단테의 『신곡』은 실제보다는 알레고리로 가득하다. 지옥편의 고통을 문자적으로만 읽게 되면 얼마 못가 혐오에 빠지게 되어 감상을 이어기 힘들 것이다. 도리어 인간 내면과 정신에 깊이 잠복해 있는 악의 가능성을 탐색해 가는 도전과 시도로 살펴나간다면 유익을 얻게 될 것이다. 인간 죄성의 추악함에 대한 적절한 묘사들에서 불편하지만 날카로운 통찰력들을 건져낼 수 있다.
길잡이 베르길리우스와 함께하는 「지옥」편은 신앙적이고 교훈적이다. 단테는 중세시대를 살았던 한 사람의 신자로서 당시의 종교적 부패와 도덕적, 정치적으로 패역한 사람들과 사회상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당시 교회는 우상숭배에 깊이 빠져있었고, 성직매매와 교황의 권위를 절대화하는 일들, 거짓 성례가 사람들을 지배하고 있었다. 오랜 세월이 흘렀음에도 교권과 인간의 부패함은 변함이 없다. 단테의 『신곡』은 우리 시대에도 동일한 문제의식과 질문을 던지고 있다.
서양의 서사시는 9가지 요소를 가진다. 플롯 형식, 사건의 핵심 서술(in medias res), 뮤즈에 대한 찬사, 서사적 영웅의 활약, 웅장한 여행담, 신들과의 만남, 보편적 주제, 서사적 목록, 전통적인 운율과 박자 등이다. 『신곡』은 서양서사시의 9가지 요소에 ‘기독교 신앙’이라는 한 가지 요소를 덧붙이고 있다. 『신곡』은 신학과 인문학을 아우르는 역작이다. 정치와 종교, 문학과 철학, 신화와 현실을 모두 놓치지 않고 융합하고 있다. 저자 단테와 여행자 단테가 중첩되듯 현실과 내세가 섞인다. 『신곡』의 속살을 헤집어 가다보면 단테의 인문학적 지식의 방대함에 혀를 내두르게 된다. 플라톤, 토마스 아퀴나스, 역사에 등장했던 왕들과 황제들, 신화적 인물들인 오디세우스, 아킬레우스, 철인(哲人)들과 신학자들, 성경의 인물들이 연결되고 고대와 중세가 어우러진다. 볼프강 괴테는 “인간의 손으로 만든 최고의 작품”이라는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코로나로 인해 사회적 거리두기가 필요한 때, 독서하기 좋은 9월, 베르길리우스와 베아트리체의 안내를 따라 지옥과 연옥, 천국을 여행하는 단테를 따라가 봄이 어떨까.
이종인 목사
울산언약교회 담임
울산대학교 철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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