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년의 짧은 생을 살다 간 천재학자 파스칼. 오동통하게 귀엽게 살이 오를 3세 때 엄마를 잃고 아버지의 손에서 성장해야 했다. 파스칼의 천재성은 어리시절부터 드러났는데, 16세에 『월뿔곡선 시론』을 썼고 19세에는 계산기를 고안해냈으며, 24세에『진공에 관한 새로운 실험』을 출판했다. 1748년에는 『유체의 평형에 관한 대실험담』을 간행하는 등 그의 천재성은 수학과 물리학에서 두드러졌다.
파스칼의 관심은 수학과 물리학에 그치지 않았다. 그의 보다 궁극적이고 깊은 관심은 과학적 문제보다는 인간실존과 신앙의 문제였다. 1651년 아버지가 병으로 세상을 떠나고, 누이 자크린느가 포르 르와이알 수도원의 수녀로 가입했을 때, 그도 역시 수도원의 객원으로 참여했다. 1654년의 깊은 감동 속에 회심을 경험하게 되면서 기독교신앙의 사활적 중요성에 눈을 뜨게 되었고, 예수회의 비난과 몽테뉴를 비롯한 무신론적 허무주의자들의 인생론에 반박하는 생각들을 기술하기 시작했다.
『팡세』에 대한 계획은 1660년 즈음에 시작되었다. 파스칼은 촘촘하고 세밀한 기독교신에 대한 옹호와 제대로 된 변증서로 기획되었다. 그는 신학을 전공한 신학자가 아니었고, 체계적인 철학자도 아니었으나 타고난 문학적 천재성과 과학의 한계를 꿰뚫는 정밀한 논의로 바른 신앙에 대해 성공적으로 변호해내고 있다. 당시의 과학정신과 이성으로 신앙을 싸잡아 비난하는 세태 속에서 기독교 변증론을 또렷하게 제시하고 싶어 했으나, 끝내 원고를 마무리하지 못했다. 1658년 사이클로이드 문제를 풀어 적분법 공식을 발표한 이후 몸이 쇠약해지기 시작했고, 1662년 39세의 일기로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 이 외에도 『사랑의 정념에 관한 변론』과 『드 사시 씨와의 대화』 등이 있다.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와 주권, 예정에 대한 입장을 가진 얀센주의를 공격했던 예수회의 공격에 대한 공개 변호로 『프로뱅시알(시골친구에게 보내는 편지)』를 익명으로 발표하며, 부패한 예수회의 신학과 도덕에 대해 조목조목 반박하고 비판했다. 우리는 성 바돌로매 대학살사건을 잘 알고 있다. 프랑스의 로마 가톨릭 위정자들이 개신교 신앙을 가졌던 위그노들이 학살한 사건으로 프랑스에서 개신교의 뿌리가 뽑혀나가는 수난을 겪었다. 『팡세』에서 예수회의 칼날 같은 공격 속에서도 얀센주의, 즉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와 선택을 믿었던 파스칼의 성경적 변증을 읽어내는 일은 흥미롭다 못해 가슴 벅찬 일이다.
파스칼이 죽고 난 뒤 1,000여 편에 달하는 비망록과 같은 단편이 난잡한 상태로 발견되었다. 1670년 초고들은 포르 르와이알 수도원 친구들의 손을 거치면서 몇 장으로 정돈되어 『파스칼의 사후 그의 유고 중에서 발견된 종교 및 그 밖의 여러 문제에 관한 사상집』이라는 이름의 표제로 출간되었다. 그 뒤로 파스칼의 유고집은 『팡세』라는 이름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오늘날 우리 손에 들려진 『팡세』는 1897년에 출판된 프랑스 슈비크 판으로 14장으로 구분되어 단편의 합본들이다.
“팡세”라는 말은 “생각”이라는 뜻의 프랑스 말이다. 파스칼의 생각들이 『팡세』에 오롯이 담긴 셈이다. 그가 기술하는 방식은 대조의 방식이다. 한편으로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인간의 비참에 대해서, 다른 한편으로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의 행복에 대한 대조방식으로 써내려가고 있다. 파스칼은 먼저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를 탐색한다. 2장 「하나님 없는 인간의 비참함」에서 인간의 비참함을 다루고 있다.
“사실, 자연에서 인간이란 무엇인가? 무한에 비교한 무인가, 혹은 무에 비교한 전체인가, 무와 전체의 중간인가. 인간은 양 극단을 이해할 수 없으므로 사물의 종말과 시원(始原)은 알 수 없는 비밀로 인간에게 감추어져 있다. 인간은 그가 만들어진 무도, 그가 삼키워진 무한도 인지할 수 없다.”
파스칼은 인간을 무한과 허무라는 두 심연 사이에 있는 중간자로 파악하고 있다. 중간자로서 인간은 양 극단을 이해하기에는 한 없이 멀리 떨어져 있기에, 사물의 원리와 궁극적인 것을 알 수 없는 영원한 절망 안에 있고, 광막하기 그지없는 중간에 있기에 늘 정해진 것 없이 떠도는 불안한 존재로 이야기 한다. 교만하기 짝이 없는 허세를 떨지만, 실상 자신의 시작도 마지막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 황망한 존재다. 과거로는 시원을 알지 못하고, 미래로는 종국에 대해 무지한 채로 현 세계에 던져진 존재 말이다.
“인간은 한 줄기 갈대에 지나지 않는다.
자연 중에서 가장 약한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생각하는 갈대다.
그를 쓰러뜨리기 위해
우주 전체가 무장할 필요가 없다.
증기나 한 방울의 물로도
그를 죽이기에 충분하다.
하지만 만일 우리가 그를 쓰러뜨린다 해도
인간은 그를 죽이기보다는 존중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자기가 죽는다는 것과
우주가 자기보다 우세함을 알기 때문이다.”
파스칼은 이 유명한 한 구절로 ‘생각하다’라는 위대한 이성의 힘을 말함과 동시에 ‘한 줄기 갈대’라는 인간 존재의 허무함과 유한성을 예리하게 지적한다. 하지만 생각하는 갈대가 위태로운 한 줄기 갈대라는 것을 잊고, 자기라는 현실적 존재로부터 사고만이 확연히 드러날 때, 그 철학은 용서하기 어려운 것이 된다고 보았다. 파스칼은 “무익하며 불확실한 데카르트”, “나는 데카르트를 용서할 수 없다.”라고 격앙된 표현으로 비판하는데, 오만하게도 모든 출발은 인간, 즉 자신에게서부터 시작하려 들었기 때문이다.
“내 일생의 짧은 기간이, 그 앞과 후의 영원 속에서 하루 동안 스쳐지나가는 손님의 추억으로 이해되고, 내가 차지하고 있는 곳뿐만 아니라 내가 보기에도 작은 이 공간이 내가 모르고 나를 모르는 무한히 넓은 공간 속으로 침잠하고 있음을 곰곰이 생각해 보면, 내가 그곳이 아닌 여기에 있다는 것에 두려움과 놀라움을 느끼게 된다. 왜냐하면 왜 그곳이 아닌 여기, 그 때가 아닌 현재에 있어야만 하는가에 대한 이유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누가 나를 이 점에 두었을까? 누구의 운명과 누구의 조치에 의해 이곳에, 이 시간이 나에게 주어진 것일까?”
그는 인간 실존에 대한 불안한 상태를 표현하고 있다. 개별적인 존재들은 아무런 이유도 없이 지금 이곳에 ‘던져져’ 있다. 불안과 공포를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소위 실존의 피투성에 동반되는 불안으로, ‘이 무한한 공간의 영원한 침묵은 나를 공포에 떨게 한다’라고 말하면서 파스칼은 호소한다. “사람은 자기 자신을 잘 알아야 한다. 그것이 가령 진리를 발견하는 데 도움이 되지 못한다 하더라도, 적어도 자기 생활을 조율하는데에는 도움이 된다. 그리고 이것 이상 정당한 것은 없다.”
파스칼은 개개인이 먼저 자기 자신으로 돌아가서 자신의 존재를 잘 아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인간의 존엄한 사고는 이를 위해 이용되어야 하는 것이지만, 사람들은 자기 자신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보려하지 않는다고 보았다.
“인간에게 있어 완전한 휴식 속에서 아무런 정염도 없고, 일도 없고, 기분 전환도 없으며, 집중하는 일도 없이 가만히 있는 것만큼 참기 힘든 일은 없다. 그러면 허무와 고독, 불안, 종속, 무력, 공허감을 느끼게 된다. 이렇게 되면 급작스럽게 그의 영혼의 심연으로부터 나태, 암흑, 비애, 상심, 울분, 절망이 끓어오르고 말 것이다.”
인간은 고독을 두려워한다. 고독은 우리에게 죽음과 비참함에 대한 생각을 불러일으킴으로써 우리를 절망 속에 빠르기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고독에 대항하지 못하고 고독으로부터 눈을 돌린 채 기분을 달래려 한다. “인간은 죽음과 불행, 무지를 치유할 수 없었기 때문에 행복해지기 위해 그런 것들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고 꼬집는다. 그래서 사람들은 유희나 교제, 도박처럼 기분전환을 위해 거리를 헤매며 살아간다고 이야기 한다.
“우리의 비참함을 위로해 줄 수 있는 단 한 가지 방법은 기분을 달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야말로 우리의 비참함의 최대치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자기 자신에 대해 생각하는 것을 방해하고, 우리를 잘 모르는 사이에 멸망에까지 이르게 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기 때문이다. 기분을 달래는 것은 우리를 즐겁게 함으로써 조금씩 우리를 죽음에까지 이르게 하는 것이다. … 우리가 우리와 같은 동료와 함께 있으면서 편안함을 느끼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그들은 우리처럼 비참하고 우리처럼 무력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결코 우리를 도와주지 않을 것이다. 사람은 혼자서 죽는 것이다.”
파스칼은 인간 개개인을 실존의 마당에 세워 하나님 없는 인간의 비참함을 낱낱이 드러내 밝히고 있다. 그는 이어서 하나님을 믿는 인간의 행복에 대해서 반복해서 논하고 있다. 또한 하나님 없는 불안한 인간실존에 대한 처방으로, 스토아철학의 대안을 비판한다.
“스토아학파 사람들은 말한다. ‘너희들 자신으로 돌아가라. 너희들은 그곳에서 평안을 찾게 될 것이다’라고, 그러나 그것은 진실이 아니다. 다른 사람들은 말한다. ‘밖으로 나가라. 기분전환을 하면서 행복을 찾아라’라고, 그러나 이것도 진실이 아니다. 행복은 우리들 밖에는 물론, 우리들 안에도 없다. 그것은 하나님 가운데, 즉 우리의 밖과 안에 있다.”
파스칼에게 있어 실존이란 하나님에 의해 놓여있는 자기이자, 자기와 관계됨과 동시에 하나님과도 관계된 이중적인 관계로 존재한다. 이 관계가 깨어지게 되면 자기 자신을 잃고 절망에 빠지게 된다고 보았다. 따라서 우리가 참으로 자기 자신이고자 한다면, 하나님과의 존재를 문제 삼지 않을 수 없다고 말한다. “하나님이 있다는 것은 불가해하며, 하나님이 없다는 것도 불가해하다”며 ‘내기’ 또는 ‘도박’의 비유를 들어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 논증한다.
“하나님이 존재하는가, 아니면 존재하지 않는가. 우리는 어느 쪽을 선택해야 할까? 여기에서 이성은 아무것도 결정할 수 없다. 여기에는 우리를 가두는 한없는 혼돈만이 존재할 뿐이다. 이 무한한 거리의 끝에서 내기가 행해지고 패가 결정된다. 당신은 어느 쪽인가에 걸 것이다. 하지만 이성을 따른다면 당신은 그 어느 쪽에도 걸 수 없다. 그리고 이성을 따른다면 둘 중 하나를 무를 수도 없다.”
파스칼은 만약 우리가 하나님이 있다는 쪽에 패를 건다면 영원한 생명과 무한한 행복을 얻을 수 있지만, 하나님이 없다는 쪽에 패를 건다면 지상의 유한한 행복밖에 얻을 수 없다고 말한다. 이득과 손해를 따지자면 하나님이 있다는 패에 거는 것이야말로 이득이라는 것이다. 망설이지 말고 하나님이 계시다는 쪽에 패를 걸라고 설득하고 있다.
“이 하나님은 사랑과 위로의 하나님이다. 하나님을 스스로 받아들인 사람들의 영혼과 마음을 만족케 하는 하나님이다. 그들에게 자신의 비참함과 하나님의 무한한 자비를 내적으로 감지하게 하는 하나님이다. 그들 영혼의 심연에서 그들과 결함함으로써 그들의 영혼이 겸허함과 기쁨, 신뢰로 넘치게 하고, 그들로 인해 하나님 이외의 목적을 가질 수 없도록 하는 하나님이다.”
하나님을 인식하는 것에 대해서는 “하나님을 느끼는 것은 심정이지 이성이 아니며, 신앙이란 그런 것”이라고 말한다. 또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우리는 하나님을 안다’고 이야기 한다. 파스칼은 우리가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중보자요 매개자인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알게 된다고 강조한다. 그리스도를 통해 이성을 초월한 사랑이라는 초자연적 세계에 이른다는 것이다.
“나는 나의 구원자에게 두 손을 내민다. 그는 나 때문에 고통을 당했으며, 또 죽기 위해 지상에 오셨다. 그래서 나는 그와 영원히 함께 할 수 있다는 소망을 가지면서 그의 은혜로 편안한 죽음을 기다린다.”
파스칼은 하나님과 함께하는 인생의 행복을 이렇게 표현하면서, 은혜와 사랑 가운데 편안하게 잠들 수 있었다. 『팡세』는 파스칼의 개인 비망록이지만, 그의 섬세한 정신에 의해 포착된 인간 존재의 문제는 키에르케고르와 함께 실존철학의 원류를 이루게 했다. 14장으로 구성된 각 장 안에 담겨 새겨진 문장들은 파스칼의 사색의 결정체로 영혼을 깊이 울리는 외침이 있다. 영혼과 영생에 대하여 지독하게 가볍게 다루는 우리 세대, 경박한 즐거움으로 소일하며 소확행으로 하나님 없는 인간 실존의 비참을 애써 외면하는 우리의 일상에 무거운 울림을 주는 책이다. 늘 곁에 두고 싶은 몇 안 되는 책들 중 하나이다. 코로나로 힘겨웠던 한 해가 저물어 가는 연말, 『팡세』와 함께 돌아보기를 권한다.
이종인 목사
울산언약교회 담임
울산대학교 철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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