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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문화/이종인 목사와 이 달의 책

하나님을 예배하는 삶

 

 

한국교회가 앓고 있는 가장 뼈아픈 
영지주의 이원론에 대한 꼼꼼한 처방!


  목적지와 방향을 모르는 걸음은 고생을 부른다. 10여 년 전 일이다. 제대로 된 조사도 없이 산을 만만하게 보고 올랐다가 고생한 경험이 있다. 물과 음식을 비롯한 기본적인 준비조차 없어 고생했던 아픈 기억이다. 등산화를 제대로 갖추지 않은 채 바위 많은 관악산에서 혼쭐 난 적도 있다.  짧은 여행에서의 잘못은 바로잡으면 그만이고, 시행착오는 교훈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신앙 노정에서 방향을 잃거나 탈선하게 되면 심한 후유증을 남기는 경우를 여럿 보았다. 신앙은 곧 삶이요, 인생이기에 잘못된 방향은 인생을 좀먹는 무서운 질병이라 하겠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방식, 어떤 방향을 따라 살아야 하는가?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일까?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는 주님을 모르는 사람들과 어떻게 구별된 삶을 드러내어야 할까? 세상이 추구하는 방식과 다른 성경적인 삶의 원리는 무엇일까? 성경에 대한 해박한 지식, 교리에 대한 정돈된 이해를 가진 성도들의 탈선을 보면서 우리는 놀란다. 교회와 일상의 괴리를 보면서 의아함을 가진다.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겠는데, 그 구체적인 원인은 무엇일까? 본서의 저자는 신앙과 삶을 분절시키고, 교회와 일상을 이탈시킨 이원론에 있다고 진단한다. 이원론적 영성으로 멍든 신앙을 치료하지 않고서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해답은 주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저자는 본인에게는 신학 스승이 되는 분이다. 신학 석사과정과 박사과정에 걸쳐 적지 않은 시간을 신학학문을 토론했고, 더불어 소탈하게 삶을 나눈 일은 기억될 즐거움이다. 그의 서재는 적막하듯 학자의 고요한 공기가 흐르는 곳이다. 깔끔한 신사의 품위를 가졌지만 소박하고 정이 많은 분으로 지속적인 교제를 이어오고 있다. 신학이 허공에 머무는 상아탑이 아니라 삶과 조우하고 교회와 삶을 세우는 실제이어야 함을 무던히도 강조하셨던 분이다. 이번 출간된 본서를 읽는 동안 그의 조용한 음성이 들리는 듯 읽혔다. 한국교회가 앓고 있는 가장 뼈아픈 영지주의 이원론에 대한 처방을 꼼꼼하게 써 내려가고 있다. 


  크게 2부로 구성된 본서는 총 18장으로 나누어져 있다. 저자는 영육이원론 치료를 위해 1-15장까지는 성경신학적으로, 16-18장까지는 조직신학적으로 치열하게 분석하고 정돈하여 해설과 대안까지 친절하게 제시하고 있다. 저자는 통전적인 성경적 세계관을 강조한다. “은혜는 자연을 폐하지 않는다.”라고 강조했던 네덜란드 신학자 헤르만 바빙크(Herman Bavinck)의 주장과 “온 세상은 하나님의 무대”라고 말했던 칼뱅의 외침이 그의 글을 타고 면면히 흐르고 있다. 교회도 주님의 것이지만, 세상도 하나님의 통치가 머무는 곳이다. 성경을 똑바로 읽다 보면, 단 한 평의 공간도 하나님의 통치를 벗어나 있는 곳은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저자는 무던히도 교회에 대해 강조한다. 타락한 세상에 하나님의 나라를 증시하며 서 있는 교회는 진정한 의미의 대안 공동체이며, 구별되어 하나님의 통치가 선명하게 드러나는 기관으로 서 있어야 함을 강변한다. 실제적 교회를 벗어난 가나안 성도라는 말은 성립될 수 없는 개념이며, 겸손하게 지역교회에 속하여 돌봄 속에 머물러야 한다.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일이다. 성도들은 교회와 세상을 혼동하지 않아야 한다. 교회는 교회요, 세상은 세상이다. 직무와 역할에 있어 뚜렷한 차이를 가지지 때문이다. 교회에 주신 특별한 은혜와 교회 밖 세상에 주신 일반 은혜에 대해 구별의 시선을 가져야 한다. 


  교회와 세상은 구별된다. 그러나 교회와 세상 모두 하나님께서 다스리는 곳이다. 교회는 교회의 역할을 수행해야 하며, 세상은 세상의 역할, 즉 모든 영역, 자연, 정치, 경제, 사회, 문화, 학문 등등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삶을 성취하며 삶을 살아내야 한다. 영역은 다르지만, 동기와 태도, 목적에 있어서는 주님을 향하여 통일된 하나의 시선을 가져야 한다. 그러므로 성도는 구속받은 교회의 지체로 말씀과 기도, 제의적 예배와 성도의 교제를 누려가야 하며, 동시에 창조 질서를 존중하는 삶을 도모하여 하나님을 모르는 이웃들 속에서 소금의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 


  어떤 이들은 세상에 대해서는 무관심하고 교회에만 집중하면 교회가 부흥하게 될 것이라고 말하지만 실상 그렇지 않다는 것을 역사가 증명한다. 홀로코스트(The Holocaust) 문제에 무관심했던 일로 인해 유럽에서 수많은 젊은이들이 교회를 떠났다. 난국의 상황에서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과 능력을 드러내지 못했던 교회는 사회에서 무의미한 교회로 전락하고 말았다. 당대의 교회가 무관심과 자기만을 챙기는 안일함에 사로잡혀 시대적 고통의 십자가를 짊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세속적인 일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아야 한다는 핑계로, 세상과 일터는 그냥 돈을 벌어 생존하는 곳 정도의 소극적 인식, 오직 기도와 성경 공부, 치유만을 강조함으로 일주일에 한 번 가는 목욕탕처럼 되어서는 안 될 일이다.  


  “마땅한 양육도 없이 그럭저럭 교회의 회중으로 
살다 보니 집사, 권사, 장로가 되었고, 
교회가 무엇인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서 
어느새 유기체성을 상실한 경화된 조직체의 
구성원으로 전락해 버리고 만 것이다. 
성령이 일할 수 있는 충족한 상황을 
만들어 내지 못하는 설교와 교훈이 
한국교회를 만들어내고 사로잡아 지배하는 과정에 
한국교회 5대 교리라는 비극적인 조항으로 축소된 
교회로 전락해 버린 것이다. 
주일성수, 새벽기도, 십일조, 금주, 금연, 
이 다섯 가지 조항만 잘 준수하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여기게 만들었던 것이다.”(65-66)



  Covid-19 상황에서 한국교회는 부활의 복음을 가진 자들로 시대적 십자가를 지고 있는가? 고통과 아픔의 시절에 이웃의 생명을 귀중히 여기고 헌신하는 수고가 없다면, 하나님을 모르는 세상은 교회의 존재 이유에 의문을 표할 것이며, 이율배반의 교회에 실망한 젊은이들의 이탈을 보게 될 것이다. 성도들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로 부름 받았다. 주님은 우리를 피 흘려 구속하신 교회의 지체로만 부르신 것이 아니라 창조하신 세상에서 예배자로 살아가게 하셨다. 저자는 주일의 공적 예배와 삶의 예배가 분리되지 않은 일관된 예배의 삶을 우리에게 요구하셨음을 강조한다. 


  조직신학자인 저자는 창조, 타락, 구속이라는 성경신학적 맥락에 교리적 담론들을 실어 교회적 삶으로 진중하게 풀어내고 있다. 학자의 글이라 다소 어려운 부분들이 없지 않으나 성도답게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명료한 대답들을 담고 있어 귀중하다고 할 것이다. 무엇보다 교회와 정치, 문화, 일터, 문화와 연관하여 어떻게 판단해야 할지 기준이 서지 않는 이들이라면 반드시 들고 곱씹어 읽어야 할 책이다. 영지주의적인 이교적 영성이 교회에서 기승을 부리는 때에 성경적 영성과 세계관을 제시하는 필독서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