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화와 같은 이야기 속에 돌킨과 루이스 모두는 그리스도를 이야기하고 있다.”
험한 여정을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온 주인공 ‘빌보’처럼
본향으로 가는 길은 험난하지만
이전의 빌보가 아닌 지혜와 용기, 겸손으로 나아가길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톨킨의 『호빗』은 루이스의 『나니아 연대기』처럼, 신화(myth)와 현실(reality)에 대한 이야기 모두를 담고 있다. 보이는 세계 이면에 존재할지 모르는 세계를 소개한다. 어쩌면 우리 또한 중간계를 살고 있는 것이 아닐까. 톨킨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옛적 신화시대의 서사시로 가득한 숲을 지나고, 꿈 때문에 팔려갔던 요셉과 험난한 여정 후에 고향으로 돌아오는 야곱의 모험이 중첩된다. 우리 모두는 이야기에 속해 있다. 하나님은 이야기꾼이며, 『창세기』를 비롯하여 요한계시록까지 신화적 이야기로 가득하지 않은가. 거짓 없는 참된 신화, 처녀에게서 나신 예수 그리스도, 죽음의 권세를 깨뜨린 부활, 다시 오실 주님의 이야기는 진실된 신화이지 않은가.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이야기에 속한 사람들이다.
우리는 이야기를 산다. 인생이 다양하듯 이야기와 세계관도 다르다. 같은 세대를 살아도 각자의 여행을 한다. 세상과 인생에 대한 세계관에 따라 사람들은 전혀 다른 삶을 살아간다. 발 딛고 서 있는 이 땅을 기초삼아 유토피아의 마천루를 쌓아올리는 인생이 있는가 하면, 하늘을 기반 삼아 나그네로 이 땅을 살아가는 이들도 있다. 인생을 멀고 긴 여정으로 보는 이가 있노라면, 촌각이요 경점에 불과하다 여기는 이들이 있다.
『호빗』은 세기의 판타지 소설, 『반지의 제왕』으로 잘 알려진 톨킨(John Ronald Reuel Tolkin)의 작품이다. 그는 옥스퍼드대학에서 고대 언어학을 가르치는 교수였고, 특별히 언어에 천재적인 능력을 보인 인물이다. ‘호빗’ 역시 ‘homo(인간)’와 rabbit(토끼)의 합성어로 그의 창조물이다. 순박하고 평화를 사랑하는 이미지를 이름에 심었다. 신장은 작지만 발이 커다란 토끼 발바닥을 가져 안정감 있는 걸음이 가능한 존재로 빚어냈다.
『호빗』은 1937년 9월에 처음 출간되었지만, 1951년에 상당부분을 수정하여 재출간 했다. 당시 『호빗』의 속편으로 집필 중이던 『반지의 제왕』과 줄거리를 일관되게 다듬기 위한 작업이었다. 1966년에는 영국이 아니라 미국 <밸런타인 북스>에서 오자와 실수들을 다듬어 더욱 완성된 모습으로 톨킨이 만족해 할 만 한 모습으로 출간되었다.
평화로운 마을 샤이어에서 호젓한 삶을 즐기던 호빗족 빌보에게 험난한 여정은 난데없이 들이닥쳤다. 초대받지도 않은 손님들이 밀려들었고,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이끌리듯 모험을 떠나게 된 빌보. 마법사 간달프의 안내를 따라 타고난 전사(戰士)들인 난장이들 무리에 끼여 식인 트롤의 위험을 피하고, 고블린과 늑대들의 추격을 뿌리쳐야 했다. 골룸과의 위험천만한 수수께끼 내기와 무시무시한 거미의 위협을 넘어야 했다. 숲속 요정들의 견고한 감옥에 갇힌 동료 난쟁이들을 극적으로 구출했다.
험난한 모험의 과정을 지나며 겁쟁이 빌보는 점점 변해간다. 모험이 진행될수록 빌보의 변화는 뚜렷해진다. 인간들이 사는 호수마을을 지나고 불을 뿜는 스마우그 앞에 선 빌보는 어느덧 용기 있는 존재가 되어 있었다. 보물 앞에 파리하게 변해가는 군상들과 달리 꼭 필요한 주머니만을 채운다. 인생이라는 여행에 많은 보물은 화를 불러오는 일이며, 걸음을 무겁게 하는 짐일 뿐. 고향으로 돌아온 빌보는 예전의 평화를 되찾는다. 하지만 빌보는 더 이상 예전의 빌보가 아니다.
톨킨은 옥스퍼드의 또 다른 천재, 『나니아 연대기』의 저자 루이스(C.S. Lewis)와는 속 깊은 친구였다. 톨킨과 루이스 모두 신자였다는 점에서 작품에 배인 공통점이 많다. 하지만 상세한 면으로 들어가면 개신교인 루이스와 가톨릭 신자 톨킨 사이에는 차이가 드러난다. 인간에 대한 낙관적 시선을 지녔던 톨킨은 끝까지 사람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않고 있다. 톨킨의 『호빗』에선 여행자들이 막다른 위협 앞에 두 번 구출 받는 장면이 나온다. 인생 여정에 깃들어 있는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이야기라 할 수 있다. 루이스의 『나니아 연대기』에서 ‘사자(아슬란)’의 등장으로 구원이 일어난다면, 톨킨의 『호빗』에서는 ‘독수리’로 나타난다. 인생은 하나님의 은혜 없이 갈 수 없는 길이다. 본향으로 가는 길이 험난하여도 종주할 수 있는 이유는 주의 은혜와 인도하심 때문이 아니겠는가.
불멸의 고전으로 일컬어지는 많은 대작들 중에는 여행을 소재로 한 작품들이 많다. 가장 오래된 서사시인 『길가메쉬 서사시』로부터 시작해서 호메로스의 『오딧세이아』 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이스』와 단테의 『신곡』, 작자미상의 『베오울프』와 제프리 초서의 『캔터베리 이야기』, 존 번연의 『천로역정』으로 이어지는 대서사시적 계보를 톨킨과 루이스는 이어가고 있다.
톨킨과 루이스의 또 다른 공통점은 중간계(middle earth)에 대한 생각이다. 중간계라는 개념은 톨킨의 미완의 작품 『실마릴리온』(The silmarillion)에서 가져온 것으로 『반지의 제왕』의 배경이 되는 작품이기도 하다. ‘중간계’와 ‘제3시대’와 같은 개념을 비기독교적이라고 우리는 단칼에 잘라버리기 쉽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신화와 같은 이야기 속에 톨킨과 루이스 모두는 그리스도를 이야기하고 있다. 우리는 마법사를 믿지 않는다. 눈에 거슬리는 간달프라는 마법사는 사실, 중간계를 보호하기 위해 보냄 받은 천사나 사역자로 읽어내는 것이 더 맞을 것이다. 높은 산, 깊은 숲과 골짜기에 산재한 위협을 피해 여정을 종주하도록 돕는 안내자로 말이다.
우리는 본향을 향해 걸음 한다. 여정의 끝에는 빌보처럼 이전의 우리가 아닐 것이다. 인생은 우정을 배우고, 사랑을 알게 되며, 헌신과 용기를 새겨 우리를 무르익게 하고 여물게 할 것이다. 아니 거꾸로 일지도 모르겠다. 예전 보다 탐욕스럽고 거만하고 증오를 키워갈 수도 있지 않을까. 우리는 자칫 그렇게 괴물로 변해갈 위험한 여행을 하고 있다. 빛나는 보물에 눈이 멀고, 허무한 것에 붙들리고, 증오의 노예가 될 수 있는 여행을. 톨킨이 그려내듯 거친 세파에 파리해져 악마가 되어갈지도 모른다. 용과 싸우다 보면 괴물이 되기도 하지 않은가. 본향으로 가는 길은 험난하다. 그러나 은혜와 돌보심 가운데 우리는 이전의 빌보가 아닌 지혜와 용기, 겸손으로 새롭게 된 열매있는 사람으로 본향에 이르게 될 것이다. 멋진 추억을 품은 채 말이다.
이종인 목사
울산언약교회 담임
울산대학교 철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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