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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문화/이종인 목사와 이 달의 책

우리는 무엇을 기다리는가?

 

19세기는 낭만의 세기였다. 기술 문명이 세상을 유토피아로 만들 것이라는 기대로 가득한 시기였다. 하지만 20세기 초에 드리운 잔혹한 전쟁과 인간의 악마성은 회의와 좌절의 세기로 만들었다. 기대하던 희망이 상실된 절망은 인간실존에 큰 타격을 미쳤다. 인간은 현재만을 살지 않기 때문이다. 더 나은 내일을 기대하고 희망하는 미래를 기다리면서 살아야, 의미 있는 현재를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좌절과 무의미 속에서 실존적 권태와 지겨움에 사로잡힌 인간군상을 사무엘 베케트(Samuel Barclay Beckett)는 그려낸다. 
  

저자 사무엘 베케트는 1906년 4월 13일 아일랜드의 수도 더블린 근교 폭스로크에서 출생했다. 유복했던 개신교 가정에서 자랐지만, 부모들은 엄격한 청교도들로 검소하고 금욕적인 교육을 받았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프랑스어를 공부하기 시작했고, 1923년 더블린의 트리니티 대학에서 프랑스 문학을 전공했다. 프랑스 수도 파리의 고등사법학교 영어 강사로 부임했다가, 1931년 더블린에 다시 돌아와 모교인 트리니티 대학에서 교수가 되었다. 학문에 뛰어난 재능을 지녔을 뿐 아니라 운동에도 취미가 있어 크리켓, 수영, 럭비, 권투 등에 빠져 지내기도 했다. 
  

트리니티 대학에서 교수로서의 삶이 시작되었지만, 행복한 시간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가르치는 일에 대해 회의를 느꼈고 결국 사직하고 말았다. 1933년 아버지의 부고 이후에 부친에게서 물려받은 유산으로 여행길에 오른다. 유럽의 여러 도시와 지방으로 여행하게 되는데, 이때로 부터 고독한 방랑 생활은 4년에 걸쳐 계속되었다. 1937년이 되어서야 파리에 정착하고 이후로부터 본격적인 작품 활동을 전개하게 된다. 깊은 고독과 존재론적 회의에 대한 내용이 그의 작품『고도를 기다리며』에 담겼다. 
 

『고도를 기다리며』라는 작품은 인간의 근본적인 권태를 다루고 있다. 단순한 일상의 지루함이 아니다. 코미디처럼 보이는 대화들 속에서 인생의 허망함과 지루한 권태가 무섭게 담겼다. 에스트라공과 블라디미르가 기다린 고도는 무엇일까? 시대와 세대에 따라 고도는 다른 얼굴을 할 것이겠지만, 신이며, 자유이며, 평화 그리고 번영일 것이다. 사람들이 꿈꾸는 풍요로운 복지사회 유토피아이며 희망과 기대의 도래라고 할 수 있다. 고도는 각자에 따라 다른 희망의 내용인 셈이다. 
  

에스트라공과 블라디미르라는 두 사람은 모든 시대에 걸쳐 더 나은 세상을 갈망하는 인류를 대표한다. 또한 그들의 기다림은 어제오늘 시작된 것이 아니라 오래된 갈망이다. 그들도 잘 파악하지 못하는 때부터 또 언제까지 이어질지 모르는 기다림의 연속이다. 지루한 기다림의 연속이다. 기다리는 고도가 딱히 정확하게 누구인지도, 어떤 생김새인지조차도 모른다. 그들은 사력을 다해 지루한 기다림을 견디고 또 견딜 뿐이다. 기다림을 멈추지 않기 위하여, 생을 끝장내지 않기 위한 몸부림이 지속된다.
  

서로 질문한다. 질문조차 제대로 듣지 못해 반복한다. 들리지 않고, 이해하지 못하는 우스꽝스러운 대화들이 이어지고, 지루함을 달래기 위해 욕설마저 내뱉는다. 앉아 기다리는 일에 지쳐 몸을 움직이고 운동도 해본다. 애써 구두들 신고 벗는 일을 반복하고 모자를 뺑뺑이 돌린다. 

에스트라공: 뭐야?
블라디미르: 이걸 좀 잡고 있어.

  에스트라공이 블라디미르의 모자를 받고, 블라디미르는 두 손으로 럭키의 모자를 매만진다. 에스트라공은 블라디미르의 모자를 받아쓰고 제 것은 블라디미르에게 건넨다. 블라디미르가 에스트라공의 모자를 받는다. 에스트라공이 두 손으로 블라디미르의 모자를 매만진다. 블라디미르는 럭키의 모자를 벗고 에스트라공의 모자를 쓴다. 럭키의 모자는 에스트라공에게 준다. 에스트라공, 럭키의 모자를 쓴다. 블라디미르, 두 손으로 에스트라공의 모자를 매만진다. 에스트라공, 블라디미르의 모자를 벗고 럭키의 모자를 쓰며 블라디미르의 모자는 다시 블라디미르에게 넘겨준다. 블라디미르, 제 모자를 받아든다. 에스트라공, 두 손으로 럭키의 모자를 매만진다. 블라디미르, 에스트라공의 모자를 벗고 제 모자를 쓰며 에스트라공의 모자는 에스트라공에게 넘긴다. 에스트라공, 제 모자를 받는다. 블라디미르, 두 손으로 제 모자를 매만진다. 에스트라공, 럭키의 모자를 벗고 제 모자를 쓰며 럭키의 모자는 블라디미르에게 넘긴다. 블라디미르, 럭키의 모자를 받는다. 에스트라공, 두 손으로 제 모자를 매만진다. 블라디미르, 제 모자를 벗고 럭키의 모자를 쓰며 제 모자는 에스트라공에게 넘긴다. 에스트라공, 블라디미르의 모자를 받는다. 블라디미르, 두 손으로 럭키의 모자를 매만진다. 에스트라공, 블라미디르의 모자를 블라디미르에게 넘긴다. 블라디미르, 그것을 받자 에스트라공에게 다시 넘긴다. 에스트라공, 그것을 받지 블라디미르에게 넘긴다. 블라디미르, 그것을 받아 내팽개친다. 이상의 동작은 모두 재빠르게 진행된다. 

블라디미르: 나한테 어울리냐?
에스트라공: 모르겠다.
블라디미르: 모르겠다니. 너 보기에 어떠냐니까?
에스트라공: 꼴불견이구나. 

 

지루함을 이기기 위한 몸부림이 계속된다. 장난하고 춤추기도 하고, 폭력에 빠져보기도 한다. 이 모든 광대놀음은 고도를 기다리며, 불확실하며 언제 찾아올지 모르는 희미한 희망을 기다리며 지속한다. 일상적 삶의 지루함을 작품을 통해서 드러내고 있다. 줄거리와 내용도 별로 없는 단순한 대화의 반복은 일상의 지루함을 지면에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살바도르 달리(Salvador Dali)의 작품, 『기억의 지속』에서 보여주는 시간마저 녹여 내릴 만큼의 끔찍한 지루함을 표현해 내고 있다. 
 

『고도를 기다리며』는 독일 철학자 하이데거(Martin Heidegger)가 강조하던 ‘존재의 의미’에 대해 염려하는 현존재(Dasein)가 가지는 가장 근본적인 기분(Grundstimmung) 즉, 존재론적 권태를 잘 담아내고 있다. 현재가 지닌 위치, 다가올 죽음 사이에서 시간을 죽이는 권태로운 존재 상태의 기분을 잘 드러낸 희곡작품이다. 단순히 재미없어 지루해지는 느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삶이 가지는 본질적이고 존재론적 권태를 말하고 있다. 작품을 읽어가면서 반복되는 지루함 속에서 몇 번씩이나 배꼽을 잡았다. 대화의 내용에서 제대로 된 소통을 볼 수 없어 우스꽝스럽게 때문이다. 마냥 고도를 기다리는 그들은 고도가 언제 오는지 모를 뿐 아니라 고도나 누구인지, 무엇인지조차 모른다. 
  

인생을 살아가지만 무엇을 향해 가는지, 어디로 나아가는지 확실치 않다. 주름이 잡히고 머리가 하얗게 변해가지만 막막함의 안개로 가득하다.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지만, 그 실체를 알지 못한다. 실존적인 권태를 이기기 위한 몸부림이 있다. 돈을 애써 벌어 성공하고, 즐거움의 자극을 찾아 쾌락을 누려가고, 남들이 부러워하는 명예의 고깔모자를 써보지만 제대로 된 행복이나 의미에 도달하지 못한다. 다가오는 질병과 죽음, 고통을 외면하려 부지런히 딴청을 피워보지만 변하는 것 하나 없이 제자리다. 죽음이라는 사형선고를 선고받고 끝을 기다리는 수인(囚人)에 불과하니 말이다. 
  

희망이라는 단어와 이야기가 만개할수록 희망이 간절한 시대이다. 하지만 희망의 내용이 무엇인지, 바라고 기대하며 기다리는 실체가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유토피아를 꿈꾸었던 인류의 세계사적 실험들은 재난과 재앙으로 끝이 났다. 더 이상 희망은 없는 것인가? 무엇이 인간의 희망이 될 수 있을까? 에스트라공과 블라디미르처럼 기다려도 오지 않은 무언가를 꿈꾸며 지루한 희망고문 속에 몸을 뒤틀며 견디고 있지 않은가? 우리는 무엇을 기다리는가? 
  

성도들 또한 기다리는 사람들이다. 지루한 존재론적 권태와 막연한 기대로 배배 꼬는 괴로움이 아니다. 성도들은 기다림의 내용을 알고 확실한 소망을 기대하며 걸음 하는 이들이다. 인생이 빚어낸 희미한 희망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확고한 약속을 품고 살아간다. 거칠고 험한 유목민의 삶을 살았으나 아브라함은 약속의 성취를 기다리며 살았다. 식민지의 고달픈 삶 가운데서도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렸던 시므온(눅2:25-32)과 예루살렘의 속량을 기다리던 안나(눅2:36)는 주의 초림(初臨)을 소망하며 살았다. 21세기의 번화한 시대, 여전히 실존적 권태로 방황하는 이들로 가득한 세대 속에서 성도들은 주의 약속을 안고 살아간다. 우리는 오늘도 의미로 가득한 삶 가운데서 약속을 기다리며 살아간다.

 

이종인 목사

울산언약교회

울산대학교 철학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