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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문화/이종인 목사와 이 달의 책

[9월의 책『모모』] 나에게 시간이란 무엇인가?

 

   『모모』는 판타지소설 작가 미하엘 엔데(Michael Andreas Helmuth Ende)의 작품 중에 가장 사랑받는 저작이다. 많은 이들에게 사랑받는 동화로 어린이와 청소년들은 물론 성인들에게도 자극과 반향을 불러왔다. 시간에 대한 걸작으로 성인들에게도 근본적인 질문들을 던지고 있는 명작이라 할 수 있다.   모모라는 주인공과 친구들을 통해 우리에게 시간이 무엇인가를 묻게 한다. 모모와 친구들은 회색 신사의 방문을 받은 후 돈을 벌기 위해, 보다 높은 생산성을 위해 시간을 아끼고 쪼개면서 따뜻했던 우정과 감정을 잃어간다. 따뜻하고 포근했던 관계는 시간에 쫓기면서 사막처럼 삭막하고 차갑게 변해버린다. 모모는 호라 박사와 반시간을 미리 내다보는 거북이 카시오페이아의 도움으로 회색신사들을 물리치고 예전처럼 행복한 삶을 회복한다는 이야기다.
 

  『모모』는 동화형식을 빌어 기계적 시간에 붙들려 노예처럼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불편한 현실을 들추는 내용이다. 시계의 발명 이후로 사람은 자신의 리듬을 잃어버렸다. 강제된 시계의 분초에 맞추어 일어나고 일터로 향해야 한다. 개인이 가진 고유하고 아름다운 주관적 시간은 회색빛 객관의 시계에 갇혀 강제되고 있다. 꿈과 야망을 성취하고 성공한 특별한 존재가 되기 위해, 소유를 더 많이 늘이고 또 늘이기 위해 기계적 시간표에 따라 쉼 없이 달음질 하는 현대인. 꽉 찬 기계적 스케줄은 직장인은 물론이고 어린 학생들까지 동여매고 있다. 언제부터인가 우리 모두는 시간의 포로가 되어 버렸다. 
 

  전통 농업은 자연의 시간과 작물의 성장주기에 의존했다. 대부분의 사회들은 시간을 정확하게 측정할 능력이 없었고, 시간계수에 그다지 관심을 기울이지도 않았다. 시계가 없어도 세상을 잘 굴러갔고, 태양과 달의 움직임, 식물의 성장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오늘날처럼 해와 달, 시간을 묻는 것은 근대 이전에는 낯선 일이었다. 근대는 시간의 통제와 지배를 위해 인공적인 기계, 시계를 발명했다. 그로부터 시간은 인간을 지배하기에 이르렀다. 시간은 인생을 규격화할 수 있었고 삶의 지배를 용이하게 했다. 자기 삶을 기뻐하고 충실했던 이발사 푸지씨는 회색신사를 만나 휘둘리기 시작하면서 자신의 리듬을 상실해 버렸다. 
  

  “선생님, 시간을 어떻게 아끼셔야 하는지는 잘 아시잖습니까! 예컨대 일을 더 빨리 하시고 불필요한 부분은 모두 생략하세요. 지금까지 손님 한 명당 30분 걸렸다면 이제 15분으로 줄이세요. 시간 낭비를 가져오는 잡담은 피하세요. 나이 드신 어머니 곁에서 보내는 시간을 절반으로 단축할 수 있습니다. 가장 좋은 것은 어머니를, 좋지만 값이 싼 양로원에 보내는 겁니다. 그러면 어머니를 돌볼 필요가 없으니까 고스란히 한 시간을 아낄 수 있어요.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앵무새는 내다 버리세요! 다리아 양을 꼭 만나야 한다면 두 주에 한 번만 찾아가세요! 15분간의 저녁 명상은 집어치우세요. 무엇보다 노래를 하고, 책을 읽고, 소위 친구들을 만나느라고 쉬중한 시간을 낭비하지 마세요.”
  

  푸지씨는 시간을 아끼면 아낄수록 가진 것이 점점 줄어들었다. 의미 있는 달콤한 시간도, 따뜻하고 사랑을 주고받는 관계도 잃어 갔다. 시간을 허비하면서 살아내는 행복한 삶을 기계음 가득한 회색빛 시간에 갇혀 사막이 되어 버렸다. 주관적 리듬을 잃어버린 기계화된 삶은 분주하지만 삶을 길어내지 못한다. 단조롭고 생기 없는 지루함이 똬리를 틀고 앉아 삶을 푸석푸석하게 삭혀가고 있다. 분주하게 오가는 인파로 가득한 도심은 살아있는 듯 싶어나 실상은 죽어가고 있다. 고유한 삶의 리듬을 잃은 이들로 가득하다. 쉴 새 없이, 멈추지 않은 시간이 파도에 떠밀리는 부유물처럼.
  

  로버트 뱅크스는 『시간의 횡포』에서 시간은 모든 것을 증발시키고 산화시키는 무서운 힘이라고 말한다. 그리스 신화 속에서 시간을 상징하는 크로노스는 자녀들을 삼키는 포악한 아버지로 등장한다. 시간은 모든 것을 삼키는 괴물인 셈이다. 자기계발과 성취추구를 독려하는 회색신사들은 크로노스의 화신들이다. 시간을 아껴 보람찬 인생을 사는 방법에 대한 홍보 뒤에는 삶을 파괴하는 음모가 도사리고 있다. 『모모』는 생을 앗아가는 시간의 횡포를 고발하며, 더욱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를 환기시킨다. 
  

  시간이 무엇인지 정의해 보자면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을 금방 깨닫는다. 현대는 시계를 통해서 우리는 시간을 환산하고 계수하지만 개인의 시간을 계측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모모와 호라 박사에게 시간은 주관적이고 심리적 시간이다. 과거와 미래는 모두 현재 속에 함께하는 시간이다. 과거는 기억으로 현재 안에 머물러 있고, 미래는 기대로 역시 현재 안에 녹아 있다. 자신이 원하는 일을 하고 사랑하는 이들과 행복하게 시간을 허비하는 것이 현재를 소중하게 여기는 방법이라 말한다. 시간은 시계나 달력으로 측정할 수 없는 것으로 오직 우리의 마음으로 잴 수 있다고 이야기 한다. 
  

  “아니야. 모모. 이 시계들은 그저 취미로 모은 것들이야. 이 시계들은 사람들이 저마다 가슴 속에 갖고 있는 시간을 엉성하게 묘사한 것에 지나지 않아. 빛을 보기 위해 눈이 있고 소리를 듣기 위해 귀가 있듯이 너희들은 시간을 느끼기 위해 가슴을 가지고 있단다. 가슴으로 느끼지 않는 시간은 모두 없어져 버리지. 장님에게는 무지개의 고운 빛깔이 보이지 않고 귀머거리에게는 아름다운 새의 노랫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과 같지. 허나 슬프게도 이 세상에는 쿵쿵 뛰고 있는데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고 눈 멀고 귀먹은 가슴들이 수두룩하단다.”
  

  모모의 시선에서 현대는 가슴을 잃어버린 사람들로 가득하다. 초와 분으로 절개된 시간에 삶의 리듬은 토막토막 났다. 날카로운 시간의 칼날아래 인생은 조각나기 쉬운 시절이다. 기계화된 시간에 노예로 살아가는 현대인들에 대한 저자의 통찰과 직격은 우리에게 유익하다. 정형화된 시간에 복속되어 노예로 살아가기 쉬운 현대에, 자연스러운 인생의 리듬을 회복하도록 독려하기 때문이다. 거침없이 작동하는 날선 시계 위에서 춤추듯 살아가지 않을 수 없는 현실에서 리듬을 따른 고유한 시간은 어떻게 확보해 낼 수 있을까? 
  

  우리에게 시간은 주관적이다. 행복하고 즐거운 시간은 짧게 느껴지고, 지루한 시간은 동일한 시간에도 견디어야 하는 긴 시간이 될 수 있다. 황혼에 이른 어르신들이 자신의 삶을 되돌아 추억해보면, 1시간이 채 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긴 세월이 압축되어 인상 깊은 추억들만 남는 까닭이다. 대단한 성공과 행적들도 시간에 의해 탈색되고 빛이 바랜다. 시간을 허비하여 만들어내는 사랑과 우정의 관계는 가장 귀한 의미라고 말하고 있다. 
  

  바울은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다(엡5:16).”고 말한다. 회색신사들처럼 시간을 아끼라고 채근하는 말이 아니다. 단순히 시간을 소중히 여기라는 말도 아니다. 빠르게 흘러가는 세월 속에서 가장 가치 있는 것을 붙잡으라는 말이다. 인생은 짧다. 성공하고 명예를 얻기 위해서도 일생을 소비해야 한다. 돈을 얻고 부자가 되기에도 시간은 모자란다. 분초를 쪼개며, 촌각을 다투어 붙들려하는 겨우 얻을 수 있을까 하는 것들이다. 자본주의의 환한 집어등 아래로 젊음과 시간을 허비하며 얻고자 하는 성공, 돈, 쾌락. 
  

  우리는 가장 소중한 것을 선택해야 한다. 급류처럼 쓸려가는 유속 가운데서 우리는 회개의 때를 붙잡아야 하고 주님을 믿어야 한다. 미하엘 엔데가 말한 것처럼 우리는 시간의 주관성을 느낀다. 하지만 단순한 주관성이 아니다. 성도라면 모두 참여하는 주관적이지만 보편적 시간성을 함께 누린다. “주께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음”(벧후3:8)에 우리는 참여한다. 세월의 유속이 느껴지는 9월, 『모모』와 함께 “나에게 시간이란 무엇인지” 한 번 물어보자.

이종인 목사

울산언약교회 담임

울산대학교 철학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