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지붕에서 자라고 같은 밥을 먹었던 형제라도 인생관은 각각이다. 한 배에서 나왔는데 이리 다를 수 있나 싶을 때도 많다. 재야 역사학자 이덕일씨가 풀어가는 정약용과 그의 형제들의 삶에서 각기 다른 삼형제의 인생관을 보게 된다. 책의 배경은 조선시대 정조가 통치하던 때로, 천주교인들에 대한 탄압과 살육 그리고 유배라는 혹독한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본서는 2권으로 총 13부로 구성되어 역사적 흐름을 따라 이야기를 풀어간다.
1장에서는 정약용이 자신의 매형인 이승훈과 이벽(최초의 조직교회의 지도자)을 통해서 천주교에 접촉하게 된다. 2장에선 정조가 노론의 견제세력을 위해 남인들을 등용하려 할 때 눈에 띄었다. 하필 이때 을사주초사건, 즉 천주교가 조정에 의해서 발각되는 사건이 터지고, 천주교는 대부분 남인들이 소속되어 노론이 숙청을 주도하게 된다. 더불어 천주교는 제사를 반대한 탓에 큰 반발의 폭풍을 몰고 왔다. 3장에서는 정조 자신의 아버지 사도세자가 노론에 의해 죽음을 당한 일을 가슴에 품고 원수를 갚으려 하였지만, 생애 내내 노론을 틀어쥐는 일에 실패한다. 정조의 마음에는 언제나 아비 사도세자가 누워있는 수원 화성에 마음을 두었고, 수원 화성을 최첨단의 기술을 동원하여 신축하고자 했다. 성 축조술의 선진문물을 도입했고, 성 축조 노역은 강제노역이 아니라 임금 지불 방식을 최초로 도입했다. 이 일의 중심에 정약용이 서 있었다. 4장에서 보여주듯, 정약용은 천주교를 실용적인 입장세서 수납했다. 천문과 농경, 측량에 대한 서양과학 기술의 선진성을 배우기 위함이었다. 그는 벼슬길에 서 있으면서 ‘제사문제’로 천주교를 버렸다고 확언한다.
1권에선 차가운 시련기였지만 그나마 희망의 빛이 드리웠지만, 2권에 들어서자마자 깜깜한 어두움에로 미끄러진다. 6장에서는 정조의 죽음과 순조 대신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하면서 남인들과 천주교인들에 대한 피비린내 나는 숙청과 박해가 시작된다. 노론들은 이에 가세하여 천주교를 빌미로 남인들이 다시는 재기하지 못하도록 처절하게 짓밟고자했다. 7장에선 제일 나중에 천주교를 받아들인 정약용의 형인 정약종(1786년 3월 입교)은 다른 형제들과 달리 철저히 신앙을 고수한다. 그는 천주 교리에 따른 제자도를 엄격하게 따랐고, 제사도 거절했다. 교리문답서 『주교요지』를 책롱 속에 보관해 오다 발각되어 국문을 당했다. 신앙고백에 따라 자신의 신앙을 또렷하게 증언하며 형장에 끌려가면서도, 비웃음과 침 뱉는 이들을 향해 경고와 더불어 신앙을 증거 했다. “여러분은 우리를 비웃지 마시오. 사람이 세상에 나서 천주를 위해 죽음은 당연한 일이요. 공심판 때 우리의 울음은 즐거움으로 변할 것이나 여러분의 기쁜 웃음은 변하여 참된 고통이 되리니 여러분은 웃지 마시오.”
8장과 9장에선 전멸하는 남인들을 이야기하고, 유배당한 정약용이 저술활동을 한 일들을 기록하고 있다. 그는 형과는 달리 일관되게 천주교를 버렸음을 주장해서, 이승훈과 홍낙민, 이가환과 황사영과 같은 주변인물들이 처형과 능지처참에도 위태로운 목숨이 기적같이 보전되고 형 정약전은 흑산도로, 정약용은 강진으로 유배당한다. 10장과 11장에선 두 사람의 저술 활동을 기록하고 있다. 정약용은 『주역』에 몰두한다. 그는 문왕·주공·공자 같은 성인들이 『주역』을 저술한 까닭이 백성들을 위한 정책을 실시할 때 그것이 하늘의 뜻과 부합하는지를 알아보기 위해서라고 보았다. 정책에 대한 하늘의 천명을 미리 알 수 있게 하는 천상의 문이 『주역』이라고 보았다. 『주역』해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상(象), 즉 상징(象徵)인데 공자 같은 성인들이 주역을 상징으로 저술했기 때문이다. 정약전과의 서신교류를 통해서 저술한 『주역사전』은 정약전에 의해서도 극찬되었다. 그는 이러한 저술들을 통해서 자신의 정당성과 노론정치의 부당성을 학문으로 말하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정조와 함께할 때는 제도개혁과 실학으로 통해 이상적 세상을 이 땅에 실현하려 했던 정약용은 유배되었어도, 학문을 통해서 이 땅에 이상사회와 하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소망하며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이와는 달리 정약전은 철저하게 민초 속으로 파고들어간다. 그의 학문적 소양은 서민들의 삶 속에 깊숙이 들어감으로써 진정한 실천학문이 드러난다. 『송정사의:1804』는 국가의 소나무 정책에 대한 견해를 보여준다. 송금정책으로 소나무를 사용하지 못하며 고충을 겪는 민초들의 어려움에 대한 방안이었다. 바닷가 어부들과 어울렸던 그는 『자산어보』라는 우리나라 최초의 해양학 연구서를 발간했다. 민중들 속에서의 진정한 실학을 실천했던 인물이 바로 정약전이었다.
12장과 13장에서는 애절한 형제애를 보여준다. 유배이후에 서신으로 왕래하던 동생을 만나고자 열망하던 정약전은 우이도로 거처를 옮겨 가면서 까지 만남을 간절히 기다렸지만, 끝내 소망을 이루지 못하고 순조10년(1816) 6월6일에 한을 품은 채 세상을 떠났다. 이로써 정약용은 마지막 벗이었던 형과도 이별하게 된다. 그의 유일한 독자였던 형의 죽음을 애도하면서 자신의 저서 240권 모두를 불태워야겠다는 말로 그 비통함을 표현한다. 유배가 풀려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조정으로부터 경전(經田)의 일로 나갈 길이 열리는 듯 했으나 서용보의 저지로 나아가지 못한다. 그 이후 그는 현세에 자신의 분깃이 없음을 알고는 『자찬묘지명』을 쓰면서 인생을 정리한다. 『자찬묘지명』에서 232권의 경학서와 260권에 달하는 법정서와 역사서 그리고 시집을 정리하였고, 잡문(雜文)과 목민심서를 비롯한 흠흠신서 등등하여 잡찬(雜簒) 260권을 정리하였다.
그는 오늘날의 토지공개념과 같은 급진적 토지제도개혁론으로 마을단위 토지제도인 여전제(閭田制)를 『전론(田論』에서 다루고 있다. 30여 가구가 함께 공동 생산하여 일부는 국가세금으로 내고, 일부는 자신들이 선출한 여장의 녹봉으로 나머지는 균등 분할하는 제도를 주장했다. 사농공상의 차별이 철저했던 시절에 그는 경영과 수리, 기기 제작하는 기술자들에게 10배나 많은 대우를 주장함으로써 획일적 평등주의가 아닌 오늘날의 자본사회주의 또는 수정자본주의를 주장하는데 까지 나아가는 파격을 보인다. 그는 지역차별과 신분차별이 나라를 병들게 하는 근본적인 암이라고 보았다.
땅에 이상적 사회를 건설하려했던 정약용의 꿈은 실현되지 못했다. 만약 정조와 더불어 그러한 시대를 열었다면 오늘의 대한민국은 어떤 모습으로 서 있을까? 정조가 경직된 노록벽파의 위협 속에서도 좀 더 과감하게 서학을 수용하고, 천주교를 인정함으로서 서구문물들을 주체적으로 수용함으로써 국가진흥을 도모하고, 정약용과 같은 이들의 이상적 사회제도가 실현되었다면 오늘이라는 때에 대한민국은 많이 달라져 있지 않을까싶다.
저자는 본서를 통해 세 형제의 각기 다른 세계관을 조망하고 있다. 이야기가 정약용을 중심으로 전개되지만, 두 형과 함께 각기 다른 삶의 방향을 살아가는 모습을 분명하게 그러낸다. 정약종은, 이 땅에 속하지 아니한 하늘에 속한 사람으로 살아가는 나그네 인생관을, 둘째 정약전은 이 땅에 속한 사람으로 민중 속에서 민초들을 사랑하고 그들과 더불어 살아간 세계관을 보여준다. 엄혹한 현실 중에도 소박한 정원의 행복을 일구어 간다. 마지막 정약용은 뒤틀린 세상 속에서도 이상을 버리지 않고, 끝까지 실현시키려 한 중보적 인생을 살다 갔다. 고통스러운 유배지는 작업실이 되었고, 처절한 소외와 고독의 시간들이 주옥같은 저작들을 빚어내었고, 후세에 남겨졌으니 말이다. 삼 형제의 삼색세계관을 보면서 묻게 된다. 내가 가진 인생관은 어떤 색일까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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