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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문화/이종인 목사와 이 달의 책

사막같이 뜨거운 여름에 만난 어린왕자

 

 

부부관계, 부모와의 관계, 이웃과의 관계를 그려낸 명작
“관계파괴의 사막에서 벗어나는 탈출구”는 “순수함의 회복”이다.


 『어린왕자』가 출간 된 지 75년이 지났다. 생각보다 나이를 많이 먹은 셈이다. 하지만 여느 고전들에 비하면 젊은 편이라 할 수 있다. 100년이 되지 않은 책이『성경』다음으로 많은 나라에 번역, 유포되고 애독되는 경우는 드물고 독보적이라 할 만하다. 누구나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열린 개방성을 지녔지만, 곱씹어 갈수록 의미심장한 생각과 삶을 성찰하게 한다는 점에도 만인의 애독서가 되고 있다. 100년이 더 흘러도『어린왕자』는 많은 이들에게 사랑받는 고전으로 우리 곁을 지키고 있으리라는 것을 의심하지 않는다. 


  1941년 여름 LA의 한 병원에서 외로운 상황에 머물렀던 생텍쥐페리의 착안에서부터『어린왕자』 의 역사는 시작되었다. 출판관계자의 연결로 1942년 성탄절 어린이들을 위한 선물용으로 기획되었다가 1943년 뉴욕에서 영어와 불어로 출간되었다. 저작권 시비로 시끄러워졌고, 생텍쥐페리는 1944년 7월의 마지막 날 오전 정찰비행을 나섰다. 그의 생애 마지막 비행이자 늘 꿈꾸었던 자기 별로 돌아간 날로 기록되었다. 


 『어린왕자』는 생텍쥐페리가 아내 콘수엘로에게 보낸 편지를 통해 집필 의도를 읽을 수 있다. 전쟁으로 인해서 그는 미국으로 건너와야 했고, 아내는 유럽에 남았다. 미국에 머물러 외로운 때, 유럽에 남아 있던 아내를 그리워하며『어린왕자』를 썼다고 고백하고 있다. “알다시피 장미는 바로 당신이야. 내가 당신을 항상 돌봐주지는 못했지만, 나는 늘 당신이 예쁘다고 생각했소.” 


  두 사람 사이가 늘 좋았다고 말하기는 힘들다. 콘수엘로가 쓴『장미의 기억』에서 생텍쥐페리와의 함께하는 삶에서 일정한 봉급에 매달린 삶을 노예 같은 구속처럼 느낀다고 말하고 있다. 자신의 남편은 커다란 소년처럼 늘 자유로워지기를 갈망했다고 말한다. 더불어 자신 역시 자유를 원했다고 말한다. 우리가 기대했던 순애보를 찾기는 어렵다. 다만 두 사람이 서로 사랑했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작가이자 파일럿이었던 생텍쥐페리 주변에는 많은 여인들이 있었다. 지구라는 행성에 오천송이 장미가 피어 있었듯이. 하지만 저자는 자기행성의 까칠하지만 길들여진 유일한 장미, 콘수엘로를 그리워했다. 두 사람 사이의 깊고 솔직한 사랑이 작품 안에 담겨 있다.『어린왕자』가 오래도록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이유는 관계의 미학과 기술을 가르쳐주기 때문일 것이다. 부부간 사이는 가장 가까운 사이지만, 동시에 가장 섬세한 관계이기도 하다. 부부관계는 때때로 위태로운 상황에 처하기도 한다. 어린왕자가 행성을 떠나 여러 별을 방황하다 지구로 온 이유이기도 하다. 


  부부보다 앞선 친밀한 관계가 있다. 최초의 관계이자 사랑의 관계, 부모와의 관계일 것이다. 코끼리는 영웅의 상징으로 통한다. 보아뱀이 삼킨 코끼리는 독립되지 못한 영웅, 아이 상태를 보여준다. 독립적이고 강한 면모로 성장할 수 있는 어린아이가 부모의 요구와 어른의 세계에 삼켜진 모습이다. 세상에서 생존하려면, 아이의 꿈보다 생산적이고 실용적인 직업훈련을 해야 한다고 요구받는다. 아이의 꿈은 현실에 밝은 부모에 의해 압도되고 삼켜진다. 코끼리를 삼킨 보아뱀은 정말로 무서운 그림이다. 자신의 고유한 삶이 통째로 먹히는 일이 아닌가.


  현실 세계는 유용한 공부를 하라고 요구한다. 좋은 대학에 갈 수 있는 전략적인 시간 관리를 해야 한다고 닦달한다. 아이의 실존적 고뇌와 삶의 성찰을 이어갈 시간과 기회를 박탈한다. 자기 탐색과 발견의 걸음을 제대로 떼어놓지 못한 채 코끼리는 옴짝달싹할 수 없는 엄마의 관리 속에 놓인다. 낙심한 아이들은 부모를 따르지만, 자신의 꿈을 온전히 놓지 못한다. 비행사가 된 이후에도 1호 그림을 꼬깃꼬깃 끄집어내는 일은 좌절된 꿈을 놓지 못하는 아픈 미련이다.


  누구나 어린 시절을 지난다. 엄마의 세계와 자신의 세계를 구분하기 힘든 유아 시절은 엄마라는 따뜻한 울타리는 가장 중요한 생명의 원천이다. 엄마에 의존된 삶은 일정한 세월이 지나면 독립을 꿈꾸는 아이에게 내어주게 되고, 아이는 서서히 자신의 세계를 구성하고 만들어가기 시작한다. 하지만 엄마의 세계에 삼켜진 채 꿈이 좌절된 세계는 노예적 삶과 매몰된 죽음 같은 인생이 되는 무서움이다. 


 『어린왕자』속에 모성적 세계는 보아뱀(BOA)과 바오밥(BAO)나무로 표현된다. 바오밥 나무의 싹들은 처음에는 다른 식물들과 별 차이가 없다. 바오밥나무의 싹은 나무 싹이 자라기 전에 없애야 하는데, 자라서 거대한 나무가 되면 자신의 세계를 꿰뚫고 파괴하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바오밥 나무의 뿌리는 정확하게 꼬불꼬불한 보아뱀과 같은 모양을 하고 있다. 모성적 세계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꼼짝없이 자기 별을 잃어버리는 재앙을 맞이하게 된다.


  나무는 생명과 죽음 모두를 연결하는 상징이다. 자궁 속에 아이를 품듯 아이의 삶을 에워싸는 엄마. 거대한 교회 건물처럼 우뚝 속은 바오밥나무는 모성적 차원의 의미를 가진다. 코끼리를 삼킨 보아뱀과 별을 위협하는 바오밥나무는 모두 엄마를 그려낸다. 가장 따뜻하고 은혜로운 존재가 가장 무서운 존재가 되는 셈이다. 압도적인 모성의 세계 속에서 무력한 자아를 표현하고 있다. 부모와의 관계, 우리를 생성하고 보호해 왔던 은혜롭고 따뜻했던 관계는 성장의 즈음에 새로운 관계설정이 필요하다. 엄마의 손길을 아이들의 생명과 성장에 필수적이다. 좌절된 꿈을 안고 날개 꺾인 채 움츠리고 있는 아이가 되지 않도록 자녀와의 섬세한 사랑의 기술이 필요하다. 


 『어린왕자』는 부부관계, 부모와의 관계에 이어 이웃과의 관계를 그려낸다. 화자는 자신이 그린 모자처럼 생겨먹은 그림을 걸작품이라고 말한다. 어른들에게 보여주면서 “무섭지 않은지?” 물었는데, 한결같은 답변은 “아니, 모자가 왜 무서워?”였다. 자신은 모자를 그린 것이 아니었는데, 아무도 코끼리를 삼킨 무시무시한 그림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드러난 현상과 외형만을 보고 살아가는 어른들의 세계관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작품을 이해받기를 원했던 그의 소망은 6세 되던 때에 화가의 꿈을 접으면서 포기했다. 화가라는 직업 대신 그는 다른 직업을 택해야 했고 차선으로 선택한 것이 파일럿이었다. 


  그가 꿈을 접은 이후로 인생을 살아오던 동안 수많은 사람과의 만남을 가졌다. 만나는 사람 중에 특별히 명석해 보이는 사람일 경우에는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기대를 하고 그의 1호 그림을 보여주었다. 일종의 시험이다. 하지만 그의 실험은 늘 실패의 연속이었고, 좌절된 후로는 일상적 대화로 전환했다. 골프와 정치, 시대조류에 맞는 대화를 해야만 준수한 사람이라고 인정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수많은 만남이 있었지만, 내면을 이해하고 주고받는 존재를 발견하지 못했다. 


  여러 별을 떠돌 듯 여행하며 사람들을 만났다. 권력용의 상징인 절대 군주 같은 사람도, 과대망상증의 허영장이도 만난다. 부끄러움을 반복하는 알콜중독자와 돈과 소유에 노예가 된 사업가와 조우한다. 관습적 자아 속에 안주하는 가로등지기의 생기 없음 앞에 좌절한다. 지리학자를 만난 어린왕자는 여태 만난 직업인들과 다른 학자적 진정성을 보는듯 했지만, 이내 실망한다. 세상을 잘 보기 위해 되려 실상에 눈을 감는 언행의 역설을 보며 질색한다. 생산과 소비, 현학적 지식에 매몰된 어른들의 세계는 이웃과 세계와 소통하지 않는 창 없는 단자요, 이웃에 대한 책임을 상실한 사막이었다. 


  비행으로 삶을 이어가던 그는 모터 고장으로 추락한다. 내면을 걸어 잠근 채, 형식적 일상을 살아내던 삶은 어느 시점에서 더 이상 비행할 동력을 상실했다. 수준에 맞추어 하루하루 견디는 삶은 외형으로는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였지만, 마음은 상했고, 가장 중요한 모터, 심장이 고장 나버리고 말았다. 결국 사하라 사막으로 추락하고 만다. 내면의 아이의 꿈은 화가였지만, 현실은 비행사였다. 겉과 속이 다른 삶을 이어오며 진실을 털어놓을 친구조차 없는 고독한 하늘을 비행하던 중에 예고 없이 불시착해 버렸다.


“첫날 밤 나는 사람이 거주하는 모든 땅으로부터 
수천 마일이나 떨어진 사막에서 잠을 잤다. 
난파를 당해 뗏목 위에 몸을 싣고 바다 한가운데 
떠도는 사람보다 훨씬 더 나는 외로웠다.” 


  외로운 사막에 머물게 된 그는 자기 내면의 어린아이, 어린왕자와 조우하고 대화한다. 장미, 엄마, 이웃 사람들과의 관계회복을 위해 먼저 화해해야 했던 건 바로 자신의 내면에 상처받은 채 살고 있는 어린 시절의 자신과의 관계였다. 어린왕자가 여우를 만나지 못했다면 장미를 잊고 어른이 되어갔을지도 모른다. 화자가 사막에서 어린 왕자를 만나지 못했다면, 생명의 샘을 찾지 못하고 끝없는 방황에 내몰렸을지도 모를 일이다. 세상을 얻어도 자기 영혼을 잃어버리면 무슨 소용일까. 불편했던 장미를 떠나온 어린왕자, 사막에서 뒤틀린 관계에 대한 여우의 족집게 특별강좌를 통해 길들임과 책임에 대해 배운다.


  동화의 마지막을 알 수 없듯 그의 종말도 묘연하다. 뱀에 물린 어린 왕자는 “나는 당신을 떠나지 않을 거예요”라는 말을 남기고 장미가 있는 자기별로 돌아갔다. 어린왕자는 늙지 않았고, 순수하고 변함없는 아이로 우리 안에 여전히 살고 있다. 성인이 된 후 실용적인 현실 세계에서 자칫 상실하기 쉬운 어린 시절의 맑고 순수한 나를 보존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래야 참된 관계를 맺어갈 수 있을 테다.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18:3).” “타자를 지옥”으로 여기는 관계파괴의 사막에서 벗어나는 탈출구는 숫자와 계산에서 해방된 어린아이와 같은 순수함의 회복일 것이다. 

이종인 목사

울산언약교회 담임

울산대학교 철학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