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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문화/신앙에세이

친절하게 배웅까지

 

 결혼 전에 있었던 일이다. 다리 수술하러 병원에 가기 위해 집을 나섰다. 추수철이라 일손이 모자라서 부모님 대신 두 살 위의 언니랑 함께 가기로 했다. 충북 지역에서는 여수까지 바로 가는 기차가 없어서 조치원역까지 버스를 타고 나가야 했다.

  조치원역은 경부선 기차가 다니는 역으로 서창역과 내판역 사이에 있다. 우리는 밤차를 타려고 해가 설핏할 때 나섰기 때문에 캄캄한 밤이 되어서야 역에 도착했다. 그곳은 환승역이라 그런지 진풍경들이 벌어지고 있었다. 

  가을밤이라 싸늘한데도 노숙자들이 곳곳에서 신문지 몇 장을 이불 삼아 잠을 청하고 있었다. 어떤 걸인은 잔돈이 없다고 하는 사람을 끈질기게 따라다니더니 결국, 몇 푼을 얻어 냈다. 한 남자는 아가씨를 강제로 끌고 가려고 했다. 여자가 발버둥을 쳤지만, 억센 남자의 힘을 이겨내지 못하고 체념한 듯 순순히 그의 뒤를 따라갔다. 험상궂어 보이는 남자에게 봉변을 당할까 두려웠는지 부도덕한 행위에도 선뜻 나서서 여자를 구해주려는 사람이 없었다.

  그런 광경을 처음으로 본 나는 공포감을 느꼈다. 언니와 내가 저렇게 당해도 도와줄 사람이 없으리라 생각하니 세상이 무서웠다. 언니에게 바짝 다가가서 앉았다. 내 어깨를 감싸 안은 언니의 손도 바르르 떨고 있었다. 

  그때였다. 양복을 말끔하게 차려입고 이웃집 삼촌처럼 수더분하게 생긴 아저씨가 우리의 모습이 안 돼 보였던지 너털웃음을 웃으며 다가왔다. 아저씨는 나쁜 사람 아니라며 걱정하지 말라는 식으로 언니와 나를 벽 쪽으로 앉으라 하고 적으로부터 막아주겠다는 듯 바깥쪽에 앉더니 다정하게 말을 걸었다. 

  내가 처음 접한 바깥세상은 천국과 지옥이 공존하는 것 같았다. 아가씨를 강제로 끌고 가다시피 한 나쁜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이처럼 좋은 사람도 있으니 말이다. 굳어있던 언니의 표정도 많이 안정되어 보였다. 두 시간이 넘도록 이야기를 나누던 아저씨는 우리가 승차할 시간이 되자 개찰구까지 가방을 들어주었고 손까지 흔들어 주면서 배웅해 주었다. 

  힘들게 여수병원에 도착했다. 수술대에서 의사와 간호사들은 서로 손을 맞잡고 기도해주었다. 부모님이 안 계신 서늘한 수술실에서 듣는 기도 소리는 신의 따뜻한 음성처럼 들렸다. 간호사가 들고 있던 바늘이 내 구부린 척추 속으로 들어가는 느낌이 들더니 이내 까무룩 잠이 들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나를 깨우는 언니의 목소리가 아득하게 들리더니 마취가 풀렸는지 점점 또렷이 들렸다. 수술이 잘 되었다는 말이 무엇보다 반가웠다. 통으로 깁스를 한 나는 퇴원 후에도 계속 치료를 받기 위해 병원 앞에 있는 여인숙에서 지내는데 어느 날, 주인 아주머니가 전화 받으라고 다급하게 소리쳤다. 

  통화하고 온 언니가 “그 아저씨가 사기꾼이라니!” 하고 믿을 수 없다는 듯 혼잣말을 하면서 헛웃음을 지었다. 그 아저씨란 조치원역에서 겁에 질려 있을 때 든든하게 우리를 지켜주고 친절하게 짐까지 들어주었던 분을 말했다.  

  그렇게 다정한 이웃 삼촌처럼 보였던 사람이 경찰로 둔갑하여 어머니가 계시는 시골집에 갔다고 했다. 언니와 내 이름을 운운하며 여인숙에 불이 나서 중태에 빠져 있으니 병원비를 준비해서 병원에 함께 가자고 했다는 것이다. 그 시절 시골에는 이런 사기에 눈이 밝지 못했다. 초가집들이 옹기종기 따개비처럼 붙은 산동네에 살면서 사립문을 닫아본 적 없던 어머니는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놀란 어머니는 돈을 구하러 동네를 돌았다. 그 시절엔 집에 기백만 원씩이나 되는 돈을 가진 집이 드물었다. 이웃집을 돌고 돌면서 구해도 경찰이 말한 액수에 미치지 못하자 어머니는 윗마을 이장 집으로 갔다고 했다. 이장은 어머니의 이야기를 듣고 나서 석연치 않은 면이 있다며 확인하는 차원에서 여인숙 전화번호를 돌려준 것이었다. 어머니는 죽어간다던 딸의 목소리를 듣고는 기함을 했다.  

  언니의 얘기를 듣고 있으려니 머릿밑이 쭈뼛해졌다. 사기꾼은 기차역 대합실에서 먹이를 찾고 있었고 그 레이더망에 무서움에 떨고 있던 우리는 좋은 먹잇감으로 걸려든 거였다. 대화를 유도해서 이런저런 정보를 얻어낸 사기꾼은 어머니를 찾아가서 믿음을 주려고 경찰 행세를 했고 함께 가자는 말을 했을 것이다. 만일 병원비를 마련해서 출발했더라면 시골 후미진 곳에서 돈만 빼앗고 어머니를 내팽개칠 게 뻔한 일이었다. 

  사기꾼의 꼼수에 나와 언니는 보기 좋게 넘어간 꼴이 되었다. 그러나 뭐든지 계획한 대로 쉽게 되는 일은 없다. 부정한 일이 그럴듯하게 잘 넘어가는 것 같았으나 들통 나서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일이 많지 않은가. 같은 짓을 반복하던 그가 철창 속에서 생활하게 되었다는 걸 알게 되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꼬리가 길면 반드시 밟힌다는 말을 몰랐던 모양이었다. 가장 선하면서도 무서운 존재가 사람인 것만 같아서 서글프다.


김용숙 집사
하늘샘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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