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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문화/신앙에세이

까막눈

 

  프랑스 출장 중에 잠시 쉬어갈 여유가 있어 노천카페를 들렀다. 직원이 다가와서 주문을 받았다. 영어로 커피를 주문했더니 알아들을 수 없는 불어로 대답을 했다. 동일하게 다시 주문했지만 계속 알아들을 수 없는 말만 돌아왔다. 도저히 대화가 되지 않아서 일행 중 회화에 능통한 사람을 찾아서 겨우 주문할 수 있었다. 알고 보니 원하는 커피가 따뜻한 것인지 차가운 것인지 확인하기 위해 되물었던 것이었다. 


  짧은 출장 일정에도 말과 글이 통하지 않는 곳에서 ‘문맹’으로 사는 것은 답답한 일이다. 관광지나 외국인을 배려하는 곳이라면 조금은 소통이 되지만 그렇지 않은 지역일 때는 꼭 필요한 일정 외에는 숙소 밖을 나설 생각을  하지 않는다. 이럴 때면 외국어 공부를 다시 해볼까 싶어진다. 그러다 영어도 어설픈데 또 다른 언어까지 생각해보다 쉽사리 엄두가 나지 않아 이내 마음을 접곤 한다.


  읽고 말하고 듣는 것이 너무나 익숙하고 당연한 일이지만 분명 공부해야 할 수 있는 일이다. 한국에서 태어나 한글을 익히는 과정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세종대왕이 어린 백성을 어여삐 여겨 한글을 만든 것이 얼마나 큰 복인지 모른다. 그 덕분에 우리나라의 문맹률은 현저히 낮은 편이다. 한글은 익혀 쓰기에 쉽기도 하고 의무 교육 과정에서 국어를 자연스레 공부하니 우리나라에서 문맹은 찾기 힘들다.


  아버지는 컴퓨터를 다룰 줄 모른다. 이른바 ‘컴맹’이다. 아버지는 일평생 농사를 짓거나 운전을 하면서 살아왔기에 컴퓨터를 사용할 기회가 없었다. 아버지의 삶을 되짚어 보면 컴퓨터를 배울 기회도 딱히 없었다. 컴퓨터가 분명 편리하고 다양한 도움을 주는 것은 알지만 아버지에게는 꼭 그렇게 필요한 것이 아니었다.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개인용 컴퓨터가 도입된 때를 생각해 보면 격세지감을 느낀다. 지금은 많은 사람이 윈도우 운영체제로 컴퓨터를 사용하고 있어 마우스로 클릭만 하면 되니 정말 간편하다. 내가 처음 만났던 8비트 컴퓨터나 DOS(Disk Operatiing System)로 부팅이 되던 컴퓨터는 일일이 명령어를 넣어 사용했다. 정말 공부하지 않으면 사용할 수 없었다. 일반 사람들이 편하게 사용할 수 있도록 컴퓨터의 성능도 개선되고 운영체제와 소프트웨어도 많이 발전해서 더 이상 우리 주변에 ‘컴맹’을 찾기 힘든 세상이 되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여전히 컴맹이며 아직도 컴퓨터를 배울 생각이 없다. 컴퓨터를 꼭 사용해야 할 일이 있으면 가까이 있는 자녀들이 대신해 주면 된다. 그리고 곰곰이 생각해 보아도 꼭 컴퓨터를 사용해야만 하는 일이 별로 없다.


  ‘컴맹’에 이어서 ‘넷맹’이 등장했다. 인터넷으로 대표되는 온라인 세계로 들어가지 못하는 것을 말한다. 컴퓨터를 사용하지 않으니 자연스레 넷맹이 되는 경우가 많기도 하다. 온라인 세계는 우리 삶에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시장에 가던 걸음이 마우스 클릭으로 필요한 물건을 주문하게 되었다. 손글씨로 정갈 있게 쓰던 편지는 이메일이 대신한다. 사람을 만나는 일, 공부하는 것까지 온라인으로 이뤄지는 세상이다.


  우리는 매일 새로운 것이 쏟아지는 시대에 살고 있다. 4차 산업혁명 시대에 돌입한 것이다. AI, 빅데이터, 클라우드, 블록체인까지 새로운 기술과 개념이 등장한다. 그저 낯설고 부담스러운 것들이 가득하다. 굳이 몰라도 당장 불편한 것은 아니지만 멀지 않은 시기에 우리 삶을 변화시킬 기술이거나 이미 현실이 된 것들이다. 


  평생 공부하는 마음으로 글자도 깨치고 컴퓨터도 배우고 온라인 세상을 누비며 쫓아왔다. 하지만 이제는 더 이상 이런 것들을 알고 이해하기가 벅차다. 결국 꼭 필요한 것이 아니면 조금의 불편함과 도태될지도 모른다는 불안함을 감수하며 살게 된다.


  그러나 다른 것들은 다 포기해도 포기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관계의 언어는 일평생 공부하며 살아야 한다. 아내의 이야기 속에 숨겨진 마음을 잘 읽을 줄 알아야 한다. 표면적인 표현 너머에 있는 그 마음을 헤아릴 줄 모르면 가정의 화목을 쌓아가기 힘들다. 침묵으로 울부짖는 자녀의 울음소리를 들을 줄 알아야 한다.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거친 말을 쏟아내는 젊은 친구들의 여린 마음도 돌아볼 수 있어야 한다.


  ‘배우지 못하여 글을 읽거나 쓸 줄을 모름’ 문맹의 사전적 의미다. 그저 글을 모르는 사람을 뜻하는 말일 줄 알았는데 배우지 못하여 그렇다는 이유가 붙어있다. 아픈 단어다. 배우지 않은 것이 아니라 배우지 못한 것이라 더 아픈 단어다. 문맹이나 컴맹, 넷맹 같은 것들은 그저 조금의 불편함과 불안함이면 충분한 일이다. 그러나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일은 배워야 하는 일이다. 배우는 것은 수고가 필요하다. 상대의 마음을 충분히 헤아리고 듣기를 노력하는 마음이 필요하다. 부디 관계의 까막눈은 되지 말자.


안상후 장로
청도 송금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