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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세상사는 이야기

바알의 부활

 

  그때는 다들 그러하셨겠습니다만 아버지는 사시사철 탓하지 아니하시고 단 한 번도 지게를 나무라지 아니하셨습니다. 그렇게 해서 다랭이 논 몇 마지기를, 그것도 한나절이나 등짐을 져야 다다를 수 있는 산비탈에 일구셨습니다. 가난을 숙명처럼 받아들이셨지만, 처자식에게만큼은 배곯지 않게 하겠다는 일념으로 동네 바로 턱밑에 문전옥답을 장만하셨습니다. 

 

  초복이 다가오면 모내기한 벼들이 어느새 자라서 허벅지를 가릴 정도가 됩니다. 가물거리는 기억 속에서 떠오르는 그림 한 폭이 있습니다. 논 마지기 한가운데 나뭇가지를 꺾어 세우고 밥 한 숟가락, 떡 몇 조각을 차려놓습니다. 들짐승이라도 굶기지 않으려는 뜻도 되겠습니다만 가을 풍년의 수확을 기대하면서 나름대로는 알지 못하는 신에게 예를 다하는 것입니다.

 

  가난의 설움에서 벗어나려는 염원이 깃들어 있습니다. 처자식의 허기진 배를 하얀 이밥(쌀밥)으로 한 끼라도 먹이고자 하시는 희망을 담습니다. 가을 풍년을 기대하는 지극정성으로 하늘과 땅을 감동하게 하시려는 지성이면 감천의 바람에 간절합니다.

 

  가나안 땅의 족속들은 이른 봄씨앗을 뿌린 들에서 풍성한 열매를 기대하며 조상들로부터 전해 내려온 제사를 드립니다. 그들에게 풍요와 번성을 가져다주는 바알과 아세라를 다시 불러내야 했습니다. 겨우 잠에서 깨지 않는 바알을 깨워 내는 것입니다. 그들의 제사 행위는 나뭇가지를 세우고 남녀가 부둥켜안고 뒹굴며 바알 신을 깨우는 것입니다. 할 수 있는 대로 바알과 아세라를 기쁘게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럴수록 남녀의 성적 행위는 타락한 본성을 나타낼 수밖에 없습니다.

 

  바알의 부활을 기다리는 것은 잘 먹고 잘살겠다는 본능에 따른 것입니다. 바알을 할 수 있는 한 기쁘고 즐겁게 하는 행위를 서슴지 않을 수 있는 것은 자기들에게 풍요를 가져다줄 것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음란인지 부정인지 불의인지조차도 알지 못합니다. 그저 동물적 본능에 충실한 것이 풍성한 수확으로 이어진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당신이 기다리고 소망하고 있는 부활의 의미는 어떠합니까? 잘 먹고 잘살기 위한 몸부림에서 찾아내고자 하는 것이라면 동물적 본능과 행위일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의 부활이 아니라 바알의 부활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온갖 부정과 불의와 부패를 일삼고 있으면서도 전혀 죄책감이나 죄의식이 없습니다. 어디까지나 자기 정당성과 자기변호에 익숙해집니다. 자기 의가 정의가 되어버립니다.

 

  이 시대의 사회 현상이 그렇습니다. 저마다의 부활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화려하고 찬란한 부활입니다. 정치 지도자들은 그 부활을 통하여 새로운 희망의 아이콘이라고 자기를 자랑합니다. 자신의 허물과 부정, 불의와 부패한 모습을 철저하게 가리기 위해 누군가의 희생제물(scapegoat)을 만들어 냅니다. 그래서 면죄부가 되고 자기 불의를 사회정의라는 옷으로 갈아입습니다. 사람들은 팔색조의 화려함에 열광하기까지 합니다. 바알 신의 영광을 재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알이 부활한 것입니다.

 

  어떠한 부활을 기다리고 계시는지요? 바알의 부활입니까? 예수의 부활입니까? 예수님처럼 속죄양(scapegoat)이 되어 바알의 제단에 피를 뿌리는 사전제사가 없다면 그리스도의 부활을 맞이할 수는 없습니다. 이 사회를 그리스도의 부활의 현장이 될 수 있도록 교회가 나서야겠습니다. 당신이 나서야 할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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