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19가 빚은 사회현상은 관계가 멀어지고 깨어지는 것이다. 음압병실, 자가격리, 위급한 환자가 생겨도 단 한 사람의 보호자 외에는 병실 출입마저 금지되고, 목사의 심방과 기도를 그렇게도 원하는 데도 대면 자체가 금지되다 보니 모든 것이 격리되어 버리고 만다.
지척에 딸, 사위가 살고 있다. 성경적 가치로, 하나님의 뜻대로 살겠다는 거룩한(?) 뜻이 있었는지 손자 손녀가 네 명이다. 4인 이상 모임이 금지된 까닭에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손자들을 제대로 볼 수가 없다. 한 놈씩 불러내기에는 아직 너무 어리기 때문에 보호자 없이는 한 발자국도 갈 수 없는 처지이고 보면 생이별이 생이별이 아니다. 지척에 있는 그림자만 들여다봐야만 한다.
서울에 사는 큰딸 또한 아들 둘인데 네 식구가 되어 할아버지, 할머니와 대면할 생각마저 접고 살수밖에 없다. 얼마 전 새집으로 이사를 했지만, 딸내미 집이라고 해서 마음 편히 드나들 수도 없고, 아예 접근조차도 허락되지 않는다. 곧 설 명절일 텐데 이산가족 아닌 이산가족이 되는 슬픈 현실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답이 없다.
먼발치에서라도 만나고 한 번쯤 안아보고 싶은 이들도 더러 있는데 행여 누가 보려나 눈치를 살펴야 하고 혹여 어떤 정직한(?) 어느 누구로부터 고발을 당한다면 꼼짝없는 실행법 범죄자가 된다. 전과를 늘리면서까지 그렇게 할 이유도 있을 수 있을 것이다. 전 국민이 전과자가 되는 시대를 한번 기대해보자.
가까운 친구들이나 이웃과의 만남은 더욱 망설여진다. 약속 잡기가 아예 거북스럽다. 이제나저제나 풀리려나 기대해 보지만 이상하리만치 고무줄처럼 늘어지기도 하고 줄여지기도 하는 방역 정책이 어떻게 전개될지 알 수가 없다. 기약 없는 약속을 흘려 보지만 기약이 기약이 되지 못한다. 약속 날짜들마저 잡아 놓다가도 제한조치가 불가피하여 연기해야겠다는 정부의 발표에 속상함만 더해지는 것이다.
얼마 전엔가 연말연시쯤일 텐데 유력한 정치인이 지역유지를 불러다 식사 자리를 마련했는데 공교롭게도 한식당, 그것도 옆 테이블에서 우연히(?) 만나 식사도 하고, 대화도 하고, 안부도 묻고. 아마도 자기들만의 속 깊은 대화도 몇 마디 있었지 않나 싶은 생각이 든다.
하필 그것이 누군가의 제보로 언론에 큰 글자로 보이게 된 것이다. 우연한 만남에서 인사 정도로 끝났다고 해서 방역지침을 어기지 않았다고 질본에서나 정부 쪽에서 위법이 아니라고 결론을 내렸다고 했다. 그것을 보면서 그렇지는 않으시겠지만, 최소한 정치지도자와 시민사회 지도자들의 만남이 어쩐지 꼼수는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하기사 생각 따라 다르겠지만 꼼수로 그만한 자리에 올라서신 분이라고 생각하니 또 어떤 꼼수가 나올지 은근히 기대되기도 한다.
얼마 전에는 정부 대변인 방송을 자처하시는 영향력 있는 몇 분이 방송이 끝나고 피드백으로 카페에서 만난 사진이 떴다. 그것을 또 사진을 찍고, SNS에 공유하고, 언론과 방송에 내보내는 것도 우스꽝스러운 것이지만 하필 그때 왜 사진에 찍혔을까? 어쩌면 재수 없는 날이었는지도 모르겠지만 그 꼼수일 것 같은데 어느새 저녁연기처럼 어둠 속으로 묻혀버렸다.
배운 것이 도적질이라고 했던가, 너도, 나도 꼼수를 한번 부려보고 싶어질 것이다. 누구는 꼼수도 정수가 되고 누구의 정수는 꼼수가 되는 뒤바뀐 세상살이 속에서 한두 번쯤 꼼수를 부릴 수 있는 것 또한 이 시대의 낭만일 수도 있겠다.
생각이 이쯤에 미치자 세상에 보이고 드러나는 모든 것들이 꼼수처럼 여겨진다. 정치도, 교육도, 언론도, SNS도, 노동자와 농민들도, 늙은이들도, 젊은이들도, 어른도, 아이들도 꼼수에 능해지는 것 같다. 누가 얼마나 그럴듯한 꼼수가 통하는지 그것이 결국 정수가 되는 세상이다.
오늘 나는 또 어떤 꼼수를 생각해야 할까? 이것이 오늘 시대 상황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비법인 것 같다. 꼼수란 참 좋은 것임에는 분명한가 보다. 웃어른들의 꼼수를 아랫것들은 그대로 학습하는 것이 아닐까? 꼼수의 성공과 승리를 위하여 건배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