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오피니언/세상사는 이야기

혁명공약

 

  열여섯 가구가 옹기종기 모여 사는 고향 마을에 외지인들의 출입이 거의 없을 지경이었지만, 철마다 사진사 아저씨가 호랑이 인형을 힘겹게 지고 찾아오셨다. 그때 착한 사진사 아저씨가 없었다면 어린 추억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을 테지만, 그나마 아저씨 덕분에 빛바랜 흑백사진 몇 장이 남아 있다.

 


  어느 날부터인가 더 이상 사진사 아저씨는 볼 수 없었다. 여러 소문이 무성했지만, 그토록 착해 보이고 인심 좋은 아저씨가 간첩이었단다. 그야말로 간첩은 표식이 없었다. 너도, 나도 잘 살펴보아야겠다고 다짐하면서도 진작에 신고했다면 포상금으로 집 한 채 값은 벌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도 있었다.


  그 아저씨는 왜 숨어서 단파 라디오를 듣고 사람들을 속여가면서까지 착한 노릇을 하셨어야만 했을까? 사상과 이념이 무엇인지조차 몰랐지만 같은 조국인데 그렇게 간첩으로 암약해야 하고 가끔은 삐라를 뿌리고 다녔을까? 그 당시만 해도 남쪽보다 북쪽이 훨씬 더 잘 살았다고 했다. 사회주의 국가 건설이 성공하는 듯했고 공산주의 혁명이 희망이 되었었다. 주체사상이라는 멋있게 포장된 상품이 세계 어디에 내놓아도 그럴듯하게 보인 것이다.

 


  남조선 인민을 해방시켜야 한다는 정치철학과 사상과 이념은 새마을 운동과 더불어 이미 사문화되었는데도 여전히 인기다. 혁명과업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과감히 자신을 던져버릴 수 있는 국가관과 용기가 대견스럽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라 의식화되고 세뇌된 결과인 것이다.

 


  5.16 군사 혁명이후 혁명공약이 있다. 부지런히 외웠던 기억이 난다. 6개 항 중에 그 첫 번째가 반공(反共)을 국시(國是)의 제일의(第一義)로 삼고 지금까지 형식적이고 구호에만 그친 반공 태세를 재정비 강화한다. 혁명공약을 비롯해서 국민교육헌장, 새마을 노래를 기억하고 계신다면 꼰대임에 틀림없다. 꼰대들이 이룬 혁명과업을 사회주의 혁명에 비유할 수 있을까? 아무것도 한 일이 없고, 땀도 눈물도 흘려 본 적이 없는 사람들, 더구나 동족상잔이라는 피를 맛보지 않은 사람들의 사치가 기승을 부린다. 숟가락 하나 더 얹어두는 것이 아니라 아예 밥상을 통째로 삼키려는 자들이 연전연승하고 있다.

 


  6.25 한국 동란이라고 해야 하나? 역사가 무엇이라고 규정하는지 자기가 역사라고 주장하는 고집불통들이 많다. 전후 세대인 나 역시 보릿고개를 지나오긴 했지만, 처절한 굶주림과 헐벗은 가난은 경험해보지 못했다. 그런데도 내 이야기가 전설처럼 들려진단다.

 


  언더우드와 아펜젤러가 경험했던 ‘조선’. 그 조선을 이다지도 동경하고 있는 것이 사회주의 혁명일까? 차라리 다시 한번 군사혁명의 혁명공약을 외치고 싶다. 어쩌면 잊혀진 전설을 되살려내고 싶은 바램일 것이다.

 


  하여튼 핵을 개발하고 전쟁놀음을 한다 해도 그것이 어디까지나 게임 같은 가상현실에서 얼마든지 즐길 수 있었으면 좋겠다. 어떤 모습으로든 더 이상 전쟁이 없는 그런 평화의 조국, 삼천리 금수강산을 기대해보자! 제3의 혁명은 무엇으로 어떻게 다가오고 있을까? 막연한 기대가 아니라 함께 이루어 가보자!

 

'오피니언 > 세상사는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오징어  (0) 2021.10.12
'정의와 공정'으로 쓰고' 내로남불'이라 읽는다.  (0) 2021.07.06
꼰대와 관종  (0) 2021.04.30
바알의 부활  (0) 2021.04.01
꼼수  (0) 2021.02.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