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주님을 찬양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주님의 말씀을 깊이 연구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기도하며 주님의 뜻을 구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전도를 실천하여 주님의 나라를 확장하는 대열에 동참하고 싶다. 그중에 올해의 가장 강한 소망은 한 사람에게라도 주님의 도를 전하여 그를 회심케 하는 것이다.

그런데 전도에 관하여 생각할 때마다 나를 괴롭히는 것이 있다. “나는 왜 그리스도인으로서 세상에 선한 향기를 풍기지 못하는가?” 때로는 부끄럽게도 이웃 종교인인 불교 신자들에게서 더 깊은 삶의 미덕을 발견하곤 한다. 그들이 보여주는 인자함, 묵묵히 베푸는 손길, 그리고 갈등 앞에서도 참고 인내하는 책임감 있는 모습들 말이다. 자비를 수행의 근본으로 삼는 그들의 삶을 보며 문득 거울 속 내 모습을 되돌아보게 된다. 왜 나는 그들만큼 온유하지 못하고, 그들만큼 품어주지 못하며, 조그만 손해 앞에서도 이토록 안달복달하는 걸까.
어쩌면 나는 하나님께서 죄인을 조건 없이 용서하신다는 위대한 은혜를 너무 값싸게 여기고 있는지도 모른다. “회개하기만 하면 다 용서받는다”는 안일함 속에서, 회개 이후에도 같은 삶을 반복하면서도 별다른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는 신앙이 되어버린 것은 아닐까. 예수 그리스도의 피 값으로 얻은 구원을 감격스러운 선물이 아니라 당연한 권리처럼 여기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게 된다.
불교에 자비가 있다면 기독교에는 사랑이 있다. 불교의 자비가 수행과 절제를 통해 드러난다면, 기독교의 사랑은 먼저 베풀어진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응답이다. 나는 비워서 사랑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이미 채워주신 사랑 때문에 비로소 비울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 차이를 알면서도 정작 나는 하나님께 받은 은혜에 걸맞은 삶을 살지 못할 때가 많다. 때로는 이웃 종교인들이 보여주는 인내와 절제의 모습을 보며, 사랑을 말하는 내가 오히려 사랑을 실천하지 못하고 있음을 부끄럽게 돌아보게 된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만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그 진리가 세상 속에서 설득력을 가지려면 먼저 내 삶 속에서 사랑의 열매로 나타나야 한다. 복음의 진리는 입술의 주장만으로 증명되는 것이 아니라 삶의 증언을 통해 드러나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그 사랑을 몸소 보여주셨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요한복음 15:13)
예수님은 가장 낮은 곳으로 임하셨고, 세상이 손가락질하는 죄인들의 친구가 되셨으며, 마침내 친구를 위해 십자가에서 생명까지 내어주셨다.
나는 어떠한가. 목숨은커녕 자존심 한 자락조차 이웃을 위해 내려놓지 못할 때가 많다. 누군가 내 의견에 이의를 제기하면 상한 자존심이 먼저 반응하고, 작은 오해에도 마음이 쉽게 흔들린다. 용서받은 자의 책임은 외면한 채 용서받은 자의 권리만 누리려 했던 신앙의 모습을 내 안에서 발견한다.
교양있는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단지 고상한 말씨를 쓰거나 세련된 문화생활을 향유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것은 세상의 상식과 교양을 넘어 예수의 인격을 닮아가는 일이다. 남을 쉽게 정죄하지 않고, 자신의 부족함을 먼저 돌아보며, 옳음을 주장하기보다 사랑을 실천하는 삶이다.
그래서 세상을 향해 억울하다고 외치기보다 먼저 스스로를 돌아보아야겠다고 다짐한다. 세상의 비판 앞에서 변명하기보다, 그 비판 속에 담긴 경고를 겸손히 들을 수 있어야 한다.
다행인 것은 예수님께서 완벽한 사람을 제자로 부르신 것이 아니라 부족한 사람들을 불러 변화시키셨다는 사실이다. 베드로도 처음부터 성숙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넘어지고 실패했지만 결국 주님의 사랑 안에서 변화되었다. 나 역시 하루아침에 달라질 수는 없겠지만, 어제보다 조금 더 온유하고 조금 더 사랑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을까.
오늘 하루, 내 삶의 자리에서 예수님이 보여주신 ‘친구를 위한 사랑’을 아주 작은 것부터 시작해 보려 한다. 구원을 권리로 착각했던 오만을 내려놓고, 타인의 선함 앞에서 부끄러워할 줄 아는 겸손을 회복하고 싶다. 내 안의 독선을 비워내고, 그 자리에 예수의 온유함을 조금씩 채워 넣는 것. 그것이 내가 이 땅에서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으로 살아가는 진짜 ‘교양’의 시작일 것이다.
말로 전하지 못한 복음이 있다면 결국 내가 살아내는 삶이 그 복음을 대신 증언하게 될 것이라 믿는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사랑을 닮아가는 삶, 그것이 내가 꿈꾸는 교양있는 기독교인의 모습이다.
“너희 말을 항상 은혜 가운데서 소금으로 맛을 냄과 같이 하라 그리하면 각 사람에게 마땅히 대답할 것을 알리라”(골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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