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얼마 전, A 기업 사원들의 시위 소식을 들었다. B 기업의 사상 최고치 성과금 타결 소식이 전해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벌어진 일이었다. B 기업과 상응하는 성과금 산정 방식을 요구하며 시작된 시위는 언뜻 보기에 정당한 요구로 보였지만, 실상은 비교에서 비롯된 상대적 박탈감의 결과 같았다. 타 대기업이나 중소기업의 성과금에 비하면 이미 높은 수준이지만, 더 가진 곳을 바라보며 느낀 상대적 박탈감이 결국 시위로 귀결된 것이다.
그런 감정은 비단 기업만의 모습은 아닐 것이다.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으로 가득한 이 세계에서 국가도, 도시도, 개인도 예외 없이 상대적인 비교의 렌즈로 세상을 바라보며 산다. A 기업 사원들의 시위 소식을 접한 날 문득, 오래전 여행했던 인도네시아의 바탐섬이 떠올랐다.

바탐은 인도네시아 리아우주(州)에 속한 섬으로, 해협 하나를 사이에 두고 도시 국가 싱가포르와 마주하고 있다. 1960년대 중반, 바탐은 마치 신생 도시 국가 싱가포르의 뒷마당처럼 활용되기 시작했다. 국토가 좁은 싱가포르로선 무역 배후지가 필요했고, 바탐은 그 역할을 맡기에 적절했다. 이후 바탐은 인도네시아 본토와 싱가포르를 잇는 교역의 통로가 되었고, 바다 밑에 묻힌 석유는 송유관을 따라 싱가포르 전역으로 흘러 들어가 돈이 되었다. 경제성에 주목한 인도네시아 정부는 전국에서 사람들을 모집해 바탐섬으로 보내기 시작했다. 지금도 바탐섬 앞바다에는 석유시추선들이 떠 있다.
바탐의 경제를 견인한 또 하나의 동력은 골프장이었다. 처음엔 싱가포르와 호주 등 인근 부유한 나라의 골퍼들이 찾던 곳이었지만, 입소문이 퍼지면서 2017년 이후로는 한국과 홍콩, 일본에서도 골프 여행객들이 몰려들었다. 싱가포르를 거쳐 섬으로 들어오는 이들 덕분에 바탐은 점점 인도네시아 내에서도 경제력 높은 지역으로 성장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눈부신 발전과 함께 그 그림자도 짙어졌다. 바탐 사람들에게 기준이 된 건 인도네시아 내 다른 지역이 아니었다. 눈앞의 화려한 싱가포르였다. 고도로 성장한 이웃을 가까이 두고 살면서, 그만큼의 수준에 닿을 수 없는 현실에 바탐은 점점 열등감에 시달리게 되었다. 싱가포르 덕분에 얻은 후광은 달콤했지만, 그 빛에 비교당하며 사는 일은 씁쓸했던 것이다.
1970년대에 바탐은 공업화 구역으로 지정되었지만, 실제 산업은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석유 송유관과 관광업, 그리고 싱가포르 배후 도시로서의 기능이 있었음에도 여전히 개발도상국의 도시 풍경을 벗어나지 못했다. 자국의 발리처럼 고도로 개발된 휴양지와도 달랐다. 무엇보다 정수시설이 낙후되어 관광객들은 반드시 생수를 사 마셔야 하는 현실 하나만으로도 그 차이가 분명하다.
나 역시 대부분의 여행자처럼 싱가포르에서 페리를 타고 바탐으로 들어갔다. 솔직히 말하면 한국의 제주도나 거제도처럼 특색 있고 매력적인 섬을 기대했다. 그러나 마천루가 즐비한 싱가포르에서 막 건너간 탓이었을까, 바탐의 첫인상은 어딘가 초라하고 어설펐다. 그렇다고 자연미로 채워진 곳도 아니었다. 자연의 안식도 도시의 세련미도 없는 채, 무질서한 개발이 한창이었다. 이곳저곳에 일관성 없이 솟아오른 건물들과, 어디서 본 듯한 복제 풍경들이 눈에 거슬렸다.
무엇보다 안타까웠던 건, 바탐이 마치 ‘무언가를 끊임없이 따라잡으려 애쓰는 땅’처럼 보였다는 점이다. 여행객들은 싱가포르보다 훨씬 저렴한 물가에 반해 쇼핑센터를 찾았지만, 그뿐이었다. 바탐만의 고유한 아름다움이나 특별함은 좀처럼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저 비교의식 속에서 화려한 싱가포르를 따라잡으려 조급하게 달리는 모습이 안쓰럽게 느껴졌다.
그래서일까. 바탐에서 싱가포르로 돌아오는 배 안에서 마음 한구석이 무거웠다. 도시로서도 자연으로서도 정체성이 흐릿해진 그 땅은, 마치 무언가를 끊임없이 좇다 결국 자신을 잃어버린 현대인의 자화상처럼 느껴졌다. 싱가포르라는 화려한 기준에 자신을 맞추려 애쓰는 바탐의 모습은 이 세계가 얼마나 쉽게 물질적 성공이라는 척도에 휘둘리는지를 보여주는 단면 같았다.
우리는 나보다 더 많이 가진 사람, 더 잘나가는 조직, 더 빠르게 앞서가는 사회를 바라보며 쉽게 비교하고 조급해한다. 속도전에 밀리지 않기 위해 자신을 다그치느라 정작 하나님께서 주신 고유한 사명의 자리와 은혜는 돌아볼 여유조차 없다. 하나님께서 나를 어디에 두셨고 어떻게 쓰시려는지 묻기보다는, 내가 어디까지 올라갈 수 있을지, 얼마나 주목받을 수 있을지를 먼저 고민한다. 그러니 마음은 언제나 공허하고 참된 평안은 사라져 간다.
하나님은 우리 각 사람에게 사명의 자리를 주셨다. 다른 사람의 속도와 기준에 얽매이지 않고 그분이 내게 고유하게 허락하신 삶을 기쁨과 감사로 살아내는 것이 참된 만족과 평안을 얻는 길임을 다시금 깨닫는다. 비록 작고 보잘것없어 보일지라도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지키며 산다면 누구의 삶인들 아름답지 않겠는가. 성급한 비교의 추종이 아닌, 주님의 시선 안에서 걸어가는 길이야말로 가장 복된 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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