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여름, 넷플릭스 드라마 시리즈 ‘더 크라운(The Crown)’을 정주행했다. 영국 엘리자베스 2세 여왕 치세의 정치사와 왕가의 이야기를 다룬 이 드라마는, 역사를 좋아하는 나에게 꽤 흥미로운 작품이었다. 이야기는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결혼식으로부터 시작하지만, 회상 장면과 대사를 통해 때로는 빅토리아 여왕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기도 한다. ‘해가 지지 않는 나라’ 대영제국을 구현했던 선조들의 자부심, 특히 빅토리아 여왕 대의 영광은 윈저 왕가의 굵은 줄기를 이루고 있었다.
내게 윈저 왕가와 주변 정치인들의 이야기는 인간 사회의 축소판처럼 느껴졌다. 자부심 강한 왕족과 정치가들이 개인으로서 겪는 정체성의 혼란과 고뇌는, 인간 존재의 본질을 마주하는 듯한 연민을 불러일으켰다.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을 비롯해 모든 등장인물은 영광을 누리는 만큼 정체성 혼란으로 아파하거나 방황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인상 깊었던 인물은 ‘윈스턴 처칠’이었다. 그는 영국 61대 63대 총리를 지냈고, 제2차 세계대전에서 연합군을 승리로 이끈 인물이자 노벨문학상 수상자이기도 하다. 귀족 가문에서 태어나 승승장구해 온 그는 국민적 존경을 넘어, 전 세계인에게 추앙받는 이름이 되었다.
그런 그가, 단 한 점의 그림 앞에서 분노했던 사건은 오히려 그 역시 연약한 한 사람일 뿐임을 잘 보여주는 일화였다. 1954년, 팔순을 앞둔 처칠을 위해 영국 의회는 당대의 유명 화가 그레이엄 서덜랜드에게 초상화를 의뢰했다. 화가는 깊은 고민 끝에, 인생의 영광과 고뇌가 함께 담긴 ‘노회한 처칠’을 진정성 있게 그려냈다. 마침내 그림은 처칠의 퇴임식에서 공개되었고, 그림을 본 처칠은 수많은 이들 앞에서 격분했다. “더럽고 악의적인 그림”이라는 혹평과 함께, 그는 이 그림이 국회에 걸리는 것을 필사적으로 막았고 결국 사저의 지하실에 보관했다가 불태워버렸다.

후일, 그 그림의 습작이 경매에 출품되었다는 기사를 읽고 역사의 아이러니처럼 여겨졌다. 그때 문득 생각했다. 열세에 있던 2차 세계대전에서 목숨을 걸고 싸웠던 영웅이, 왜 노쇠한 자신의 얼굴을 받아들이지 못했을까. 어쩌면 사회적 성공으로 비대해진 자아가 노쇠한 자신을 견뎌내지 못한 것은 아닐까. 마치 세기의 여배우가 늙어 주름진 자기 얼굴을 거울 앞에서 외면하는 것처럼 말이다.
드라마를 보는 내내, 나는 런던의 풍경을 떠올렸다. 여행을 통해 느낀 런던은 세계 어느 도시보다 아름다웠고, 깊은 전통과 자부심이 거리를 감싸고 있었다. 중학교 영어 교과서의 표지를 장식했던 타워브리지처럼, 고전과 현대가 조화를 이룬 도시였다. 웨스트민스터 사원, 켄싱턴 궁전, 대영박물관 등 명소를 돌아보며 런던이 전통의 기준이자 모범이라는 인상을 강하게 받았었다. 실제로 런던이 세계의 4분의 1을 지배했던 대영제국의 수도이자 산업혁명의 발상지라는 사실은 그 인상에 더욱 무게를 실어주었다.
그러나 지금의 런던은 조금 달라 보인다. 2020년 브렉시트와 코로나 팬데믹 이후 시작된 침체는 좀처럼 회복되지 않고 있다. 어떤 이는 지금이 영국 경제가 가장 어려웠던 1970년대보다 더 심각하다고 말한다. 경제는 정체되고 물가는 치솟았으며, 사회적 불평등은 심화되고 있다고 한다. 전통과 자부심이 깊은 나라일수록 변화의 충격은 더 클 것이다.
드라마 ‘더 크라운’은 현재의 영국을 상징하는 듯했다. 지금의 런던은 빅토리아 여왕 시대의 영광을 등에 업고, 왕정 폐지를 두려워하는 윈저 왕가의 모습과 겹쳐 보였다. 혹은, 처칠의 자존심이 깃든 노쇠한 초상화와도 닮아 보였다. 자부심의 끝에서 현실을 마주하지 못한 채, 기억의 불 속으로 사라진 얼굴처럼….
개인이든 국가든, 성경 전도서의 말씀과 같이 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만사에 다 때가 있다. 영원한 것은 없다. 그러나 상승할 때 겸손함을 잃지 않고, 하강할 때 현실을 담담히 받아들이는 일은 생각보다 훨씬 어렵다. 인간의 것 중 완전한 것은 없기에 그렇다. 대영박물관에 진열된 찬란한 보물들조차 영국의 입장에선 자부심이겠지만, 식민지였던 나라들 입장에선 빼앗긴 역사인 것이다. 영광도 유한하고 생명조차 유한한 존재가 인간이다. 우주의 시간에서 바라보면 깜빡이는 순간에 불과한 존재일 테다. 하나님 앞에 나의 작음을 아는 것이 곧 참된 지혜일 것이다.
개인이든 도시든 국가든 역사는 언제나 현재의 거울이다. 자부심은 과거에만 머물 때 자만이 되지만, 그것을 품고도 겸허히 변화를 수용할 수 있다면 진정한 품격이 된다. 해가 지고 있는 도시 런던은 지금, 그런 품격을 배워가는 중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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