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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문화/신앙에세이

“ 직면의 창(窓), 호치민”

“소녀의 절규”_1973년에 퓰리처상을 수상한 베트남 전쟁 관련으로 가장 유명한 사진. 1972년 6월 8일 AP기자 닉 우트(1951~, 본명은 ‘후인꽁웃’로 베트남인이다.)가 찍은 이 사진에 나오는 알몸의 소녀는 당시 9살이었던 판티낌푹으로 소이탄 세례가 작렬하는 마을에서 불이 붙어 타들어가는 옷을 모조리 찢어 벗어던져 나체가 된 채 울부짖으며 내달리고 있다. “호치민을 통과하는 메콩강은 싱그러운 풍경으로 전쟁의 아픔을 뒤로하고 유유히 흐르고 있다.” “너희는 나그네를 사랑하라 전에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되었었음이니라”(신10:19)

  얼마 전, 올해 대학생이 된 한 제자를 만났다. 베트남 태생의 그 제자를 처음 만난 건 5년 전으로, 당시 한국 남성과 재혼한 어머니를 따라 호치민에서 울산으로 이주해 온 중학교 2학년 여학생이었다. 그때는 한국어를 한마디도 못 하는 이방인이었다. 핸드폰 번역기를 이용해 수업과 상담을 간신히 이어갔지만, 언어의 벽은 점점 제자의 고립감을 키웠다. 이국적인 외모와 배경에 호기심을 느꼈던 아이들도 자유로운 대화가 불가능 하자 주변에서 멀어지고 이내 혼자가 되고 말았다. 

  가만히 앉아 시간을 보내는 모습이 안쓰러워 점심시간이면 가끔 상담실로 불러 대화를 시도하곤 했다. 그때마다 번역기로 함께 나눈 대화의 중심에는 제자의 고향인 ‘호치민’이 있었다. 다행히도 내가 십여 년 전 호치민을 여행한 경험이 있어 그 기억들이 제자에게 작은 위안이 되었던 모양이다. 제자에게 호치민은 그리운 고향 친구들의 얼굴이자 이별한 친아빠의 그림자이며 존재의 뿌리였다.

  호치민은 사이공강 하류에 자리한 베트남 최대 도시로, 과거 남베트남의 수도였다. 지금도 ‘사이공’이라는 옛 이름으로 불릴 만큼 역사적 흔적이 켜켜이 쌓여 있는 도시다. 프랑스 식민 시대의 유럽풍 건축물과 열대의 활기가 어우러진 곳이자 뮤지컬 <미스 사이공>의 배경이 된 이념적인 공간이기도 하다. 그런가 하면 베트남에서 한국 교민이 가장 많이 거주하는 도시여서 친근감도 느끼게 한다. 

  처음 호치민을 방문했을 때 먼저 압도당했던 건 거대한 오토바이의 물결과 거리마다 넘쳐나는 열대 과일이었다. 엄격한 공산 체제 속에서도 스타벅스가 즐비한 모습 또한 특이했다. 자본주의 문물을 수용하여 경제적 이득은 적극적으로 취하되, 기독교 복음에 대해서만큼은 여전히 단단히 빗장을 채워둔 현실이 안타까웠다. 그런 면에서 호치민은 베트남식 아이스커피 ‘카페 쓰다’ 를 

( )닮아 있었다. 유리컵 안에서 달콤한 연유와 쓰디쓴 커피가 섞이듯, 베트남 사회는 물질의 무한 사랑과 이념의 고착이라는 두 극단이 기묘하게 뒤섞여 있었다.

 여행자의 발길을 끄는 화려한 명소들을 뒤로하고 나는 먼저 베트남전쟁의 흔적을 찾아 나섰다. 단순한 관광을 넘어 베트남의 역사적 고통과 슬픔, 그리고 오늘의 화해를 마주하고 싶었다. 

  당연히 첫 방문지는 전쟁박물관이었고, 그곳에서 전쟁의 참혹한 현실을 담은 수많은 기록과 전시물을 보았다. 고엽제로 인한 후유증과 정신적 트라우마는 가해자와 피해자를 구분할 수 없는 이념 전쟁의 깊은 상처로 보였다. 평행이론 같은 한국전쟁의 잔영이 자꾸 떠올라 그들의 치유를 위해 기도할 수밖에 없었다. 이어 방문한 통일궁은 과거 남베트남 대통령의 관저로, 1975년 북베트남의 탱크가 들이닥치며 전쟁의 종말을 알린 상징적인 장소였다. 궁 내부를 둘러보면서 그날의 긴박한 상황을 상상해 보았다. 

  냉전 시대의 점화 속에 파병되어 참전했던 한국군도 베트남전쟁의 피해자가 되어 다국적 고통과 상처를 겪어야 했다. 그런가 하면 한국군은 베트남전쟁의 가해자가 되기도 했다. 당시 다수의 파병 한국군이 베트남 여성들과의 사이에서 아이를 낳았다. 하지만 많은 병사들은 책임을 지지 않았고, 그 아이들은 ‘전쟁의 자식’이라는 낙인 속에 자라야 했다. 안타깝게도 1990년대 한국 기업의 베트남 진출 과정에서도 유사한 일이 반복되었다. 혼혈 자녀들(라이따이한)의 상처가 그대로 남아 있는 호치민은 마치 한국의 어두운 그림자를 직면하게 하는 창(窓)처럼 느껴졌다. 한국인의 한 사람으로서 여행을 통해 반성과 성찰의 기회를 가졌다. 

  더욱이 호치민에는 우리 교회가 기도로 후원하는 선교사님이 계셔서 그곳 실정을 깊이 있게 들을 수 있었다. 선교사님 내외분을 만나 현장의 이야기를 듣고 함께 기도하며 보낸 시간은 굉장히 유익했다.

  얼마 전 만난 제자에게 한국은 어떤 의미인지 물었다. 자신에게 한국은 제2의 조국이라고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한국인의 신체적 DNA는 없어도 새아빠의 나라에 살면서 정신적 DNA는 내면에서 계속 자라고 있다는 멋진 설명을 덧붙였다. 제자의 대답이 한국과 베트남 사이의 새로운 이정표처럼 느껴져서 기뻤다. 과거의 상처를 뒤로하고 새 시대의 상호 존중과 이해로 쌓는 공생의 상징으로 다가왔다.

  대학에서 무역학을 공부하고 있는 제자는 앞으로 한국과 베트남의 교역에 이바지하고 싶다는 포부도 밝혔다. 지독하게 외로웠던 시간을 의연하게 견디고 언어의 벽을 이겨내면서 한국 사회에 녹아드는 모습이 기특하고 대견했다. 여리지만 단단한 제자에게서 어느 민족보다 강인한 베트남인의 면모가 엿보였다. 혼탁한 시대 속에서도 제자를 통해 오랜만에 밝고 희망찬 미래를 보았다. 

  하나님은 이방 땅 모압 여인 룻을 부르셔서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를 잇게 하셨다. 그녀를 통해 복음의 보편성과 포괄성을 선포하신 것이다. 이 부르심은 복음이 특정 민족이나 경계 안에 갇히지 않고 인종과 출신을 넘어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음을 분명하게 보여주시기 위함이었다. 복음 안에서는 누구나 천하와도 바꿀 수 없는 귀하고 소중한 존재이기 때문이리라. 세상 모든 사람과 함께 거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열망 안에서 모든 민족은 하나인 것이다. 

  우리 곁에도 외국인 노동자를 비롯한 이방 민족 이웃들이 많이 있다. 그들을 대할 때 우리의 시선 또한 하나님의 열망에 온전히 닿아 있으면 좋겠다. 다른 혈통과 문화를 가진 배타적 타인이 아니라 믿음 안에서 함께 걸어갈 복음의 동행자로 수용하기를 기도한다.

심은신 권사(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