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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문화/신앙에세이

“영원한 약속의 섬, 괌(Guam)”

  MBTI 성향상 나는 전형적인 J형이라 정리하면서 즐거움을 느낀다. 물건이든 생각이든 복잡한 걸 차근차근 정리할 때 머리가 맑아진다. 사진 앨범이나 폴더도 예외는 아니다. 아들이 태어난 순간부터 성장해 온 모습은 물론, 가족과 함께한 여행지의 추억도 도시별·연도별로 잘 정리해 두었다. 가끔 사진첩을 펼쳐보면 기억의 숲에서 조용히 산책하는 기분이 들곤 한다. 오십 대 후반이 되고 나니 그 산책길이 더욱 자주 나를 부른다. 인생이라는 시간의 속성을 조금은 아는 나이가 되어서일까.

  며칠 전엔 문득 신혼여행 사진첩을 열어보았다. 10월의 눈부신 햇빛 아래, 서른 살의 남편이 괌의 ‘사랑의 종’ 앞에서 환하게 웃고 있었다. 분명 긴 시간이었는데 돌아보니 순간이 돼버린 삼십여 년이 마음에 고요한 파문을 일으켰다. 홍안의 남편이 이제는 머리가 희끗해진 모습을 보며, 함께 삼십여 년을 동고동락한 아내로서 애틋함과 안쓰러움, 고마움과 감사가 물결처럼 일렁였다. 31년 전 신혼여행지 괌(Guam)의 풍광이 새삼 눈앞에 환하게 그려졌다.

  괌은 오세아니아 마리아나 제도 최남단의 섬으로, 미국령의 준주(準州)이다. 세계 일주 항해 중이던 마젤란이 1521년 발견한 이후 스페인의 해외 식민기지 역할을 해왔다. 그러다 1898년 미국-스페인전쟁에서 미국이 승리하면서 미국령이 되었다. 1차 세계대전 중에는 일본군의 점령을 겪으며 원주민들이 대량 학살당하는 고난의 시간도 있었다. 이후 냉전 시대를 지나 지금까지 동아시아-서태평양 지역의 중요한 미국 군사기지로 기능하고 있다. 

  열강들의 틈바구니에서 작은 섬이 감내해 온 역사적 고통은 컸다. 원주민들은 섬과 삶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오고 또 오는 고난들을 극복해 왔을 것이다. 괌은 어느 섬보다 바다 경치가 빼어나다. 특유의 에메랄드빛 바다 빛깔이 정말 아름다워서 섬이 오히려 보석 속 무늬처럼 느껴진다. 그러니까, 주민들은 천연의 보석 속에 살고 있는 셈이다. 괌의 풍경과 주민들의 성정은 오세아니아답게 밝고 낙천적이지만, 그들의 역사는 섬의 아픔과 고뇌를 고스란히 품고 있었다. 

“너는 나를 도장 같이 마음에 품고 도장 같이 팔에 두라 사랑은 죽음 같이 강하고 질투는 스올 같이 잔인하며 불길 같이 일어나니 그 기세가 여호와의 불과 같으니라(아8:6)

  남편과 내가 신혼여행지로 괌을 택했던 이유는 단순하다. 가까운 휴양지였고, 1990년대 중반 가장 인기 있는 여행지였기 때문이다. 바다 위에서 다양한 레저를 즐긴 기억도 남아 있지만, 가장 선명한 장면은 ‘사랑의 종’을 함께 울리던 순간이다. ‘사랑의 종’은 ‘사랑의 절벽(Two Lovers Point)’에 전해 내려오는 전설을 바탕으로 세워진 기념물인데, 연인이나 부부가 함께 종의 줄을 잡고 울리면서 영원한 사랑을 약속하는 자리다.

 사랑의 종 배경이 되는 전설은 괌의 식민지 역사에서 비롯되었다. 지배자였던 한 스페인 장교가 원주민인 차모르족 여인을 좋아해 강제로 청혼했다고 한다. 이미 연인이 있던 그녀는 사랑하는 남자와 함께 도망쳤고 끝내 붙잡힐 위기에 처하자, 서로의 머리카락을 묶은 채 절벽 아래로 뛰어내렸다는 이야기이다. 그들의 사랑은 비극 속에서도 숭고했으며, 섬의 역사적 아픔 위에서 피어난 차모르 여인의 사랑은 더욱 절실하게 느껴졌다.

 이곳에 들르는 신혼 여행객들은 서로의 머리카락은 묶지 않지만, 함께 ‘사랑의 종’을 울리면서 영원한 사랑의 의미를 되새기는 것이다. 너무나 쉽게 변하는 게 인간의 마음이라면, 타인의 인생에 나의 인생을 묶어 동고동락하겠다는 약속은 인간의 약속 중에 가장 숭고한 것이리라. 그때 나는 사랑의 종을 울리면서 마리아나 제도의 수평선을 바라보며 기도했었다. 우리 두 사람이 맹세한 사랑의 약속이 하나님의 사랑에 잇대어 있기를, 인간의 연약한 약속이 하나님의 영원한 약속 안에 있기를. 우리의 결혼식에서 가장 아름다웠던 건 웨딩드레스나 축가가 아니라 성경 위에 내 손을, 내 손 위에 남편의 손을 포개고 영원한 사랑을 약속한 일이었다. 우리 부부가 삼십 년 넘게 그 약속을 지켜온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였다. 

 우리가 사랑의 종을 울릴 때는 일몰 무렵이었다. 오렌지빛 노을이 야자수를 물들이는 시간 사랑의 절벽은 붉은 암석으로 변했고, 여행객들의 그림자는 길게 늘어졌다. 숨 가쁘게 달리던 시간이 저절로 느려지고, 순간 모든 것이 극적으로 시간의 지배에서 벗어나는 듯 보였다. 잠깐이나마 진정한 ‘사랑의 약속’이란 무엇인지 그 의미를 깊이 묵상하는 시간을 허락받은 느낌이었다. 그때 나는 남편과 함께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약속 안에 거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떠올리며 감사했었다. 

 비단 결혼뿐이겠는가.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놀라운 사랑의 약속 위에 거하는 존재들이다. 바쁘게 일상을 살다가도 우리를 둘러싼 위대한 사랑의 약속을 떠올릴 때면 새삼 감사가 피어날 수밖에 없다. 그 약속 안에서 우리는 특별한 존재가 되는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신부로서 그분과 맺은 사랑의 약속은 영원하며, 그 약속 안에서 우리는 영원히 사랑받는 자요 사랑하는 자로 존재한다. 우리가 서 있는 곳이 어디든 그곳은 영원한 약속의 땅이 되는 것이다. 그렇게 본다면 괌은 우리 심장 깊은 곳에 박힌, 보석처럼 빛나는 약속의 상징일지도 모르겠다.

심은신 권사(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