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 사역관: 종말론적 책임감과 확신
사도 바울은 각 개인이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설 것 (롬 14:10)이며 거기에서 “우리 각 사람이 자기 일을 하나님께 직고”할 것(롬 14:12)을 믿었다. 여기에 각 개인들이 하나님 앞에서 져야 할 책임감(accountability)가 있다. 우리의 소망은 단지 현재의 고통을 무마시키는 데에서 그 역할을 끝내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우리의 삶을 통하여 어떠한 결정들을 내리고 어떻게 살았는가에 대하여 하나님 앞에서 책임성 있는 존재로 서게 만든다.
사도 바울의 종말론적 책임감은 그로 하여금 “각 사람을 권하고 모든 사람을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쳐서”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는”(골 1:28) 자세를 갖게 만들었다. 그의 사역의 목표는 각 사람들을 그리스도의 날까지 온전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이러한 사도 바울의 목표의식은 자신의 죽음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고 사람들을 “거룩하고 흠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자신 앞에 세우고자 하였던” 주님의 뜻에 연대되어 있음을 골로새서에서 사도 바울은 암시한다(골 1:22).
골로새서 1장 마지막에서 그가 고백한대로 이런 이유 때문에 그는 자신의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골 1:29)할 수 있었다. 또한 자신의 삶을 “선한 싸움”(고전 9:26, 빌 1:20, 살전 2:2, 딤전 1:18, 6:12, 딤후 4:7)이나 고통을 가져오는 “달음박질” (고전 9:24, 딤후 4:7, 비교: 행 20:24)로 이해하고 표현한 것을 볼 수 있다. 사도 바울이 그토록 많은 어려움 가운데서도 절망에 굴복하지 않고 자신의 사역을 끝까지 완수할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종말론적인 사역관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당시의 많은 사역자들이 사도 바울의 정통성을 의심하고 비난하며 음해하고 몇몇 교회들이 부화뇌동할 때도 그를 흔들리지 않게 중심을 잡아 주었던 것도 이러한 종말론적인 자신감이었다.
사도 바울의 정통성을 의심하고 있는 고린도 교인들에게 “주 예수를 다시 살리신 이가 예수와 함께 (너희가 의심하는) 우리도 다시 살리사 (우리의 정통성을 의심하는) 너희와 함께 그 앞에 서게 하실 줄 안다”(고후 4:12)고 말하며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심판을 받을 것을 상기시킨다 (고후 5:10).
바울이 수없이 흔들릴 수 있는 상황 속에서 정도를 걸어갈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자신이 돌보았던 교회들과 함께 하나님 앞에 나아가게 될 것을 진심으로 믿었기 때문이었다.
철저히 종말론적 역사의식에 뿌리 내린 소망
사도 바울은 많은 사람들이 추구하는 현세적인 복을 받은 그리스도인의 모습이 아니었다. 그의 삶은 그가 속했던 시대와 상황 개인적인 고통 그리고 자신이 주님의 뜻을 좇아 살았기 때문에 겪어야 했던 수많은 어려움과 환난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가 좌절감에 빠졌던 적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가 절망에 굴복하게 하지 않았던 것은 ‘우리 주님께서 다시 오심에 대한 소망’이었다. 그는 중심을 잃고 이리 저리 휩싸일 수 있는 수많은 순간이 있었지만 그럴 때에 중심을 잡고 꾸준히 자신이 달려갈 길을 달려갈 수 있게 했던 것도 언제인가 그가 섬긴 교회와 함께 하나님 앞에 설 것이라는 소망이었다.
그로 하여금 현실이 주는 달콤한 성공의 유혹을 과감히 뿌리치고 자신을 의롭다 여겨주신 주님의 복음에 자신을 투철하게 드릴 수 있게 하였던 것도 ‘복스러운 소망’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이었다.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는 그 자체로서 우리에게 소망을 가져다 줄 것이 없다. 아마도 진보가 있는 만큼 진보의 그늘이 더욱 깊어질 것이다. 한국 사회의 50년 전이건 지금이건 사람들은 여전히 좌절하고 절망한다. 어쩌면 이런 좌절과 절망의 현상은 2000년 전 사도바울의 삶에서나 우리의 삶에서나 매우 비슷하게 나타나는 것 같다.
만약에 우리도 사도 바울이 가지고 있었던 그 철저하게 종말론적인 역사의식을 가질 수 있다면 그리고 그것에 뿌리를 내린 “소망”을 가진다면 우리도 사도 바울처럼 절망에 무릎 꿇지 않고 우리 주님 오실 때까지 우리의 선한 싸움과 달려갈 길을 마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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